반도체 직업병이 우리 사회의 상식으로 자리잡는 동안에도 여전히 문제가 되지 못했던 문제들. 생리불순과 불임, 유산은 흔했지만, 문제가 되지 못했고, 여성노동자들은 아픈 아이를 낳았습니다. 문제 자체보다, 문제가 문제가 되지 못한 것이 더 많은 것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다른세상을향한연대’ 실행위원 전지윤 활동가가 보내온 서평입니다. [기자말] |
"진실을 전달하는 데는 두 사람이 필요하다. 하나는 진실을 전하는 자요. 또 하나는 진실을 경청하는 자이다. 진실을 전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다. 사랑이 내포된 말만이 사람의 귀를 기울이게 한다."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의 활동을 지켜보면, 반올림 활동가인 이종란 노무사가 언젠가 인용했던 이 말이 떠오른다. '사랑을 담고서 진실을 경청하고 그것을 퍼트리는 사람들'이 반올림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은 반올림이 기획하고 기록노동자 희정이 써낸 또 하나의 '사랑을 담은 진실과 경청'의 기록이다.
희정은 언제나 공부하고 성찰하면서 성실하게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힘들여 풀어내는 '기록' 노동자이니 이만큼 딱 맞는 조합도 없다. 이 기록이 특히 중요한 것은 지금 반도체에 대한 이야기들이 대부분 '미중의 경제전쟁, 칩4 동맹, 한국 반도체 산업의 미래 전략'에 대한 이야기들로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뉴스와 기사를 보다보면 '메모리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에 자부심을 느끼며, 이제 '우리'가 칩4 동맹에 들어가서 중국의 추격을 피할 것인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적절히 자리잡고 '국익'을 찾을 것인지 고민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이 책은 말한다.
"세상이 오답 가득한 선택지를 내놓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 그 선택지가 숨기고 있는 이야기를 들춰보려 한다."
그 이야기 속에서 한국이 세계적 반도체 강국이 된 과정은 결코 '자랑스럽지' 않다. 그것은 1980~1990년대의 미국에서 반도체 산업이 낳은 생식독성 물질과 백혈병, 뇌종양, 고통, 죽음들이 바다를 건너온 과정이었다. 한국 정부와 기업들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렇게 '글로벌 가치사슬'은 바뀌었고, '글로벌 산재사슬'도 바뀌었다.
한국 정부와 기업들은 이런 위험을 알려주지 않은 채 멀리 지역에서, 어리고, 경험없는 여성들을 불러 모았다. "기업은 모를 만한 사람을 뽑아 일을 시키고, 알아도 어찌할 수 없는 조건을 만들고, 알면서도 모른 척하도록 길들인다." 그리고 '이건희의 도전 정신과 한국 여성들의 인내심, 섬세함, 손재주가 반도체 신화를 만들었다'고 언론은 말했다.
이 '신화'의 실체가 무엇인지 이제 우리는 어느 정도 안다. 여기에는 역시 진실을 위한 두 가지 조건이 작동했다. 먼저 용기있게 진실을 말하는 노동자들이 있었다. 돈과 힘을 가진 이들은 노동자 탓으로 돌렸고, 정보를 숨겼고, 개인에게 증명을 요구했다. "근거를 가질 수 없는 집단을 만드는 것은 불평등을 유지하는 길이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힘 있는 자들은 뒷짐 진 채 아픈 이들에게 근거를 내놓으라 한다."
그리고 진실을 경청하는 사람들, '반올림'이 있었다. 진실을 위한 두 가지 조건의 결합은 세상을 바꿨다. 이제 '반도체'와 '직업병'은 연관 검색어가 됐다. "반도체 사업장의 위험은 이제 우리 사회의 상식이 되다시피 했거든요."(이상수 반올림 상임활동가)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문제를 정말 '문제'로 만든 것이다.
이 책의 핵심은 2018년 삼성의 공식사과와 합의 그 이후의 이야기이다. 그것이 시작일 뿐이었다는 것은 금방 분명해졌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일하는 사람을 일회용품처럼 취급하지만, 유기적인 몸을 지닌 채 타인과 연결되어 살아가는 인간은 일회성 존재가 될 수 없었다. 피해마저 연결됐다." 이제 '문제'가 돼야 할 것은 '태아 산재와 2세 질환'이었다.
감기약도 피한다는 임신 기간에 여성노동자들은 '클린룸'에서 생식독성 물질과 함께 있었다. 삼성이 준비한 '임산부용 방진복'은 반도체만 '보호'했다. 많은 이들이 유산을 했고 또 많은 아이가 식도폐쇄증, 콩팥무발생증 등 선천성 기형을 갖고 태어났다. 여성 노동자들은 태어난 지 며칠 만에 온 옴에 바늘을 꽂고 울고있는 아기를 봐야 했다.
책에는 아픈 엄마가 간신히 기어 가서 분유를 주고, 울면서 젖병을 씻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아픈 아이를 키운 이야기가 담겼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직업이 육아'라는데, 아픈 엄마가 아픈 아이를 키우는 것은 더 힘들 수밖에 없었다. '한 아이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데, 기업과 사회의 외면 속에 엄마들은 혼자서 '온 마을'이 됐다.
이것은 반도체 산업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힘들고 위험한 조건 속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들이 곳곳에서 비슷한 일을 겪었다. 다시 '진실을 위한 두 가지 조건'이 작동했다. 제주의료원 여성노동자들의 10년 투쟁으로 2020년 업무상 재해로 인한 태아의 선천적 장애를 산재로 인정하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2021년 연말에는 2세 질환 직업병이 보상받을 수 있는 '태아산재법'(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안전하지 않는 일터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자녀도 산재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또 하나의 '상식'이 되기 시작했다.
이 책은 그 과정을 견뎌온 여성 노동자들의, 그 자녀들의 목소리이고, 그것을 듣고 함께 손잡아 준 사람들의 기록이다.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2011)에서 자신이 직업병 피해자를 '착하고 순수한 반도체 소녀'로 너무 납작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계속 돌아보던 기록노동자 희정은 이 문제를 더욱 깊고 넓은 '문제'로 만든다.
공감격차, 젠더와 불평등, 성적 권리와 재생산 정의에 대한 고민을 담았고, 아픈 이들에게 어떤 의사도 써주기 힘든 처방전을 써나갔다. 그래서 이 책은 대부분의 여성(노동자)들이 자신의 삶에 대한 진실을 말하려고 할 때 부딪히는 네 가지 장벽 – 자기 검열, 입을 막는 세력, 듣지 않는 사회, 메신저에 대한 공격 - 을 함께 넘어서기 위한 사다리가 된다.
하지만, 당연히 이것은 새로운 시작이다. 법이 있다고 '태아산재' 신청을 다 인정해주지는 않는다. 아직 반도체 산업의 하청, 협력업체 노동자들과 청소 노동자들의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고 있다. 또 이윤을 쫓는 자본과 함께 위험은 끝없이 더 낮은 곳으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이동하고 있다. 미국에서 대만과 한국으로 왔던 화학약품과 설비들은 이제 베트남과 브라질로 이동 중이다.
다시 더 많은 노동자들과 그 자녀들이 고통받을 것이다. 그러나 고통은 인정받고 연결될 때 이겨낼 수 있다. "가장 아팠던 시기에 내가 원한 반응은 '네, 우리는 당신의 고통을 압니다'였다. 사람들이 내 고통을 인정할 뿐 아니라 내 고통에 연결되어 있다고 인정하길 원했다"(아서 프랭크, <아픈 몸을 살다>).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은 그렇게 고통을 인정하고 연결하면서 함께 이겨나가자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