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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시민기자는 지난 10월 29일,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던 현장에 있었습니다. 참사의 생존자인 그는, 지난 11월 2일 한 포털사이트 커뮤니티에 참사 이후 자신이 받은 상담 기록을 일기와 대화 형태로 정리해 올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이태원 참사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독자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당사자의 동의를 얻어 그 기록을 그대로 옮깁니다. 그간 '水'라는 필명으로 글을 썼으나, 이제는 실명을 밝히고 기사를 연재합니다. [편집자말]
 7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에 조성된 이태원 압사 참사 추모공간에 시민들이 희생자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7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에 조성된 이태원 압사 참사 추모공간에 시민들이 희생자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 유성호
 
누군가에게 보호받는 느낌

1.
센터 선생님께.

막상 선생님께 편지를 쓰려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색해요. 
다짜고짜 감사한 걸 말씀드리자면, 
그날, 저와 함께 울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내가 왜 우는지도 모르는 채 다 이야기를 쏟아내다 
고개를 들었을 때, 선생님이 같이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보고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면서 한 겹의 보호막이 저에게 생긴 듯했어요. 

언제든 전화를 해도 된다며 개인 회선 번호를 알려주시던 때는 
보호막이 두 겹 생긴 듯했습니다. 

나는 강하니까, 자력으로 일어나 보겠다고 약을 최대한 먹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지만 저는 결국 마음의 병에게 진 것 같아요. 

병원을 연결해주시면서 저를 앉혀 놓고, 
"직접 예약하지 말고 제가 지금 전화해 놓을 게요. 
바로 지금 가시면 어떤 과정 없이 알아서 처리하고 받아주실 거예요"
라는 말에 제가 많이 배웠습니다. 

아 이런 방식으로 위로받으면 이렇게 큰 위로가 오는구나
사람을 케어한다는 것은 이렇게 하는구나.

덕분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가볍게 병원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보호받고 있는 느낌 덕분에 용기 내 병원으로 가요. 

2.
새로운 선생님께. 

선생님, 저는 심리학회 전화상담을 포함해서 이미 많은 선생님들을 만나왔어요.
만나는 선생님마다 그날 있었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해 달라고 했지만, 
그 과정을 말하는 것이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말하고 나서, 나를 이해하지 못하면 어쩌지.
이해받지 못하는 상황을 맞이하면 어쩌지 걱정했을 뿐이었어요.
늘 쟤는 왜 저래, 쟤는 특이해, 쟤는 별나 
이해 안 가는 애야 라는 말을 들으며 들어왔던 사람이었어요.
그래서인지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이해받지 못하면 저는 늘 힘들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그게 저의 방어 기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껏 만났던 선생님들과 다르게 선생님은 , 
시크하고, 이성적이며, 오히려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분이셨어요. 
약간은 긴장할 수 있는 분위기에 몸 근육이 빠르게 굳어가는 것을 느낄 때쯤 물으셨지요. 

선생님 : "혹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거나, 스스로를 해하려는 행동을 한 적이 있나요? 난간에 선다거나 위험한 곳에 자신을 노출한다거나요."

나 : "아니요 그런 적은 없어요."


'아.. 감사하다'

그때부터였지요, 제가 울기 시작하면서 선생님께 마음을 열기 시작했던 것이.
모든 사람은 각자의 위로 방식이 있다는 것을 제가 또 깜박했어요.
겉으로만 보고, 말투만 듣고, 이미지만 보고, 저 사람은 날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제가 창피하면서도 진심으로 나의 안위에 대해 감사하다고 해주시는 것이 저를 살게 했습니다.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방법
 
 3일 저녁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에서 내외국인들이 이태원 압사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3일 저녁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에서 내외국인들이 이태원 압사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 권우성
 
3.
선생님은 이렇게 말하셨지요.

"저는 약을 쓸 거예요. 일단 잠을 자야 해요.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은 약간 붕 뜬 상태에요. 두 발이 현실로 닿게 해야 해요. 
그게 바로 잠을 자게 하는 것이에요. 하나는 안정제, 심장 빨리 뛰는 것을 막게 해줘서 불안을 낮춰 줄 거고요. 또 하나는 공황장애 약, 또 하나는 잠 오게 하는 약, 이 약이 가장 중독성이 없기 때문에 골랐어요.

고위험군 PTSD는 맞아요, 그런데 트라우마는 초기 3개월이 중요합니다. 
3개월이 넘어가도록  PTSD가 지속되면 그때는 진짜 PTSD 환자로 남겠지만, 
3개월 내에 치료되면, 급성 스트레스성 장애로 병명이 종결될 수 있어요.
제가 그렇게 만드려고 개입하는 거고요. 

이 참사에 대해 깊이 애도하고 있고, 진심으로 안타까운 사건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한 마음으로 도와드리는 거예요.
제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열심히 해봅시다."


- 의사의 확신에 찬 대답에 나도 용기가 나던 순간.

4.
"그리고 그 CPR 이야기 말이에요, 
저 정신과 의사잖아요. 올해 마흔두 살이거든요? 
저 CPR 한 지 20년 넘었어요. 학교 다닐 때 1학년 때 이후로 안 해봤어요.
정신과라서 CPR 할 일이 많이 없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제 말은, 의사인 내가 그 현장에 있었어도
아무리 예전에 배운 나라도, 한 지 오래된 상태였기 때문에
CPR을 돕지 못했을 겁니다. 

저였어도 일단 집으로 돌아가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 의사 선생님이 말하던, 그때의 본인이었다고 하더라도.

5.
"사건이 일어나기 전으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갈 수는 없어요.
이미 사건은 일어났고, 시간은 되돌릴 수 없으니까요. 
그러면 이 상처를 어떻게 내가 잘 다룰지 생각해봅시다. 
시각을 바꾸는 거예요.

나도 21살에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같은 과 동기가 갑자기 하늘나라로 갔죠. 
덩치가 큰 친구여서 지레짐작으로 체력이 좋을 거라고 모두가 생각했던 것 같아요. 우리가 모두 한여름에 햇볕을 받으며 있었는데, 
그때 열사병으로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는데도, 충격이 크게 왔어요.
조금 더 세심하게 살필 걸,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하는 자책이 너무 컸어요. 
모든 비난의 화살이 우리 학교 동기들에게 오기 시작했고, 
어른들은 우리를 아무도 보호해주지 않았죠. 

아주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더 힘들었어요. 

하지만 그 이후 지금까지 매년 그 친구의 기일에 맞춰 방문해요. 
그리고 이런 사건의 환자들이 내게 오면 정성껏 치료합니다. 
어떻게서든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으로 존재하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가요. 그게 제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방법이에요." 


- 도대체 언제 괜찮아지는 거냐는 나의 울부짖음에 의사 선생님의 대답.

6.
선생님 : "자기혐오가 시작될 때는 생각을 멈춰야 돼요." 

나 : "그걸 어떻게 멈춰요?" 

선생님 : "몸을 움직이세요, 운동하라는 게 아니에요.
분노의 양치질이라도 해요, 산책을 무한대로 한다던가
아니면 레고를 한다거나." 


집에 와서 오늘 센터 선생님이 챙겨주신 마음 안정화 키트를 열어봤어요.
국가트라우마센터에서 제공하는 키트였는데,
그 속에 컬러링 북과 색연필이 있더라고요.

같은 사람이 준 키트가 아닌데도, 
의사 선생님이 조언하고 필요한 물건이 들어있는 게 
전문가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역할을 다하며 
나를 보호해주고 있다고 느꼈어요. 
뿐만 아니라 과한 긴장에 어깨결림, 뒷목 당김이 있었는데
파스도 있더라고요.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모두 나처럼 
근육통도 있나 보다 하고 묘한 위로가 있었어요. 
여러 전문가들 덕분에 저는 매일밤 자기 전 색칠공부를 하고, 
파스를 붙이고, 키트 안의 눈 안대, 이어플러그를 꽂고 자요.
의사선생님과 국가트라우마센터가 함께 재워주는 느낌이랄까요

- 자기혐오를 멈추는 방법 중에서.

5.
언니에게, 

언니, 선생님이 처방해준 한 무더기의 약 봉지를 들고나오며, 
홍제역 근처에서 눈물을 훔치며 집까지 걸어왔어요. 
나는 정말 약 없이도 버텨보려고 했는데, 
거대한 약 봉지를 바라보니 내가 정말 아픈 사람인 거 같더라고요. 
아 나... 아프구나. 그때 진짜 인정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요.
집에 와서도 한참을 식탁 위 약을 째려보고 눈싸움하다가
결국 입에 털어 넣었습니다. 
'마음의 병은 감기와도 같은 것이다'라고 평소에는 생각했지만, 
막상 내가 먹으려니 두려웠나봐요. 
트여있는 척했던 편견 덩어리인 건 맞지만,
그렇게만 생각하기엔 어쩐지 너무 외롭고 속상해요. 

언니 : "약 먹는 행위에 너무 의미 두지 마. 
나도 코로나 때 너무 힘들고 잠이 안 와서 약 처방 받아서 먹고 잤어.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행복은 너에게"


- 언니의 말에 또 한 번 위로를 받았던 카카오톡 대화에서.  

#이태원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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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연재 이태원 참사 생존자의 이야기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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