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과학이 주목받고 있다. 과학적 사고와 모니터링을 기반으로 하는 시민과학은 과학의 대중화를 넘어 과학기술 시민참여, 다시 말해 과학기술 분야의 민주주의 확대 방안으로 사회문제 해결형부터 공공성 강화까지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많은 전문가가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사실 문헌자료만으로 시민과학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시민과학에 뛰어든 이들의 사례, 즉 그들의 이야기다. 그들의 스토리를 통해 시민과학의 현주소를 탐색할 수 있다. 기자는 '시민과학자는 어떤 활동을 하고 있을까?', '이들은 시민과학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에 대한 질문을 시민과학자에게 던졌다. '시민과학으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하 시세사)' 시리즈는 시민과학자의 삶의 이야기이며 세상을 전환하기 위한 그들의 쉼 없는 노력이다. 시세사 시리즈는 Kwater 주최, (사) 시민환경연구소 주관 '한강 유역 철새 모니터링과 서식환경조사를 통한 시민과학의 가능성과 발전방안 연구'의 하나로 기획됐다. 지금부터 시민과학자의 삶을 들여다본다. [기자말] |
"자동차나 오토바이처럼 공간을 난폭하게 대하지 않고 풍경의 일부가 되어 세상을 겸손하게 바라보게 만듭니다. … 인류가 만든 공산품 중에 가장 아름다운 발명품입니다."(풀꽃 세상을 위한 모임. 2002. '풀꽃상 선정 이유')
'어쩌다 타는 사람이 뀌는 방귀 외에 대기오염을 일으킬 일이 없고, 운동 부족으로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낼 일 없게' 하는, "인류가 만든 공산품 중에 가장 아름다운 발명품"은 바로 '자전거'를 칭한다. 이 자전거를 기반으로 경기 고양시에서 생태·역사·인문학 관점을 종합한 시민과학을 풀어내는 이가 있다. 바로 고양자전거학교(이하 자전거학교) 한기식 대표(54)다.
지난 10월 중순 환경운동연합 생태보전국 안숙희 국장과 함께 자전거학교 사무실과 교육장이 있는 고양종합운동장을 찾았다. 기자가 한기식 대표의 활동을 먼발치에서나마 처음 접한 것은 2020년 울산에서 열린 제19회 강의 날 대회 때였다. 이때 그가 속한 단체는 '하천살리기 콘테스트'에 참가했고, 대상 격인 '수달상(환경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자전거학교의 본질은 자전거 단체지만, 알아보니 그는 자전거 운동 그 이상을 하고 있었다. 시간만 되면 한기식 대표를 만나 자전거학교에 대해 인터뷰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닿지 않았다. 올해 자전거학교는 지난해에 이어 'SBS 물환경 대상'을 신청했고, 이와 관련해 환경운동연합 생명의강 특위 부위원장으로 현장 실사에 참여했던 기자는 기쁜 마음으로 그를 만나러갔다.
철인3종 경기 매니아에서 자전거 전도사로 바뀐 이유
고양시에서 나고 자란 한 대표는 과거 대학에서 체육학과를 다녔고, 대학원에선 건강관리학을 전공했다. 그는 한국 철인 3종 경기 초창기 멤버였는데, 이 경기는 수영 3.5km, 사이클 180.2km, 마라톤 42.195km를 한 번에 달리는 말 그대로 '철인'들의 대회다. 그는 특전사 장교로 근무하면서 "뺨 맞아가면서도 (대회에) 나갔었다"라고 할 정도로 애호가였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여덟 번 완주하고 외국 대회에 세 번 갔다 왔다"라며 "거의 미친 수준이었다"라고 말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그때보다는 조금 살이 붙었지만, 그의 사무실 한쪽에 있는 철인3종 경기에 출전했던 모습이 담긴 사진은 여전히 강력한 포스를 느끼게 한다.
특전사 전역 후엔 대학에서 8년을 강의했다. 겸임 교수를 할 정도로 열심히 지도했고, 학생들 자격증과 취업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그러다 '이제 그만 나와도 된다.'라는 학과장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성과 면에서 누구한테 뒤지지 않았는데, 허무하게 마무리하게 된 순간"이라면서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절망과 충격을 받았다."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나이 마흔 무렵,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처음 시작했던 철인3종 경기 관련 교실은 체력적으로 무리였고, 젊었을 때 했었던 헬스 트레이너를 다시 하기에는 나이가 많았다. 그는 고민 끝에 자전거 가르치는 일을 생각했지만, 이 역시 쉽지 않았다. "자전거도 돈을 내고 배우나요?", "밥은 먹고 사나요?"라는 게 사람들의 반응이었단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안전과 배려' 강조... "자전거, 교통수단이자 건강 수단이기도"
그때부터 그는 친구와 각종 모임, 주말 없이 자전거 운동에 몰입했다. 그는 "끈기와 도전"이 자기 삶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단어라고 했다. '안 되면 될 때까지'라는 그의 품성이 오늘에 이르게 한 원동력이다. 그는 2009년 (사) '자전거 21 고양시지부'로 시작했고, 2012년에는 '고양시 하천네트워크'에 가입해 하천 운동을 함께하는 자전거 환경단체로써 자리를 잡아갔다.
자전거학교는 40대부터 70대의 여성 회원이 많다. 현재 350여 명 정회원으로 구성돼 있는데, 처음 초급 교육과정에 온 상당수는 자전거를 못 탈 뿐 아니라 고혈압, 당뇨, 우울증 등 성인병 회원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분들이 자전거를 통해 건강을 지키면서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 "요즘은 회원들이 한 60km 정도 타야 탄 것 같다고들 한다"라는 게 그의 말이다.
다른 자전거동호회와 차이점에 대해 한기식 대표는 "우리는 안전을 우선시 한다"라면서 "속도가 아니라 배려하며 타는 것을 강조한다"라고 말했다. "교육할 때 매우 엄격하게 한다"는 그에겐 나름의 이유가 있다. 2017년 한국교통연구원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 중에 월 1회 이상 자전거를 이용하는 인구는 1340만 명이라고 한다. 이 중 330만 명은 매일 자전거를 탄다는 얘기다.
그에 따라 자전거 교통사고가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 2018년 도로교통공단의 분석에 따르면 자전거 교통사고 건수는 감소추세지만, 사망자 비율은 오히려 증가했다. 사망자의 90% 가까이는 안전모 미착용에 따른 결과였다. 그에 따라 한기식 대표는 안전모 착용하기, 건널목에서 자전거 끌고 가기 등 특히 안전에 관한 기본을 강조한다.
그는 '안전과 배려'라는 기본 원칙을 지켜야 회원들이 자전거학교 중급, 고급반으로 승급할 수 있게 만들었다. 또 자전거학교는 '회원 참여 하천 활동(월 1회 하천 정화, 외래식물 제거 등)'을 펼치면서 개인과 환경의 건강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는 점도 여느 자전거동호회와 차별화된 특징이다.
한 대표는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서라도 자전거가 더욱 활성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전거는 교통수단이자 건강 수단이다. 외국은 차도를 점차 줄이고 자전거 도로를 늘리고 있다"라면서 "정치인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자전거 정책에 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가만히 기다리다간 늦는다"라고 강조했다.
월 1회는 하천 정화 나서는 사람들... 한 대표, 10년째 생태하천 지도 제작
한 대표에게 자전거가 전공이라면, '지도 제작'은 부전공에 해당한다. 그는 2013년부터 '고양시 생태‧하천 지도' 등 여러 지도를 만들어내고 있다. 10년 동안 고양시 전 구간 생태·하천 지도를 만들었다. 그가 만들어내는 것은 단순 지도가 아니다. 생태·역사·인문학을 총망라한 그야말로 명품 지도였다. 이 때문에 그는 '고양시의 김정호'라고 불리고 있다. 그가 만든 생태하천 지도는 고양시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양시 홈페이지 '하천지도 제작' 바로 가기).
2015년 그가 만든 '경기 고양시 하천지명사전'은 고양시에 있는 18개 지방하천의 유래와 역사에 대한 자료와 함께, 채수 지점 등의 하천 활동 관련 정도를 담았다. 한 대표는 "하천을 둘러싼 재밌는 역사적 배경이 많다"라면서 "이걸 청소년들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한 대표가 제작한 '고양시 하천문화탐방길'은 하천 주변 문화·역사적인 가치를 기록했다. 이를 바탕으로 총 16개 코스의 '고양시 명품 자전거길'이 만들어졌다. 하천 구간별로 생태·역사·문화 등이 담긴 지도를 만든 지자체는 전국에서 고양시가 유일하다. 2018년 고양시는 생태·하천 애플리케이션을 별도로 만들었다. 한 대표의 노력과 성과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한 대표의 지도는 '험난한 발품'의 결과물이다. 그는 전문가 찾아가 자문과 고증 등의 확인 과정을 거쳐 지명을 기록한다. 역사적 장소와 의미는, 인터넷에 공개된 정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를 일일이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 지도에는 해당 하천에서 볼 수 있는 주요 식물과 새 등의 생태 정보를 담았다.
생태 현황과 생태 적소의 풍경 등의 모습을 제대로 담기 위해 한 대표는 자전거와 도보를 이용해 4계절 내내 주요 지점에 접근해서 수많은 사진을 찍고, 거기서 최적의 사진을 걸러냈다. 그는 "지도는 내 얼굴이다 싶어 퀄리티에 신경을 많이 쓴다"라면서 "나중에 내가 '고양의 김정호'라는 이름을 남기고 싶다"라고 말했다.
시민과학은 성찰과 통찰이 담긴 지속적인 기록을 통해 세상을 유익하게 만드는 결과물을 만드는 실험이자 과정이다. 이런 관점에서 시민과학은 자연·생태 분야로 국한할 필요는 없다. 앞서 언급한 거처럼 한기식 대표의 하천·생태 지도는 끊임없는 모니터링과 기록을 통해 하천의 생태, 역사, 인문학을 담는 종합판이다. 이 역시도 우리가 확산해야 할 시민과학의 영역이다.
"자전거는 내 인생의 자체다"라고 말하는 한 대표는 "하천도 변하고 있다. 그런 변화들을 모니터링하면서 그간 만든 지도를 업그레이드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그동안 활동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지역 언론사 기자와 공동으로 '고양 하천 이야기'라는 대중 도서를 제작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