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들이 생존권을 위해 쟁의행위를 하면 수십, 수백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각오해야 하는 상황. '노란봉투법' 제정 요구가 커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등 야당은 연내 법 제정을 약속했지만 정부·여당·재계의 반대가 거세다. 노란봉투법의 의미를 살펴보는 연쇄 인터뷰를 진행한다.[편집자말] |
지난 6월 7일, 2만여 명의 화물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했다. 기름값이 리터당 2100원까지 치솟는데 운송료는 그대로 머물러 생계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저임금에 시달리는 화물 노동자들은 심야 운행 등 과노동에 내몰리게 된다. 화물차는 대형 사고 위험이 높다.
안전운임제는 이를 막기 위한 보호 장치다. 최저임금제처럼 화물 노동자들의 적정 임금을 보장, 과로·과적·과속을 방지하는 제도다. 다만 시멘트와 컨테이너 2개 품목 운송에 한해 2020년부터 올해 말까지 3년간 시행되고 없어지는 '일몰제' 조항으로 돼 있었다. 이에 화물노조는 안전운임제 일몰제 폐지와 전 품목 확대를 요구했다. 6월 14일 물류 대란이 장기화되자 정부가 노조 요구를 '논의하겠다'는 입장을 보였고, 총파업은 8일 만에 일단락됐다. 화물 노동자들은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이때 일터로 돌아가지 못한 화물 노동자들이 있다. 하이트진로 화물 노동자들이었다. 이천·청주 공장에서 소주를 실어 나르는 하이트진로 하청 화물 노동자 130여 명은 15년간 운송료가 동결된 채 일하고 있었다. 경윳값이 천정부지로 오르자 20년 차 화물 노동자들의 월 수입이 200만 원 아래로 떨어졌다. 최저 임금에도 못 미쳤다. 차량 정비를 하거나 조그만 사고라도 나게 되면 오히려 마이너스가 됐다. 견디다 못한 이들이 지난 3월 노조를 만들었다. 돌아온 건 집단 해고였다. 하이트진로가 단체로 계약을 해지해버린 것이다. 5월부터 파업이 시작됐다.
원청인 하이트진로는 하청 물류업체 소속인 화물 노동자들과 직접적인 계약 관계가 없다며 교섭에 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파업이 불법이라며 노동자들에게 55억 원가량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노동자들은 집과 화물차까지 가압류 당했다. 파업은 격렬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난 8월 4일, 하이트진로 홍천 공장 앞 다리 위에서 시위를 벌이던 화물 노동자들이 경찰의 압박에 못 이겨 강물에 투신하는 일이 발생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한 노동자는 심폐소생술로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럼에도 협상에 진전이 없었다. 8월 16일, 하이트진로 화물 노동자들이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있는 하이트진로 본사 옥상에 올랐다. 고공농성이 시작됐다.
'120일' 파업 후 합의… 돌아가지 못한 이들
옥상에서 버틴 지 25일째, 추석 연휴 첫날이던 9월 9일 노사가 합의를 봤다. 하이트진로 측은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철회하고, 계약 해지된 노동자들을 복직시키기로 했다. 노동자들이 요구했던 운송료 30% 인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운송료 5% 인상 선에서 마무리됐다. 그렇게 장장 121일 만에 파업이 끝났다.
하이트진로 화물 노동자들은 "수십억 손배·가압류가 실제 회사가 입은 손해를 배상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협상의 지렛대로 악용됐다"고 안타까워했지만, 이미 4개월 여 수입이 끊긴 상태였다. 한계였다. 파업을 접은 노동자들은 다시 하이트진로 공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때마저 돌아가지 못하고 남은 노동자들이 있다. 이진수(54)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 하이트진로지부 부지부장 등 노조 간부 5명이다. 사측은 120일 넘는 파업에 대한 '책임자'를 요구했다. 파업을 이끈 이 부지부장 등 5명의 해고였다. 이 부지부장은 "옥상에서 싸우는 동지들은 뛰어내리겠다고 하고 있었고, 지상에서 몇 달간 돈을 벌지 못한 동지들은 추석 명절 때 가족들 볼 낯이 없는 상태였다"라며 "조합원들을 지키기 위해 해고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2차 하청 물류업체 소속으로 하이트진로에서만 25년 일한 이 부지부장은 현재 이천 일대 현장을 전전하며 개별 용차 업무를 받아 일하고 있다. 이 부지부장 외 나머지 해고자 4명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그는 보통 새벽 4~5시에 출근해 오후 5시에 퇴근한다. 120일 파업 동안 쌓인 빚을 갚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다.
이 부지부장은 하이트진로가 낸 수십억 손배의 당사자였다. 자신 명의 아파트 중 1억 원이 가압류되기까지 했다. 그는 "억 단위가 넘는 손배는 결국 노동자 보고 죽으라는 얘기"라며 "하청이든, 화물 기사든, 일하는 모든 사람들의 노조할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란봉투법(노조법 2·3조 개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노란봉투법은 하청 노동자들도 원청과 교섭할 수 있도록 하고,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무분별한 손배·가압류를 제한하는 법이다.
다시 시작하는 파업
어렵게 다시 운전대를 잡은 이진수 부지부장은 24일부터 또다시 기약 없는 파업에 들어간다. 안전운임제 확대를 다시 요구하고 나선 화물연대 총파업에 동참하기 위해서다. 지난 6월 파업이 종료된 이후 지금껏 정치권 논의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이 부지부장은 "나도 당장 생활이 어렵지만, 파업을 하면서 연대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라며 "하이트진로도 전국의 노동자들이 연대해준 힘으로 120일 넘게 파업할 수 있었다. 총파업에 함께할 것"이라고 했다.
'노조를 시작한 것에 후회는 없나'란 질문에 그는 "더 이상 못 살겠어서 노조를 하고 파업을 했지만, 오히려 아직 살 만한 세상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라며 "우리에게 폭력을 휘두른 경찰들도 있었지만 자기 방패로 차에 낀 내 다리를 감싸준 경찰도 있었고, 생면부지인 화물 노동자들에게 자고 먹을 곳을 내준 홍천의 목사님도 계셨다. 우리보다 더 어려운 노동자들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라며 "안전운임제는 우리와 직결되는 사안은 아니지만, 나도 차를 세우고 연대할 것"이라고 했다.
22일 저녁, 일을 마치고 차에서 내린 그를 경기도 이천 하이트진로 공장 주변 화물차 주차장에서 만났다.
"25년 동안 일한 곳에서 해고, 조합원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 어떻게 지내고 있나.
"파업 이후 계속해서 경찰서에 불려 다니며 조사를 받았다. 고마웠던 분들께 제대로 인사도 다 못 드렸는데… 생활이 급해서 용차 일을 시작했다. 2주 정도 됐다. 노동자는 역시 일하는 게 더 편하다."
- 지난 9월 9일 노사 합의로 파업이 끝나면서 하이트진로 화물 노동자들이 일터로 돌아갔지만, 이 부지부장을 비롯한 노조 간부 5명은 해고됐다.
"어쩔 수 없었다. 곧 있으면 조합원들이 다 죽게 생겼으니. 옥상 동지들도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상황이었다. 명절을 앞두고 다시 서울로 올라오기 힘든 조합원들도 많았다. 손배, 가압류를 철회하는 선에서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해고 되는 건 사실 크게 개의치 않았다."
- 파업이 120일 넘게 갔다.
"사실 화물 파업은 오래 가기가 힘들다. 화물 노동자들에게 화물차는 전 재산인데, 화물차는 대부분 한 3일 정도 시동을 안 걸면 제네레다(발전기)나 배터리에 이상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상시에도 여행을 가거나 하면 동료들이나 주유소 직원들한테 하루에 한 번씩은 시동을 걸어달라고 부탁을 한다.
그런데도 120일씩이나 차를 세웠다. 배운 사람들도 아니고, 노동에 대해 아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저 남는 게 없어서 차를 세운 거다. 월 매출이 1000만 원 정도면 기름값이 450만 원이다. 톨게이트비가 50만 원 정도다. 여기에 차량 할부금이 300만 원이 나간다. 오일이나 타이어 정비비 등 고정적인 비용과 수리비도 있다. 내 차처럼 24톤 차면 타이어만 18개다. 수입이 아주 잘 나오면 90만~150만 원 선이었다. 50~60대가 대부분인데 이걸로 어떻게 살겠나."
- 3월에 노조를 만들었다.
"그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10년, 20년 전만 해도 경윳값은 휘발윳값의 반절이었다. 휘발유가 1000원이면 경유는 500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경유가 더 비싸다. 그런데도 운송료가 15년째 그대로라는 게 말이 되나. 우리는 숫자 장난도 많이 당했다. 월 순매출이 1000만 원이라고 치면 10% 인상하면 1100만 원이다. 근데 여기서 다시 10% 내리면 990만 원이 된다. 10% 올렸다 10% 내리면 원상 복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 10만 원이 깎이는 식이다. 어느 순간 우리가 버는 돈이 줄줄이 새고 있었다.
나는 2차 하청 업체 소속이다. 25년 동안 하이트진로에서만 일했다. 매일 새벽 4~5시에 출근한다. 이 일 하는 사람들, 다 순수하다. 일한 만큼 버는 게 최고라고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내가 열심히 일하고 잘 살아서, 우리 자식들도 '아, 열심히 하면 다 잘 살 수 있구나' 하게 되는 것. 근데 그게 안 되기 시작한 거다.
새벽 5시에 나와서 밤 9~10시까지 하루 16시간씩 일해도, 하루에 50만~60만 원 벌어가면 피곤하지 않다. 그게 우리들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하루 버는 돈이 5만 원 정도 밖에 안 되는 날들이 늘었다.
집에 가서 밥이 안 넘어간다. 대출도 갚아야지, 아이들 가르쳐야지… 아내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다. 정말 회사가 어려운 상황이면 가족들에게 양해라도 구할 수 있다. 근데 그것도 아니었다. 하이트진로는 매일 역대급 실적이라며 난리였다. 돈 못 벌어오는데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노조 시작한 거다. 간단하다."
"아파트 1억 가압류 말 되나… 노란봉투법 제정해야"
- 홍천 공장 앞 시위, 청담동 하이트진로 본사 옥상 고공 농성 등 파업이 격렬했다.
"원청이 처음부터 대화에 나섰으면 우리가 그렇게까지 했겠나. 우리들 운송료를 결정하는 건 하이트진로인데, 우리는 하청이고 자기들은 우리와 관계 없는 사람들이라고 당최 나오질 않았다. 그러니 우리 얘기를 좀 들어달라고 몸의 표현을 한 것이다. 다 몸의 저항이었다. 마치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모르는 갓난 아기 울음처럼.
홍천 다리 위에선 정말 아찔했다. 경찰들이 너무 심하게 조여왔다. 오죽 두려웠으면 조합원들이 피하려고 강물에 몸을 던졌겠나. 아직도 가슴이 벌렁거리는 게, 만약 그날보다 하루만 더 일찍 똑같은 상황이 발생했다면 사람들 여럿 죽었을 것이다. 그 전날 비가 엄청 왔으니까. 실제 한 동지는 심폐소생술로 살아났고 두 달 동안이나 호스로 죽을 먹으며 치료를 받았다."
- 파업으로 인해 수십억 원 손배와 아파트 가압류까지 당했다.
"나도 나지만 조합원들이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우리 파업하는 동안 이혼 당한 조합원도 있었다. 돈 앞에 장사 없다. 가족도. 이혼했다고 오는 조합원을 보는 내 속은 어땠겠나."
- 가족들 반응은 어땠나.
"아파트까지 가압류 됐으니 아내도 많이 놀랐을 거다. 사실 표정에선 느껴졌다. 하지만 내게 단 한 마디도 안 했다. 오히려 '당신 구속되면 내가 어떻게 해야 빨리 풀려나요?'라고 묻더라. 정말 고마웠다. 애써 웃으며 '조합원들 맛있는 거 사줘' 했다. 대학생인 아들, 딸도 아빠를 믿어줬다. 자본에게 먼저 설명을 들었다면 나를 불법 파업자로 알았을지 모르지만, 내가 직접 상황을 설명하니 알아주고 응원해줬다. 미안했고. 고마웠다. 파업하는 동안 한 달에 한 번 밖엔 집에 못 들어갔다."
- 국회에 노란봉투법이 계류 중이다.
"하이트진로에서만 25년 일했고 평생을 바쳤는데 하청이라고 자기들 노동자가 아니라고 하면 기분이 어떻겠나. 일할 땐 늘 같이 밥 먹는 식구라 해놓고 하청이 원청에 요구하면 불법이라 한다. 이건 고쳐야 하지 않나.
손해배상도 그렇다. 당시 우리들 파업으로 조금 지연되긴 했을지언정, 나가야 할 술은 모두 나갔다. 실제 이번 파업에도 불구하고 하이트진로 매출이 작년보다 늘었다지 않나. 손해 본 일이 별로 없는데 무슨 손해를 수십억씩이나 봤다는 건지 황당하다. 우리 보고 죽으라는 얘기밖에 안 된다. 노사 합의 이후 손배는 다 철회됐다.
파업하면서 느꼈다. 법은 약자에 치우쳐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높은 사람을 누가 때리려고 하면 주변에서 알아서 나서서 보호해줄 거다. 경찰서장, 비서실장, 측근들이 다 앞장서서 막아주지 않겠나. 근데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떤가. 누가 때리면 그냥 맞는 거다. 권력 있는 자들, 돈 있는 자들은 이미 보호가 돼있지만 우린 아니란 거다. 법이 우리를 보호해야 한다. 노란봉투법 해야 한다."
"하이트진로 파업 가능케 한 연대의 힘… 나도 차 세우겠다"
- 24일부터 화물연대가 총파업에 들어간다.
"나도 동참할 거다. 파업하는 동안 주변에서 '거기 힘들면 딴 데 가서 일하면 되지 뭘 그렇게 싸우고 있냐'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런데 아니다. 노조 하면서 내가 오히려 더 크게 얻은 게 있다.
우리가 우리 힘만으로 120일을 버틸 수 있었을까. 절대 아니다. 회사 눈치 때문에 내놓고 노조 활동은 못하지만, 몰래 힘내라고 꼬깃꼬깃 접은 봉투를 건넨 하이트진로 동료들이 있었다. 차에 다리가 끼었을 때, 이대로 두면 다리 잘린다고 방패로 막아주며 눈짓을 보낸 경찰들이 있었다. 밖에서 싸우고 와 냄새 나고 배고픈 화물 노동자들을 위해 잠잘 곳과 찐 감자를 내주신 목사님이 있었다.
하루 차 세우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는데 기꺼이 전국에서 달려온 화물 동지들이 있었다. 우리보다 더 어려운 노동자들이 있었다. 살면서 처음, 아름다운 삶이란 게 어떤 것인지 그림으로 그려지는 듯했다. 해고된 처지지만 인생을 얻었다. 원래는 노동의 '노'자도 모르고 살았는데.
그래서 나는 또 차를 세우고 연대할 것이다. 힘들지만, 시멘트·컨테이너에 국한된 안전운임제가 당장 우리와 직결된 문제는 아니지만, 그들의 싸움이 결코 나의 삶과 동떨어져있지 않으니까. 그걸 알았으니까. 지난 여름 다른 화물 노동자들이 하이트진로를 위해 그랬던 것처럼, 나도 함께할 것이다."
[관련 기사]
[노란봉투법①] 유최안 "죽음 결심했었다...470억 손배? 더 잃을 것도 없다" http://omn.kr/213uj
"11년차 월급이 150만원"... 강물에 뛰어든 화물 기사들 http://omn.kr/205jw
청담동 한복판 '하이트진로' 옥상 오른 노동자들 "살기 위해 왔다" http://omn.kr/20bty
"하이트진로의 '끔찍한' 손배소, 전세계 화물 노동자 분노" http://omn.kr/20f3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