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와 문화에 따라서는 안락사가 현대판 고려장이 될 수 있다는 우려를 지난 글에서 말했습니다. 말기의 극심한 육체적 고통에서, 정신 질환으로, 중증 치매로, 마치 내리막길 구르듯 안락사란 공이 제어 없이 굴러가게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가장 먼저 법적 안락사를 허용한 나라, 네덜란드에서 2016년, 알코올 중독 및 우울증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가정을 가진 41세 남성이 안락사를 택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자국민과 인접 국가의 반응은 한 마디로 '참담 그 자체'였다고 합니다. 속되게 표현하여 네덜란드가 완전히 미쳤다는 거지요.
네덜란드 안락사법이 마흔한 살의 알코올 중독자를 죽이기 위해 사용되었다면서 정신적 질환을 앓는 사람들에게 네덜란드는 미끄러운 얼음장, 극도로 위험한 곳,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위험한 나라이며, 알코올 중독으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안락사가 아니라 중독을 없애기 위한 지원과 치료라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 <동생이 안락사를 택했습니다> 마르셀 랑어데이크 씀
안락사가 합법화 되면 우리라고 그러지 말란 법이 없겠지요. 지난 시간에 우리나라의 경우 안락사는 '가족이 변수'라고 했습니다만, 안락사 허용 사례를 엄격히 규제해도 결국은 가족이란 변수가 선택의 내리막길을 가속화 시키게 될 것입니다.
2018년부터 시행 중인 연명의료의향서도 본인이 직접 작성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서울대학병원 내과 전문의 허대석 교수의 의학 에세이 <우리의 죽음이 삶이 되려면>에 따르면, 서울대학병원에서 최근 사망한 암 환자 317명 가운데 본인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직접 작성한 경우는 단 1%에 불과하며, 95%는 '가족이 대리 결정'했다고 합니다.
나머지 4%는 의사결정은 본인이 했지만 가족이 대리 서명한 경우입니다. 회복될 수 없는 중병 상태에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결정조차 본인이 내릴 수 없는 현실에서, 안락사가 시행된다면 어떨까요. 가족의 장벽에 겹겹이 둘러싸여 더더욱 본인의 의사는 배제될 확률이 높지 않을까요?
같은 책에는 보라매병원에서 사망한 환자 165명 가운데 심폐소생술 거부서(DNR)를 작성한 사람 중 가족이 없었던 한 명(행려환자)만 본인이었고, 나머지는 배우자(27.3%), 자녀(50.3%), 부모(3%) 등 가족이 작성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시행의 맹점이라고 할까요? 이 또한 가족 중심의 집단문화가 의식의 수면 아래 작용하는 한국적 괴리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구체적 내용은 다음 시간에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이렇게 실상은 본인이 아닌 가족의 결정으로 안락사가 시행되었다고 했을 때 그 결과에서 오는 죄책감과 상실감, 자괴감 등 유족들의 뒤늦은 후회와 혼란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난해 8월 26일, 한국인으로서는 세 번째로 스위스에서 안락사한 고인의 아내는 1년이 지났음에도 남편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남편이 그런 방식으로 가는 바람에 슬픔조차 오롯할 수 없다면서. 제 책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후기에 썼듯이 순리에 따른 죽음의 상처가 한 줄기 아픔을 남긴다면 자연을 거스르는 죽음은 열창처럼 유족의 가슴을 사방 헤집는 것 같습니다.
최선을 다한 본인의 선택이었고 남게 될 가족들을 오히려 위로하며 안락사를 했음에도 유족들의 상처가 쉬 아물지 않고 있는 거지요. 이런 상황에서 명분만 본인의 결정일 뿐, 가족들이 떠밀다시피 가족의 일원을 안락사하게 했다면 당사자들은 물론, 사회적 후폭풍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안락사, 조력사에 관한 논의, 다음 회에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