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가족은 지휘가 6살 때 마을로 이사를 왔어요. 저는 마포 토박이였는데 결혼하고 지휘를 난 후 길음동 아파트로 이사를 갔어요. 친한 친구들이 마포에서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아이들을 보내고 있었지만 저는 그게 유별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길음동에서 지휘는 6살까지 아파트 단지 내 어린이집에 다녔어요. 5세부터 리틀 축구단도 했고 친하게 지내는 가구, 친구 들도 생겼지요. 3살 터울인 다혜도 태어났고요.
그런데 지휘가 7세가 되자 이웃들은 이제 슬슬 학원을 보내야 한다고 이야기했어요. 영어, 수학, 태권도, 수영, 피아노, 미술. 그런데 저는 잘 모르겠더라구요. 그 때 통나무와 저는 처음으로 우리 가족이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삶을 꾸려나 갈지, 우리 아이들이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자라면 좋겠는지 찬찬히 돌아보게 되었어요. 가족, 공동체, 교육, 환경에 대해 생각했어요. 그래서 마을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마을에 초등방과후인 도토리가 없었다면 둘째인 다혜만을 위해 삶의 터전을 옮기기는 쉽지 않았을 거예요. 친구들이 마을에 살고 있고, 아이를 도토리에 보내고 있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지휘가 초등학교를 가도 도토리가 있어 다혜는 공동육아 어린이집에서 첫 기관 생활을 할 수 있으니 괜찮다 싶었습니다. 그렇게 지휘는 도토리 생활을 시작했고 6년을 지내고 이제 졸업을 앞두고 있어요. 사실 모두가 처음인 육아에, 제각각 독립적인 성향인 아이들을 키우는 일에 '꼭 이것이어야만 해'라는 것은 없는 거 같아요. 어디에 있든 따뜻한 애정과 관심만 있다면 아이들은 스스로 쑥 쑥 건강하게 자라는 아름다운 존재들이니까요. 저는 오히려 저에게 울타리가 필요했던 거 같아요. 저는 불안감이 많은 엄마였거든요. 아기가 열이 많이 날 때 해열제를 먹여야 하나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줘야 하나 응급실을 데려가야 하나 전전긍긍하며 아기의 생명, 일상, 미래가 부모의 선택에 많은 부분 달려 있는 것 같은 것이 너무 버겁고 힘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기댈 곳, 같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 나의 생각과 선택을 지지받을 수 있는 곳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도토리마을방과후는 아이들이 아이답게 자라는 곳이에요. 이곳에서 아이들은 몸과 마음이 단단해져 가요. 그런데 어른인 저 또한 이 울타리 안에서 같이 성장하고 단단해져 갔습니다. 저는 도토리 마을방과후에서 아마들과 노는 게 제일 재미있어요. 집도 가깝고 아이들 이야기도 할 수 있고 그래서 소모임도 만들고 같이 놀았어요. 물론 이미 다 커 버린, 내 맘이 네 맘 같지 않은 어른들이니 갈등도 있고 서운함도 있고 섬같이 외로울 때도 있고 공동체 생활이 버거울 때도 있어요. 하지만 신기하지요. 더 이상 새로울 것 없을 것 같은, 어른인 나의 생각과 마음이 바뀌고 자라났어요.
모든 선택에는 기회비용이 있습니다. 어떤 길을 가면 못 가본 길에 대해서는 섣불리 예상할 수 없어요. 때론 아쉬움도 있고요. 그런데 저는 도토리를 보내지 않았다면 할 수 있었을 어떤 경험들이 아쉽거나 생각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지휘 또한 그렇게 이야기하구요.
도토리에서 아이들은 6년 동안 많은 활동과 배움을 가집니다. 모둠 토론, 살림, 인권 교육, 성 교육, 환경 교육, 공동체 교육, 자전거 활동, 연극 활동, 희망나눔 반찬나눔 활동 등 물론 이런 활동들도 값지지만 저는 6년이라는 기간 동안 아이에게 새겨졌을 매일 매일의 시간이 무엇보다 더욱 값지게 여겨져요. 그 시간 동안 수없이 마음에 오고 갔을 어려움, 실망, 슬픔, 갈등, 기쁨, 뿌듯함, 만족, 환희 등 형님, 동생, 선생님, 어른과 맺는 수많은 관계에서 느낀 복잡다단한 감정들은 씨실 날실로 엮여 차곡차곡 아이의 마음에 쌓였을 것입니다. 이 느낌들은 결국 세상을 '같이' 살아가는 데서 겪어야 할 감정들일 텐데 단단하게 엮인 이 그물망은 아이들 마음의 든든한 지지대가 되어줄 거라 생각합니다.
이제는 누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아서 적절히 거리와 관계를 유지해 가는 친구들, 뭔지 항상 회의를 하고 무언가를 같이 도모하고 일을 벌이고 즐겁게 모여 노는 어른들, 아이들에게 진심인, 노는 것도 진심, 이야기하는 것도 진심, 혼내는 것도 진심인 선생님들, 내가 자라는 모습을 옆에서 죽 지켜보는 마을 사람들, 어린 시절 이들에게 받는 진심어린 지지와 응원은 명확한 수치나 데이터로 그 가치를 증명하기는 어려운 것들 입니다.
마을 글쓰기 수업 시간에 난민 수용에 대한 찬반 토론을 했다고 합니다. 아이는 찬성을 했다고 해요. 이유를 물으니 '반대하면 그 사람들은 살 수가 없잖아, 그 사람들도 살아야 되는데...' 라고 대답합니다. 6학년 치고 너무 순진한 대답인가요? 하지만 저는 그 대답이, 그 마음이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소중하다는 것,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생명을 지닌 인간이라는 것을 아이는 알고 있는 것 같았거든요. 이야기를 들은 누군가 '그게 바로 인권 교육이지!'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해주는 어른이 있는 곳, 아이에게 그런 마음이 스며들게 해 준 곳, 선생님들이 계신 곳에 저는 머리 숙여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저는 어린이들과 함께 책 읽는 활동을 합니다. 아이들과 같이 읽을 책을 고를 때 저는 아직 어린 아이들에게 현실의 어려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책을 고르지 않습니다. 건강한 사람들과 밝은 세상이 그려진 책을 고릅니다. 왜냐하면 어린 아이들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고, 사람들은 믿을 만하며 진실과 착한 마음은 힘이 있다는 것을 먼저 알았으면 좋겠기 때문입니다. 아니, 아이들은 이미 그런 믿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의 마음 덕에 저는 처음으로 좋은 어른,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아이들이 지닌 힘입니다. 저는 아이들이 지닌 그 힘과 믿음이 오래 지속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느 시기가 되면 아이들은 험난한 세상을 마주하겠지요. 그 세상은 책에서 나오는 정의로운 세상, 든든한 울타리 안의 세계와는 사뭇 다를 테지요. 하지만 세상에 대한, 사람에 대한 신뢰가 마음에 가득 차 있는 아이들은 설령 미처 그렇지 못한 어렵고 불편한 세상을 만난다 하더라도 힘차게 헤치고 나아 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런 마음의 든든함을 주는 곳,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인 나도 끊임없이 성장하고 살아 있는 존재임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 저에게는 마을과 도토리 마을방과후입니다. 어른이든, 어린이든 우리 모두는 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완성이 어디일까요? 끝이 있을까요? 좋은 사람이 되어 가는 긴 여정에 우리는 모두 함께 있고 그래서 저는 든든하고 감사합니다.
글_노은정(별명:아침)
어린이와 어린이책(그림책, 동화, 말놀이 등)에 관한 글을 쓰고 활동, 워크숍, 강의를 합니다. 마을 울타리 안에서, 도토리 마을방과후 품 안에서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아마'('아빠+엄마'의 합성어)'입니다. 덧붙이는 글 | * 기사는 영화 속에 출연한 도토리 마을방과후 선생님들이 쓰고 엮은 책, <아이들 나라의 어른들 세계>에 실린 글 중 일부입니다.
* 마포구 성산동에 자리한 '도토리 마을 방과후'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다큐멘터리 <나는 마을방과후 교사입니다>는 1월 12일 극장 개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