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국교 정상화는 이승만 정권 이래 양국의 현안이기도 했다.
두 나라간의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은 51년부터 시작되었지만 10여 년에 걸친 교섭에서도 일본측의 고자세로 타결점을 찾지 못한 상태였다. 자유당 정부에 이어 4월혁명으로 집권한 민주당 정부도 한일회담을 추진하여, 60년 10월 25일 제5차 한일회담이 열렸으나 이후 5·16쿠데타로 중단되고 말았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미국의 원조가 대폭삭감된 상황에서 무엇보다 5개년 경제개발계획에 따른 대규모 투자재원의 확보가 필요했다. 여기에 미국의 지역통합전략, 일본의 자본 해외진출 욕구 등이 맞아떨어져 한일회담이 적극적으로 추진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이밖에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박정희를 비롯한 군사정권 핵심요인들의 심정적인 친일성향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이 일본육사와 만주군관학교 출신들로서 일본에 대해 다분히 애정과 향수를 갖고 있었다.
이런 요인들로 인해 61년 10월 20일 제6차 한일회담이 재개되었는데, 합의사항을 둘러싸고 한일 양국의 이견과 양국 내의 격렬한 반대분위기로 타결이 늦어지고 있었다. 이에 정부는 비밀리에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특사로 파견, 이케다 수상과 비밀회담을 갖고 타결조건에 대한 이면 합의를 이루도록 했다. 그러나 한국의 거듭된 양보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여전히 고자세의 버티기 전략으로 맞섰다.
박정희 정권에 있어서 62년은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첫해로서 시급한 자본도입이 요구되었고, 충분한 검토과정없이 감행한 화폐개혁의 실패로 경제상황이 매우 불안정한 관계여서 한일회담의 조기타결을 서둘렀다.
그래서 김종필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김종필·오히라(大平) 회담을 열고 여기서 비밀메모(김·오히라 메모)를 통해 대일청구권문제 등에서 우리에게 크게 불리한 합의를 해주었다. 이에 따라 청구권 협상의 타결로 무상 3억 달러를 10년간에 걸쳐 지불하고, 경제협력의 명목으로 정부간의 차관 2억 달러를 연리 35%로 제공하며, 상업 베이스에 의한 무역차관 1억 달러를 제공하기로 약정하였다.
이때 대일청구권이라는 용어도 사용하지 못하고 일본이 '독립축하금'이란 이름으로 무상 3억 달러에 일제 36년 식민통치에 따른 모든 배상문제를 마무리하기에 이른 것이다. 특히 독도를 폭파해서 분쟁의 요인을 없애자는 등 그야말로 굴욕적인 협상이 이면에 깔렸다.
그는 박정희의 굴욕적인 한일국교정상화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소속한 자민당과 제1야당인 민정당도 반대하고 대학가는 물론 대다수 국민이 반대했다. 서민호는 자신이 겪었던 일본의 본질과 현재 동북아정세 그리고 박정희 정권이 서둘러 체결하고자 하는 배경 등을 몇 차례 걸쳐 비판했다. 그리고 학생들의 요청으로 강연을 통해 반대하는 이유를 피력했다.
과거부터 일본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서 단언하노니 이와 같은 조건하에서 한일회담이 체결된다면 3~4년 안으로 한국의 어시장은 일본의 어시장이 되고 10년 내외에 우리는 그들의 소비시장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제2의 을사조약이 될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일본은 지금 생산과잉상태에서 해외시장을 개척하기 위하여 공산국가들과의 통상확대를 추진중에 있으며 한국과의 국교정상화 후에는 북괴측과 국교를 맺으려고 획책할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은 재일교포들을 강제로 북송시켜 우리 한국을 배반한지 이미 오래된 일이다. 차라리 지금이야 말로 힘의 외교를 뒷받침 하기 위하여 평은 이럴 때 쓰는 것이지 쿠데타를 일으킬 때만 쓰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저자세를 버리고 강력한 외교를 추진한다면 그들이 오히려 저자세가 되어 굴복할 것은 틀림없다. 그러한 힘을 뒷받침 하기 위하여 우리들은 10만 영새어민들의 궐기를 촉구하면서 평화선을 양보하는 따위의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데모를 일으켜야 될 것이다. (주석 1)
서민호는 여타 정치인들처럼 목소리만 높혀 한일국교정상화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일제의 죄악상을 적시하면서 대안을 제시하였다.
일본이 우리를 수탈하고 우리 민족을 학살한 사례는 일일이 예시할 겨를이 없다. 그러나 기미독립운동 때에만 6천6백여 명이 현장에서 피살되고 1만4천여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의병봉기 때 4만여 명, 경신(庚申) 만주대학살 때 3만8천 여명, 동경대지진재 때 6천여 명이 학살 당하고 만주국 건립 후 8.15 해방까지 만주에서 2만여 명이 학살당한 사실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밖에도 일본은 전쟁당시에 징병, 학병·지원병들을 제외하고서도 징용으로 끌고 간 10여만 동포들을 희생시키고 정신대란 명목으로 8천5백여 명의 부녀자를 끌고 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했던 것이다. 더욱이 국내국외에서 처형을 당한 순국선열들의 희생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며 광복군이 대일선전포고를 했으니 마땅히 우리는 전승국으로서 일본 전쟁범들을 우리의 손으로 처형하고 정정당당하게 배상금을 청구할 권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비롯 유항(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전승국 취급을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희생당한 동포와 착취당한 댓가로 상환을 받아야 될 부채는 최소한 15억불은 받아 내야 하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속죄하는 뜻에서라도 공식기구를 통하여 사과를 하고 다시는 침략을 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표시해야 될 것이며 독립 축하금이니 뭐니 하면서 생색을 내는 것 보다는 차라리 속죄 겸 피해보상을 하는 의미에서 적어도 10년간은 우리나라의 생산품을 사들여 한국의 경제부흥에 이바지하겠다는 성의표시가 있어야 될 것으로 나는 믿는다. (주석 2)
주석
1> 서민호, <한일회담과 나의 의견>, <이래서야 되겠는가>, 121쪽, 환문사, 1970.
2> <한일회담과 우리가 취할 자세>, 앞의 책, 116~117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월파 서민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