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국회에서 군소정당에 속했지만 의정활동은 거대정당 어느 누구 못지않은 활기찬 모습이었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의 순도는 당대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국회의 정책질의는 비판과 함께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그가 단상에 오르면 여야의원은 물론 국무위원들과 기자단, 정보기관이 긴장했다.
서민호의 반 박정희 투쟁은 거칠 것이 없었다.
박정희가 굴욕적인 회담을 강행하자 정치생명을 내걸고 싸웠다. 제6대 국회의원 시절인 1964년 가을 정기국회에서 〈대통령을 탄핵한다〉는 제목 아래 박정희의 퇴진을 촉구하는 대정부 정책질의를 폈다.
"헌정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재와 부패, 부정과 불의가 난무하고 있는 가운데 매국적인 외교로 국가의 기강이 흔들리고 있는 오늘의 사태를 더 묵과할 수가 없어 현정권의 최고 책임자이며 행정부의 수반인 박정희씨의 대통령하야 권고결의안을 제출하게 된 것을 슬프게 생각한다."고 전제하고 몇 가지 이유를 들었다.(요지)
△ 반공을 국시(國是)로 삼고 민생고를 해결하여 국토 통일을 이룩하겠노라는 미명의 슬로간으로써 합헌정부를 도괴시키고 정권을 탈취한 그날로부터 국민의 각계 각층의 열화같은 비준 반대를 무릅쓰고 정권연장에 혈안이 되어 망국의 역사를 창조하려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한 박정희씨의 위헌행위는 급기야 민생을 아사 직전에 몰아넣었고 국권을 송두리째 팔아넘기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 과연 박정희씨가 이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국가기관의 최고책임자로서 자격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소위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불투명한 정치이념을 내걸고 여순반란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언도받은 전력을 지닌 자신을 필두로 하여 과거 용공분자의 혐의를 지닌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이 나라 국정을 요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반공국가라는 우리 민족의 입장으로서 중요한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중앙정보부의 운영예산으로써 현역군인들이 증권회사를 설립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농협이 소유하고 있는 한국전력주식회사를 갖은 공갈과 협박으로써 인출하고 증권거래소와 금융통화위원회까지 협박, 공갈하여 자금을 인출함으로써 5천3백40여 명에 달하는 선의의 투자자들에게 357억이라는 막대한 재산 피해를 줌으로써 패가망신을 시키고 심지어는 자살까지 하는 비극을 연출하였던 것입니다.
△ 헌정 20년을 통하여 국가 정책에 대한 반대 여론과 투쟁이 오늘날만큼 극심한 적도 일찍이 없었습니다. 학생과 교수를 비롯하여 종교인, 언론인, 심지어는 생활고에 허덕이는 영세 소시민에 이르기까지 그 잔인무도한 탄압과 폭압을 무릅쓰고 굴욕외교 비준 반대를 외치고 있는 이 긴박한 사태에서 더욱이 야당의원들의 총사퇴마져 도외시하면서 강행하고 있는 한일외교는 민족반역 행위요,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행위라 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누구를 위한 정치이며 누구를 위한 외교입니까?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치가 박정희씨를 위하여, 박정희씨에 의해서 박정희씨의 자의대로 시행되는 이 정치 현실은 정치적, 비판의 대상을 초월한 망국의 지경으로 변하고 만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실에 대한 책임과 원인이 박정희씨의 고의에 의한 결과이건 무능의 소치이건 간에 일국의 국정이 개인의 정치학 실습장소가 아니고 정치의 수련도장이 아니라면 냉엄한 심판과 역사적 책임은 결코 면할 수 없을 줄 압니다.
이제 본 의원은 박정희씨에 대한 개인적인 위헌행위와 실정을 말씀드렸습니다 마는 이와 같은 일련의 사실은 결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요 현역정치인인 의원여러분을 비롯하여 국민 각자가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상세한 증거는 증언을 통하여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주석 3)
박정희 정권에서 서민호는 언제나 '태풍의 눈'이었다. 야권 일각이 중앙정보부의 공작에 말려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의 이른바 '사쿠라'가 판치는 정치판에서 그는 남달랐다. 한일굴욕회담과 베트남 파병을 둘러싸고 서민호는 선명한 반대투쟁의 맹장이었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강직한 성품으로 비록 군소정당이나 무소속의 소수파 신분이었으나, 그의 발언과 투쟁은 정부여당을 긴장시키고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며 무기력한 야당을 분발시켰다.
이승만에 이어 박정희와 격렬하게 대척점에 서게 되면서 정치자금의 파이프라인이 동결되고, 그로 인해 큰 조직을 이끌 수 없었다. 해서 독립운동과 반독재 투쟁의 화려한 경력과,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과 언변 등 정치인으로서 모든 조건을 갖추고도 야당의 '실력자'가 되지 못한 것은 그 개인은 물론 한국정치의 큰 손실이었다.
헌정 80년이 되어가는 한국정치사에서 자신의 정치철학을 갖고 정치활동을 한 정치인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4, 5선 이상의 다선 의원 출신도 적지 않았지만, 대부분이 헌정사에 남을 그리고 국정의 민주화와 국민복지, 민족통일에 대한 경륜과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사라졌다.
주석
3> 서민호, <이래서 되겠는가>, 166~172쪽.(발췌)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월파 서민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