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압적인 방법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민주주의 방식보다 변칙의 수법을 선호했다. 죽을 때까지 달라지지 않았다. 4월혁명이라는 위대한 민주주의 가치를 쟁취한 한국은 다시 억압통치의 압제자를 만나게 되고 정치적 시련기를 겪어야 했다. 국난기마다 가장 먼저 금기를 맨 것은 학생들이다.
굴욕회담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는 전국으로 번져나가고 65년 5월 20일 서울시내의 대학생연합으로 박정권이 표방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거행하고, 4·19민족·민주이념에 정면 도전한 군사쿠데타 정권의 타도투쟁을 선언했다. 이날 시위는 경찰의 난폭한 진압으로 학생 1백여 명이 부상당하고 2백여 명이 연행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굴하지 않고 단식 투쟁과 연좌농성 등을 벌이면서 투쟁을 계속하여 6월 3일에 이르러 1만여 명의 시위대가 광화문까지 진출, 일부 파출소가 방화되기에 이르렀으며, 군사쿠데타, 부정부패, 정보정치, 매판독점자본, 외세의존 등 박정희 정권의 본질적인 문제제기로 확대ㆍ고조되어 정권퇴진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학생들의 데모에 많은 시민이 가담하면서 시위의 규모가 커지자 정부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어, 그날 밤 8시를 기해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대대적인 탄압을 개시했다. 계엄사령부는 포고령으로 일체의 시위금지와 언론·출판의 사전검열, 모든 학교의 휴교를 명령했다.
박정희 정부는 4개사단 병력을 서울시내에 투입하여 3개월 동안 계속 계엄통치를 실시했다. 7월 29일 계엄령이 해제되기까지 학생 168명, 민간인 173명, 언론인 7명을 구속하고, 이 기간 포고령 위반으로 890건에 1,120명을 검거하였으며, 그중에서 540명이 군사재판, 68명이 민간재판, 216명이 즉결심판에 회부되었다. 정부는 굴욕회담을 비판하는 시민·학생들을 폭압적으로 탄압했다.
정부에서는 계엄이 선포된 지 이틀 후인 6월 5일 공화당의장 김종필을 문책, 당의장직에서 사임시키고 두 번째 외유에 나서도록 조처했다. 박정희의 지침에 따라 움직인 김종필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정부는 야당과 학생들의 격렬한 반대투쟁을 위수령·계엄령으로 억압하면서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한국 외무장관 이동원, 한일회담 수석대표 김동조와 일본외상 시이나, 수석대표 다카스키 사이에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기본조약)과 부속된 4개의 협정 및 25개의 부속문서로 된 '한일협정'을 일괄 타결했다.
이 협정에 의해 평화선이 철폐되었으며, 우리측의 40해리 전관수역 주장이 철회되고 일본의 주장대로 12해리 전관수역이 설정되었다. 이 역시 국가이익이 크게 손상되는 내용이었다.
또한 재일교포의 법적지위 및 영주권문제 등이 일본정부의 임의적 처분에 맡겨지게 되었고,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은 일제가 불법으로 강탈해간 모든 한국문화재를 일본의 소유물로 인정해버리고, 여성위안부·사할린교포·원폭피해자 등의 문제는 거론조차 하지 못한 채 그야말로 졸속·굴욕회담으로 끝나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이고 졸속적인 한일국교정상화 추진은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와 각종 침략조약의 원천무효, 그리고 정당한 배상도 받지 못하였다. 일본은 태평양전쟁 기간 3~4년 동안 지배한 동남아 각국에도 5~10억 달러의 배상금을 주었다. 이에 비하면 한국은 턱없이 부족한, 그마져 배상금이 아닌 '독립축하금' 명목으로 받았다. 그 이면은 여전히 베일에 쌓여 있다. 지금 일본이 독도를 자국의 영토라고 우기고, 성노예(위안부) 문제, 한국인 강제노동자 임금체불 문제 등에서 억지를 부리면서 65년 한일회담에서 모두 해결됐다고 잡아떼는 것은, 잘못된 한일회담이 남긴 업보이기도 한다.
박정희 정권은 한일국교 정상화와 베트남파병 등을 단행하면서 미국·일본과의 우호협력 관계를 돈독히 하는 한편,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워 권력의 기반을 강화시켜나갔다.
반면에 야당은 시국관의 차이와 고질적인 파쟁으로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65년 6월 14일 원내 제1야당인 민정당과 제2야당인 민주당이 통합하여 제3공화국 출범 후 최초의 통합야당으로 출범했다. 민중당의 초대 대표최고위원은 박순천이었다.
그러나 민중당은 65년 8월 한일협정 비준안과 베트남 파병안을 둘러싸고 당론이 양분되어, 의원직 사퇴와 당 해산을 주장하는 강경파가 결별, 66년 3월 30일 신한당을 창당함으로써 통합 5개월 만에 다시 분당되었다.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서민호는 윤보선·김도연·정일형·김재광 등 소신파 의원들과 6월 22일 한일 기본조약이 체결되고 8월 14일 공화당 단독으로 이 조약이 국회에서 비준되자 이에 반발하여 의원직을 사퇴하고 민중당을 탈당하였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월파 서민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