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자주독립 정신을 계승하고 독립운동의 의의를 선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순수 민간단체 '시민모임 독립'은 일본 근대의 뿌리를 살펴보기 위해 1월 13일부터 17일까지 규슈(九州) 지역을 다녀왔다. 규슈는 일본 열도 서쪽에 자리한 섬으로, 지리적으로 한반도와 가까워서 우리와 역사적 인연이 깊은 곳이다. 아울러 일본 근대화의 초석을 다진 메이지(明治) 유신의 발생지이기도 하다. 이글은 이번 여정에 동행한 기자가 규슈지역 여러 곳을 돌아보고 느낀 점을 정리한 것으로, 이후 몇 차례에 걸쳐 탐방기를 소개할 예정이다. [편집자말] |
가고시마(鹿児島)는 일본 열도 최남단에 있는 현으로, 옛 이름은 사쓰마(薩摩)다. 2천 년 전, 권력 싸움에서 밀린 가야국 왕자가 고향을 떠나 이곳에 정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화산지대가 많고 온천이 유명하다. 바다와 산이 어우러지는 풍광이 그림처럼 멋진 장면을 연출하는 곳이 많지만, 과거 조슈번(야마구치현)과 함께 에도 막부를 무너뜨린 용맹한 무사들이 살던 본거지였다.
에도 말기, 270개가 넘는 번(藩) 가운데 유독 두 지역이 유신의 핵으로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본래 규슈 지역의 번주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추종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가장 많은 병력을 차출한 곳도 이곳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권력을 잡아 어쩔 수 없이 충성을 맹세했지만, 에도 막부에 좋은 감정을 지니고 있을 리가 없었다. 사쓰마의 사무라이들에게 막부 타도는 시대적 소명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일본 열도 서쪽에 자리한 지리적 환경도 영향을 끼쳤다. 한반도와 가까워 오래전부터 대륙과의 교류가 왕성했고 서양문명을 먼저 접할 기회가 많았다. 국외여행을 법으로 금지하던 시절에 사쓰마 출신 15명, 조슈 출신 5명이 신문물을 배우고자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간 것(최종 목적지는 영국이었다)을 보면, 이곳이 세상의 흐름과 변화에 민감하고 개방적인 문화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우리와는 불편한 악연(惡緣)으로 얽힌 곳이기도 하다. 정유재란(1597년) 당시 칠천량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궤멸시킨 장수가 이곳 번주였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다. 히데요시가 죽고 퇴각하는 일본군과 이를 막아선 조명 연합군이 남해에서 맞붙었을 때, 요시히로의 조총부대가 쏜 총에 맞아 이순신 장군이 운명한다.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노량해전(1598년)이다.
철군할 때, 팔십 명이 넘는 조선 도공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들이 고향을 떠나와 여기 정착해서 만든 도자기가 일본 최고의 명품 백자로 평가받는 사쓰마 야키(燒)다. 전북 남원에서 잡혀간 도공 심당길(沈當吉)의 후예들이 지금까지 이곳에서 대를 이어 도자기를 굽고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도자기 브랜드를 납치된 전쟁포로의 후손들이 만들었다니. 서글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조슈가 일본 육군의 뿌리라면, 해군의 뿌리는 사쓰마라 할 만큼 이 지역은 오래전부터 바다와 친밀했다. 일본 해군의 기초를 닦은 곳이 지금의 가고시마다. 러일전쟁 때 일본군 함대 사령관으로 당시 세계 최강이라는 러시아 발틱 함대를 상대해 연전연승한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 태평양 전쟁 당시 가미카제(神風) 특공대를 조직한 해군 소장 아리마 마사후미(有馬正文)가 이곳 출신이다.
러일전쟁의 분수령이 된 쓰시마 해전(1905년) 일화는 유명하다. 많은 이들이 러시아의 승리를 예견했지만, 헤이하치로는 이 전투에서 한 척의 배도 잃지 않고 대승을 거두었다. 그가 이 싸움에서 러시아군을 상대로 펼친 전술이 학익진(鶴翼陣)과 비슷하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1592년)에서 썼던 그 진법이다. 삼백여 년 전, 자기 조상들을 바다에 수장시킨 기억을 끄집어내 재활용한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하나.
곳곳에 남은 메이지 시대의 흔적
유신의 심장이라는 별칭답게, 가고시마 곳곳에는 메이지 시대의 흔적이 짙게 배어 있다. 가고시마 유신의 역사가 기록된 후루사토관(ふるさと館)을 찾았다. 후루사토는 고향이라는 뜻이다. 박물관 입구에 네 명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유신 3걸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와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이들을 도와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고마쓰 다케와키(小松清廉), 사쓰마번의 11대 번주였던 시마즈 나리야키라(島津齊彬)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영웅 가운데 한 명이다.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뛰어난 리더였지만, 조선 정벌을 둘러싸고 메이지 정부와 대립해 직을 내려놓고 귀향했다. 얼마 후, 고향인 이곳에서 봉기했고 정부군과 일대 결전(1877년, 세이난 전쟁)을 벌였으나 패배해 할복자살한 비운의 인물이다. 할리우드 배우 톰 크루즈가 출연한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2004년)'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다카모리는 요시다 쇼인과 함께 대표적인 정한론자(征韓論者)다. 메이지 유신 후 사무라이의 사회적 몰락이 임박하자 이를 해소할 방안으로 조선을 침범해 근대화시키고 조선과 일본이 연대해 서양에 맞서야 한다는 아시아주의를 주창했다. 당시 사쓰마는 무사 계급이 총인구의 20%에 이를 만큼 다른 번(藩)에 비해 사무라이 수가 많았다. 이들을 먹여 살리려면 특별한 대책이 필요했을 것이다. 다카모리가 강하게 조선 정벌을 주장한 배경이다.
죽마고우이자 혁명동지인 오쿠보 도시미치가 국가의 미래를 위해 사무라이를 밟고 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버릴 수 없다며 그와 결별한다. 그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고 있었지만, 무사도(武士道)가 유달리 강한 사쓰마의 무사들이 명분 있게 죽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든 거라는 해석도 있다. 이 전쟁을 끝으로 왕정복고를 둘러싼 내분이 마무리되면서 메이지 정부는 안정을 되찾는다.
후루사토관 내 기념품을 파는 매장에 다카모리의 형상을 넣은 상품들이 즐비하다. 비극적 삶을 살다간 영웅의 이미지만큼 좋은 관광상품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는 감히 천황에게 칼을 겨눈 역적이었음에도, 일본 헌법 반포(1889년) 때 사면됐다. 일본인에게 사이고 다카모리는 의리를 지키기 위해 산화한 인물일지 모르지만, 우리에겐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위해 이웃 나라를 정벌하려 했던 침략자일 따름이다.
후루사토관 근처에 가지야(加治屋) 마을이라는 동네가 있다. 다카모리가 태어난 곳이다. 바로 길 건너편이 고라이(高麗) 마을이다. 고려는 조선은 뜻한다. 정유재란 때 끌려온 조선인 도공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던 곳이다. 마을 곳곳에 조선인의 숨결이 남아 있어서 고려떡을 판매하는 가게가 여전히 성업 중이다. 이곳은 도시미치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에게 조선인의 피가 흐른다는 말인가.
두 마을 사이에 갑돌천(甲突川)이라는 작은 하천이 흐른다. 다카모리와 도시미치는 이 냇가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을 것이다. 하천 중간에 다리가 있는데, 이름이 고라이바시, 고려교(高麗橋)다. 원래 있던 다리는 홍수로 유실되고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마을이 마주 보고 있다. 한쪽은 일본인이 살던 마을, 다른 쪽은 조선인 집성촌. 한국과 일본의 엉킨 역사를 상징하는 것 같다.
후루사토관에서 차로 15분 정도 가면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기계공장이 보전된 장소가 있다. 사쓰마 번주였던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건립한 상고집성관(尙古集成館)이 그곳이다. 메이지 시대 산업 근대화를 상징하는 장소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배와 대포 등 당시 만들었던 철제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탐방단이 갔을 때는 공사 중이어서 전시물을 볼 수 없었다.)
사쓰마는 임진왜란 훨씬 이전부터 흔히 조총(鳥銃)이라 부르는 일본 최초의 서양식 화승총을 대량 생산할 만큼 신무기 개발에 앞장선 곳이다. 집성관 앞뜰에 철제 무기를 생산하기 위해 설치한 반사로(용광로) 터가 남아 있다. 아편전쟁 때 중국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것에 충격을 받은 번주가 서양 열강이 쳐들어올 것을 대비해 제철소와 조선소를 비롯해 서양식 공업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이 왜의 침략에 대비해 거북선을 건조한 것과 비견된다고 할까. 다카모리와 도시미치 등 젊은 사무라이들을 발탁해 중용한 사람이 나리아키라다. 조선의 22대 국왕이었던 정조(正祖) 임금이 떠오른다. 탕평(蕩平)으로 인재를 두루 기용하고 구습에서 벗어나려 애쓴 개혁 군주.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을 장려하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임에 주저함이 없었던 인물. 그가 한 세기 뒤에 세상에 나왔다면 조선의 운명이 바뀌었을까.
정조가 탄생한 해(1752년)로부터 정확히 백 년 후에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高宗)이 태어난다. 메이지 시대 훨씬 이전부터 지방정부가 직접 대포를 만들고 서양 배를 연구하는 등 외세의 침략에 대비해 강병(强兵)을 추구할 때, 조선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현명한 군주와 사명감 넘치는 신하들이 조정을 이끌었다면 이 땅의 근대사는 다른 궤적을 그리지 않았을까. 하지만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다.
인류의 근대는 원양 항해의 기술발달에 힘입은 대항해시대였고, 문명과 문명의 접촉은 폭력적인 형태로 이루어졌다. 앞선 문명을 이룬 자들이 자신들이 경제적 이익을 위해 다른 문명을 억압하고 그 자리에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려 한, 야만의 시대였다. 일본은 서구 열강으로부터 이 기술을 배웠고 조선과 동아시아에 거대한 식민지를 건설하려 했다. 조선은 이 세계사적 흐름을 읽지 못했다.
가고시마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시로야마(城山) 공원 전망대에 올랐다. 바다 건너편 섬 사쿠라지마(桜島)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섬 중앙에 화산이 있어 연간 700회 이상 용암이 뿜어져 나온다고 한다. 화산섬 특유의 자연생태계를 지닌 곳이어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무척 평화로워 보이지만, 봉우리 아래에서는 용암이 끓고 있을 것이다. 저 섬의 모습이 한반도 주변 환경과 닮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