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태국을 떠나 석양과 함께 만난 루앙프라방이지만, 루앙프라방에서도 새벽을 만날 일이 있었습니다. 루앙프라방의 탁발 행렬을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라오스는 여전히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라오스 인민혁명당이 집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표면상 사회주의 국가죠. 하지만 라오스 국민의 대부분은 또 여전히 상좌부 불교 신자입니다. 사회주의 정부 수립 이전에는 아예 불교가 국교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사회주의 정부 수립 이후에도 국민 생활의 저변에 뿌리깊었던 불교를 탄압하지는 못했습니다.
특히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루앙프라방에서는 여전히 새벽이면 스님들의 탁발 행렬이 이어집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상업화되고 탁발 행렬에 관광객들이 몰려들기도 하죠. 하지만 여전히 루앙프라방의 골목 곳곳은 새벽동이 트기도 전에 스님들에게 줄 음식을 준비해 나오는 현지인들의 걸음으로 북적입니다.
조용한 새벽, 숙소에서 나왔습니다. 새벽에는 아직 한기가 돕니다. 골목 곳곳에서 사람들과 음식을 나누는 스님들의 모습이 눈에 띕니다. 이곳에 역사 속에 묻힌 고도(古都)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는 풍경입니다.
왕국은 이제 사라지고 없지만
라오스인들이 동남아시아에 들어온 것은 태국인들과 유사한 시기로 추정됩니다.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1253년 중국 운남성에 자리를 잡고 있던 왕국인 대리국이 멸망하면서 동남아시아로 넘어온 것이지요. 이때 넘어온 이들 가운데 저지대에 정착한 이들은 지금의 태국인이 되었고, 고원에 들어선 이들은 지금의 라오스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원래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크메르인이나 버마인 등과 경쟁하고 협력하며 세력을 키워나가던 라오스인들은, 1353년 처음으로 독립을 선언합니다. 그렇게 세워진 왕조가 란 쌍 왕국입니다. 란 쌍 왕국의 수도가 루앙프라방이었죠.
루앙프라방을 중심으로 한 란 쌍 왕국은 주변국과 때로 분쟁하고 때로 협력했습니다. 버마의 침략에 한동안 속국이 되기도 하고 수도를 비엔티안으로 옮겼지만, 이후 17세기까지 번영을 누리기도 했죠. 라오스는 지금까지도 동남아시아 유일의 내륙국이지만, 서양인 선교사들과도 이 시기 접촉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라오스의 전성기를 이끈 왕, 수리냐 봉사(Sourigna Vongsa)가 사망한 뒤 라오스는 계승 분쟁에 시달렸습니다. 동남아시아의 정치적인 구조도, 내륙국이라는 특성도 정치적인 규합을 어렵게 만들었죠. 중앙집권적인 농업 생산이 어려웠다는 지리적 특징도 이 분열의 한 원인이었습니다.
라오스는 북부의 루앙프라방 왕국, 중부의 비엔티안 왕국, 남부의 참파삭 왕국으로 분열되었습니다. 분열하며 약화된 라오스는 주변국의 침략에 취약해졌습니다. 특히 태국에서 차크리 왕조가 세워지면서 태국의 간섭은 더해졌습니다. 라오스인에 대한 탄압도 벌어졌죠. 비엔티안 왕국 아누웡(Anouvong) 왕의 아들이 강제노역에 차출되어 폭행당하는 사건까지 있었습니다.
결국 1826년 아누웡 왕을 중심으로 비엔티안 왕국과 참파삭 왕국에서는 태국을 향한 반란이 벌어졌습니다. 라오스에서는 대규모의 군대를 꾸렸죠. 하지만 이미 태국은 영국과 조약을 체결했고, 서양의 발달된 무기체계를 대량으로 수입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누웡은 패배했고, 비엔티안은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후일 서양인 탐험가들은 정글 속에서 비엔티안이라는 도시가 있었던 흔적만을 발견했을 정도였습니다.
결국 이제 남아있는 라오스 왕조는 루앙프라방 왕국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라오스인에 대한 위협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루앙프라방 왕국 역시 안전할 수는 없었습니다. 당시 서양인들은 태국인이 라오스인에 대해 노예사냥을 벌이고 있다고 기록했고, 실제로 많은 라오스인들이 태국인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1880년 태국에서 노예사냥은 법적으로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채무에 의한 노예화는 계속해서 인정되었죠. 같은 시기 프랑스도 라오스를 주목했습니다. 사이공을 차지한 프랑스는 메콩강을 거슬러 올라가 중국에 닿고자 했고, 자연스레 메콩강 상류를 끼고 있는 라오스를 탐낸 것입니다.
프랑스는 메콩강 동안의 라오스를 차지하기 위해, 태국인의 라오스인 노예 사냥을 막아세웠습니다. 결국 1893년 태국과 프랑스가 전쟁을 벌였고, 프랑스는 라오스 지역을 차지하는 데 성공합니다.
1898년 라오스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병합되었고, 라오스인에 대한 노예 사냥은 그제서야 완전히 금지됩니다. 한때 아프리카와 신대륙에서 노예 사냥을 벌이던 서양인들이 아시아의 노예 사냥을 기록하고, 식민주의로 인해 노예제가 폐지되는 역설적인 일이 이 땅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프랑스령 라오스 아래에서 루앙프라방의 왕은 형식적으로 라오스의 국왕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프랑스는 완전히 파괴된 도시 비엔티안을 재건해 수도를 이전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국왕은 여전히 루앙프라방에 거주했죠. 1975년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며 왕이 폐위되기 전까지, 루앙프라방은 국왕이 거주하는 고도의 역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루앙프라방의 새벽에는 주황색 승복을 입은 스님들과, 스님들에게 줄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경건한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왕국은 이제 사라지고 없지만, 이 탁발의 전통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더 낮은 사람들에게 나누겠다는 마음
탁발이 끝나고 어느새 동이 튼 새벽, 저는 고요한 절의 뒷마당에 앉아 있었습니다. 루앙프라방의 역사는 많은 점에서 역설적입니다. 식민주의가 파괴를 멈추기도 했고, 굴종이 생존을 보장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평가하려는 욕구를 가진 후대인에게는 판단하기 어렵게 느껴지는 역사이기도 합니다.
어디선가 받은 음식을 먹으며 떠드는 듯한 어린 스님들의 소리가 들려 옵니다. 무엇 하나 분명히 말할 수 없는 역사 위에서도, 더 낮은 사람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겠다는 마음만은 이어졌습니다. 추운 새벽 따뜻한 밥을 나누는 일만큼은 의례처럼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역사도, 정치도, 아무 관계 없는 듯이 말이지요.
역사를 공부하고 정치를 말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저는 그 사실에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았습니다. 역사나 정치와는 아무 관계 없이 서로와 마음을 나누는 일은 계속해서 이어졌다는 사실. 한참을 끊어지고 단절된 시대 뒤에서도, 여전히 골목 시장의 사람들은 새벽 거리에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
어느새 동은 트고, 주위는 밝아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또 다시 늘 같은 루앙프라방의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