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0월 29일 토요일 오후 6시 34분 경찰에 첫 신고가 들어왔다. "압사당할 거 같다." 공권력이 제대로 대응만 했다면 159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이태원 참사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 경찰을, 사업가를, 음악가를, 간호사를, 배우를 꿈꿨던 159명의 바람은 이뤄졌을지 모른다. <오마이뉴스>는 이태원 참사 100일을 맞아 매주 토요일 오후 6시 34분 이태원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태원 참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편집자말]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이남훈씨 가족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이남훈씨 가족 ⓒ 이희훈
 
아들의 장례를 치르고 삼우제를 마친 엄마는 아들이 2022년 10월 29일 오후 5시, 이태원으로 출발하기 직전 벗어놓고 간 작업복을 그제야 빨아서 갰다. 아들의 방에 단정히 놓아두고 문을 닫았다. 방문은 석 달이 지나 지금까지도 열리지 않았다. 

"머리로는 아는데 가슴으로 이해가 안 돼. 아들 방을 열어보는 순간 정말 아들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 같으니까. 그 방을 열어보는 순간 아들 체취가 다 날아갈 것만 같고..."
 
▲ 떠난지 100일 지나도 열어보지 못하는 아들의 방
ⓒ 이희훈

관련영상보기

 
엄마는 방문을 여는 대신 밖으로 나갔다. 유가족들이 처음 공식 기자회견을 열었던 서울 서초동 민변 사무실, 시민분향소가 있는 이태원, 반쪽짜리 국정조사가 펼쳐진 여의도 국회 의사당, 윗선 배제 수사를 비판하기 위해 찾은 마포 경찰청 특별수사본부 앞. 엄마는 첫 기자회견에서 마이크에 대고 "무능한 정부에 아들을 빼앗겼지만 엄마는 더 이상 눈물만 흘리는 무능한 엄마가 되지 않겠다"고 외쳤다. (관련 기사 : 아들의 죽음, 엄마의 약속 "무능 정부에 단호히 소리칠게")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이남훈씨(29)의 어머니 박영수씨는 이태원참사 이후 경기도 포천 집에서 왕복 4시간 거리의 서울 시내를 수시로 오간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3일 바로 사흘 전에도 이태원 시민분향소를 찾았다. 눈이 오는 날엔 버스와 지하철을 번갈아 타고, 맑은 날에는 운전을 했다. 몸 상할까 걱정하며 말리던 가족들은 "이거라도 안 하면 엄마가 죽을 것 같다"는 말에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서울을 다녀오면 그나마 잠다운 잠을 잘 수 있었다.
 
작업복과 바바리코트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이남훈씨의 어머니 박영수씨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이남훈씨의 어머니 박영수씨 ⓒ 이희훈

엄마의 휴대전화에 '내 사랑 아들'로 저장돼 있는 삼남매 중 둘째, 이남훈씨는 어릴 적 전문가의 눈에 띌 정도로 축구에 소질을 보였다. 중고등학생 때는 태권도 선수로 활약하며 체력을 다졌다. 일을 시작하고 나서도 조기 축구를 하며 운동을 쉬지 않았다. 지난해 봄부터는 단백질도 챙겨먹으며 부쩍 몸 관리에 힘썼다.

집 근처 수목장에 모신 남훈씨 곁에는 투명 아크릴판으로 짠 상자가 있다. 그를 기억하게 하는 물건들이 차곡차곡 담겨있었다. 동네 축구 동호회에서 남훈씨의 장례식에 놓고 갔던 유니폼, 축구공, 축구화가 한 편에 놓였다. 영정 사진은 삼우제를 마친 날 태워 하늘로 날려 보냈다. 영정 틀에 갇혀 있지 말고 자유롭게 가길 바랐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남훈씨의 묘석에 이렇게 적었다. 

"폼생폼사 멋쟁이 우리 아들 사랑해!"
 
 고 이남훈씨의 어린시절 사진
고 이남훈씨의 어린시절 사진 ⓒ 이희훈
 
폼생폼사. 남훈씨가 자신을 위해 돈을 쓰기 시작한 것은 사실 얼마 되지 않는다. 오전 6시에 강화마루 건설 회사로 출근해 오후 5시에 퇴근하면, 곧장 저녁 아르바이트를 위해 집 근처 골프장으로 향했다. 어릴 적 부모님이 고생하며 일군 이불 공장이 두 차례 화재를 겪고 또 극복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들은 돈벌이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엄마, 나 돈 많이 벌 거야."
 

엄마는 어느 날 아들이 건넨 말을 기억했다. 공장 일 때문에 매번 작업복을 입고 있는 옷차림을 못마땅했는지 생일날 바바리코트를 사다 주던 아들이었다. 7살 터울의 막내 여동생에게 때때로 용돈을 주고, 보험을 들어준 오빠였다. 고등학교, 대학교 때도 용돈 한 번 타 쓰지 않은 아들. 경제관념이 확실했다. 엄마는 남훈씨에게 늘 "남의 주머니에 있는 돈 내 주머니에 옮기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가르쳤다.

박영수씨는 아들이 건넨 옷을 보고 "엄마가 이렇게 젊냐, 이놈아"라며 기분 좋은 면박을 했다며, 그 때를 떠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레시피대로 요리하길 즐겼던 남훈씨는 가족들에게 제대로 맛을 낸 콩나물 대패삼겹살 두루치기도 이따금 해줬다. 친구에게 지나가듯 한 말이지만 그는 언젠가 '삼겹살집'을 해보고 싶다고 했단다.

돈벌이를 시작하면서, 돈 쓰는 재미를 알아갔던 남훈씨. 또래 사이에서 유행하는 반지갑도 사보고, 맘에 들면 브랜드 옷도 곧잘 샀다. "그렇게 살다가 나이 서른 넘으면 어떡할래" 걱정하는 엄마에게 아들은 말했다. "조금만 누려볼게요. 서른까지만 해보고 안 할게요." 지난해 연애를 다시 시작한 아들의 얼굴은 활기로 가득했다. 그랬던 아들이, 서른이 되기 직전 세상을 떠났다.

가위질 돼 있던 마지막 옷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이남훈씨 가족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이남훈씨 가족 ⓒ 이희훈
 
2022년 10월 30일 새벽 3시, 밤이면 적막해지는 동네에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남훈씨의 친구였다. 우는 얼굴로 "남훈이가 사고가 난 것 같다, 순천향대 병원에 있다고 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교통사고가 난 줄로만 알았다.

남편과 함께 병원과 한남동 주민센터를 오가며 아들을 찾아 헤맸다. 오전 9시까지만 해도 사망자 명단에 아들은 없다고 했다. '다쳐서 어디 병원에 있을 거야' 간절히 희망을 붙들고 기다렸다. 그러나 같은 날 오전 10시, 남훈씨가 서울삼육대병원으로 이송됐다는 연락이 닿았다.

아들은 맨몸으로 누워 있었다.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경찰이 유품이라고 건넨 보따리에는 가위질로 찢긴 아들의 옷이 담겨있었다. 아들이 집을 나서며 걸치고 간 옷들이었다. 얇은 시트 하나만을 덮고 누워 있는 아들의 모습을 보니 얼른 집으로 데려가고픈 마음뿐이었다. 그때 경찰이 다가와 물었다. '부검을 하겠냐'고. 아버지가 곧바로 되물었다. '왜 아이를 부검합니까'라고.

장례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새벽. 박씨는 시내에 있는 파출소를 향해 40분을 걷고 또 걸었다.
 
"우리 아들 좀 찾아주세요. 우리 아들 이름은 이남훈이고요..."
 

경찰이 남훈씨의 신분을 조회했다. 황망한 결과. 경찰의 전화를 받은 남편은 파출소로 달려왔다. 그날 이후부터 남편은 아내가 다시 밤 거리를 헤맬까봐 머리를 방문 앞에 두고 잠을 청한다.

어디에도 '마지막' 기록이 없다

가족들은 참사 발생 100일이 지나도록, 고인이 숨을 언제 거두었는지 알지 못한다. 지난 1월 17일 참사 석 달 만에 가족들이 직접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받은 구급활동일지에는 주요 시점들이 '추정'으로 제시되어 있었다. 

가족들의 의문은 추정 시각들 사이 여전히 풀리지 않은 공백에서 시작됐다. 아들을 포함한 사망자 대부분이 아비규환의 그날, 재난 시스템으로부터 방치됐다는 의심이다.

구급일지에 따르면 구급대가 남훈씨를 처음 접촉한 시각은 10월 30일 새벽 1시 18분. 구급대원이 남긴 사망 '추정' 시각은 10월 29일 오후 10시 15분. 그러나 남훈씨와 함께 있었던 여자친구가 전한 증언은 달랐다. 엄마는 그날 상황을 알기 위해 어렵사리 여자친구와 만났다.

"(남훈이 여자친구가, 사고 당일) 이태원역 1번 출구에 내려서 (사고가 난 장소) 거기까지 가는데, 출구부터 사람이 많았다고 했어요. 도착하자마자, 30여 분 만에 사고를 당한 거예요. 식사를 하거나 즐기고 나서가 아니라, 사람 틈에 끼어 밀려 거기까지 간 끝에... (정신이 들어) 눈을 떠보니 남자분 셋이서 (남훈이에게)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여자 친구가 정신을 차린 시간이 오후 11시 20분경이라고 했거든요. 구급대 도착 시간은 다음 날 새벽 1시 18분. 2시간 차이인데, 당시 우리 아들 체온이 35도라고 기록돼 있어요. 그 추운 날씨에 체온이 1도 정도 밖에 안떨어졌다? 그 전에 이미 사망했다면 더 떨어지지 않았을까요?

(유가족들을) 만나보면, 현장에선 아이가 살아있었다는 이야기도 많아요. (참사 당시 현장을) 지나던 사람이 '(희생자가) 살아 있는 걸 봤는데, 녹사평 (시민분향소에) 와보니 영정이 걸려 있더라' 하는 증언도 많고요. 이런 것만 생각하면 정말 창자가 끊어지는 거예요."

 
 경찰청 특별수사본부에서 보낸 수사결과통지서
경찰청 특별수사본부에서 보낸 수사결과통지서 ⓒ 이희훈
 경찰청 특별수사본부에서 보낸 수사결과통지서
경찰청 특별수사본부에서 보낸 수사결과통지서 ⓒ 이희훈
 
박씨의 속을 두 번 뒤집어 놓은 건 경찰청 특별수사본부였다. 이상민 행정안전부장관, 윤희근 경찰청장, 서울시 등 윗선 책임 대신 실무급 책임만 나열된 수사결과 통지서가 지난달 날아왔기 때문이다. 날짜를 달리 적은 두 통의 통지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 통을 양쪽에 펼쳐 한 글자씩 다른 내용이 없나 비교하며 읽어 내려갔다. 결론은 "한 글자도 틀림없이 똑같은 내용"이었다. "염장을 지르나" 싶었다. 편지를 받은 날 저녁까지 하루 종일 울었다. 주변에 알아보니 이 통지서마저 받은 집, 받지 않은 집 제각각이었다. "개판 오분 전"이라는 한탄이 절로 나왔다.
 
"행정 착오가 있었을 수 있겠죠. 그래도 이건 아니죠... 서류 봉투에 다시 넣어서, 한 마디 쓴 다음 반송하려 해요. '인정할 수 없는 내용'이라고요. 우리가 이태원참사 독립조사기구를 요구하고 있잖아요. 거기에 희망을 걸어보고, 할 수 있는 한 해보려고 해요. 이대로(특수본 결과) 수긍하기에는 너무 억울하잖아요."

 
"살아갈 나라가 아니라, 살아내야 할 나라"


박영수씨는 앞에 나서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뉴스에 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아이 보기 싫어' 하고 채널을 돌리곤 했다. 아들이 떠난 후, 일상은 180도 바뀌었다. 생계를 위해 30년 가까이 매달린 이불 공장을 '올스톱' 시키고, 살기 위해 유가족들이 목소리를 모으는 공간으로 나갔다.

희생자 추모를 위해 159배를 하고 난 다음 날 다리가 아파 오리걸음으로 걷는 엄마들과 함께 다시 국회를 찾고, 지난 4일에는 아이의 영정을 들고 이태원에서 서울시청까지 행진했다. 얼굴도 몰랐던 사람들끼리 모여 슬픔을 나누고, 함께 안아주고 울면서 위로를 받았다.
  
어느새 자주 보는 채널은 보도 전문 채널로 고정됐다. 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이태원이라는 단어 자체가 점점 안 나오더라." 줄어드는 관심에 그 역시 불안을 느낀다. "하나도 밝혀진 것도 없는데 점점 묻혀가고 있다"고 했다.

국회에서 기자회견이 있던 날, 그는 고가도로를 운전하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여기는 안전할까?' "살아갈 나라가 아니라, 살아내야 할 나라." 그는 여전히 안전하지 않은 대한민국에서 살아갈 청년들이 애달팠다.

그래서일까.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는 조롱이 가장 힘들다. 

"동조는 아니더라도, 아픈 말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런 말을 들은 날이면 하루가 아프고, 자면서도 괜히 한 번 더 울게 돼요." 

첫 기자회견 날, 엄마를 찾아온 아들... 그리고 
 
"엄마, 어디 좀 가자."  

아들 남훈이 엄마를 불렀다. 2022년 11월 22일 오전 6시경, 첫 기자회견에서 낭독할 원고를 쓰다 잠든 박씨에게 남훈씨가 처음 꿈으로 찾아온 날이었다. 새벽 4시까지 글을 쓰고 잠깐 눈이 감긴 사이였다. 하마터면 서울 출발 시간을 못 맞출 뻔했던 날. 아들이 찾아와 "가자"고 했다.

"엄마들은 그러잖아요. 꿈에서라도 보고 싶으니까 오라고. 그날 처음 오고 아직 한 번도 안 왔거든? 엄마한테 뭐라도 좀 이야기해달라고 온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 그래... 엄마가 조금이라도 뭘 해내고, 억울하고 답답한 게 풀리면 그때 오겠지, 하고 기다리는 거예요."

엄마는 아들의 방문을 아직 열지 못한다. 대신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을 외치기 위해 집 밖으로 나선다. 2월 4일에도 박씨는 서울시청 대로 아스팔트에 앉아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추모했다. 엄마가 남훈씨의 방문을 열 수 있는 날은 아들에게 이 말을 전할 수 있을 때라고 했다.

"어느 정도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수긍이 되면 그때 아들 방을 정리해줄 생각이에요. 그땐 용기를 내서 아들에게 말하려고요. 스물아홉 짧게 산 우리 아들, 경제적으로 어려운 부모 만나 고생하고 살게해서 미안하다고. 편히 하고 싶은 거 많이 하고 돈 많이 벌겠다 했으니 돈도 많이 벌며 편히 살라고. 나라에서 조금이라도 인정하고, (참사를) 이해할 뭔가 근거가 생긴다면, 그때는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더 말할 수 있을 거 같고요. 지금은 아무 말도... 차마 미안하다는 말도 못 하겠어요."
 
 고 이남훈씨의 어머니 박영수씨가 이태원참사 100일을 하루 앞둔 지난 2월 4일 오후 서울시청앞에서 기습적으로 설치한 분향소 앞에서 몸자보를 메고 자리를 지켰다.
고 이남훈씨의 어머니 박영수씨가 이태원참사 100일을 하루 앞둔 지난 2월 4일 오후 서울시청앞에서 기습적으로 설치한 분향소 앞에서 몸자보를 메고 자리를 지켰다. ⓒ 권우성

#이태원참사#이상민#유가족#책임자처벌#진상규명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이 기사는 연재 이태원참사_희생자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독자의견

해당 기사는 댓글 서비스를 지원하지 않습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