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둥지중후군'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아이들을 다 키우고나서 느끼는 공허감이라고 하더라.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 내내 꿈꾸었던 '독.거.중.년'의 실현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공허감이라니 도저히 공감할 수 없다.
아이들에 대한 책임감에서 벗어나 하루빨리 자유로워지기만을 바라왔던 나는 작은 아이가 대학에 입학하는 올해를 나의 '안!식!년'으로 선포했다. 둘째의 대학 합격 발표를 확인하자마자 떠나겠다고 벼르고 별렀다.
드디어 그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어디로, 어떻게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세워놓지 않았지만 떠난다는 생각만으로도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오고 마음이 붕붕 날아다닌다.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에도 틈틈히 여행(물론 혼자 가는 여행은 아니었지만)을 다녔고, 집 떠나면 안식보다는 개고생이라는데 왜 굳이 떠나려고 하느냐고? 답은 하나다.... 밥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밥에서 해방되고 싶다
아침 7시도 안 되어 하루를 시작해서 밤 11시가 넘어야 끝나는 내 하루 일과는 밥으로 시작해서 밥으로 끝난다. 하루 세 끼와 세 끼 사이의 간식에 야식까지, 결혼과 함께 시작되어 27년을 짊어지고 온 '돌밥'(돌아서면 밥)의 굴레는 내가 안식년을 간절히 바라는 가장 큰 이유다. 밥으로부터 해방되지 않는 이상 진정한 안식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의무감에서만 밥을 해 온 건 아니다. 내가 준비하는 밥에는 지긋지긋함만큼 즐거움과 사랑도 담겨 있었고, 정성껏 준비한 밥을 맛있게 먹어주는 식구들을 보며 행복감도 느껴왔다. 하지만 밥을 하고 싶을 때 하고,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지금의 내게는 무엇보다 간절하다. '나'는 빠져 있고 가족들만을 위한 삶에서 이제는 좀 자유로워지고 싶다.
비할 바는 아니지만, 지금 나는 27년 직장생활을 마치고 퇴직 후의 인생을 설계하는 직장인의 마음과 비슷한 심정이다. 홀가분함과 함께 막막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나에게 안식년은 가족들이 주인공이었던 지나온 인생을 정리하는 시간이면서 동시에 내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앞으로의 인생을 새롭게 준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가족들에게 호기롭게 안식년을 선포했고, 남편과 딸들의 적극적인 지지도 받고 있지만 과연 어떻게 안식년을 보내야 성공적인 인생 후반부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여행, 취미, 효도... 무엇 하나 쉽지 않네
막연히 생각해왔던 내 안식년의 키워드는 여행, 취미, 효도이다. 여행은 물론 혼자 떠나는 여행이고, 늙어서까지 행복하게 즐길 수 있는 취미(놀거리)를 찾는 것이고, 내 아이들 챙기느라 소홀했던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려니 여행에서부터 삐걱거린다. 혼자 떠나는 여행에 남편 카드를 쓰려니 괜히 눈치가 보인다. 비록 대부분 남편의 수입으로 이룬 재산이지만 그 안에는 분명 집안일을 충실히 해 온 내 지분이 들어있는데도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직장에서 퇴직하고나면 퇴직금으로나마 위로를 받는데, 아이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전업주부 생활의 끝에는 아무런 보상도 없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물론 남편이 내 소비에 대해 한 번도 딴지를 걸었던 적은 없었지만, 그동안 나 자신만을 위해 돈을 써본 적이 거의 없어 어렵다.
취미 찾기도 쉽지 않다. 오래도록 즐겁게 할 수 있는 취미를 찾으려면 우선 내가 뭘 좋아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마치 어릴 적 꿈이 대통령도 되었다가 선생님도 되었다가 과학자도 되었던 것처럼, 취미로 악기도 배우고 싶고 그림도 배우고 싶고 운동도 배우고 싶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그저 막연하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을 줄 알고, 노는 것도 놀아본 사람이 놀 줄 안다고 그동안 아이들에게만 집중하느라 내가 뭘 좋아하는지를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다.
효도 역시 마찬가지다. 말이 효도지 사실은 아이들의 엄마로서 힘들었던 마음을 부모님께 위로 받고 그 품 안에서 어릴 때처럼 안식을 얻고 싶은데, 부모님은 이미 너무 늙어버리셔서 오히려 내 보호가 필요한 연세가 되셨다.
여기저기 매일같이 아픈 곳이 늘어가는 부모님은 어느새 부담으로 다가오기 시작했고, 마음과 다르게 부모님과 함께 있는 시간이 별로 즐겁지 않아 선뜻 나서지지가 않는다.
백세 인생에서 막 중반을 넘어서는 지금, 내 인생의 점검은 분명 필요하다. 마치 책에서 챕터가 바뀌는 중간의 간지처럼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지만 다음을 기대하게 만드는 여백이랄까? 그래서 나의 안식년은 무엇보다 꼭 필요하다. 하지만 아무런 준비없이 맞이한 안식년을 과연 잘 보낼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블로그에도 실릴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