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번뇌를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깊은 산사의 템플 스테이를 좋아한다. 경내를 오가는 스님들을 뵈면 진리를 찾는 구도자의 길에 동경의 마음이 살짝 일렁이기도 한다. 물질에 찌들어 온갖 욕망을 자극하며 정신을 쏙 빼놓는 세상이 아무리 문 밖에서 휘몰아친다 해도 절 안에서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심연의 자아를 찾아가는 경건한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헌데, 그런 경건함을 절에서 기대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다. 작년 여름 발길질과 인분투척으로 사회면을 장식했던 조계종 사태는 물론이고, 얼마 전 동남아로 골프여행을 갔다는 스님들의 비행에 아연실색하다. 개인적으로 보고 절망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어떤 사찰의 비대한 주지스님이 중형 승용차를 버겁게 운전하던 모습과 불경은 녹음으로 틀어놓고선 옆으로 누워 신도에게 이랬어, 저랬어 반말 건네던 스님은 또 어땠는가.
그런 모습 어디에서 대중에게 진리의 길을 전하며 은거하는 현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지. 그저 구도자의 가면을 쓴 또 하나의 기득권자, 종교를 이용해 어리숙한 신도들을 구워삶아 잇속 챙기기에 혈안이 된 이들로 보일 뿐이다. 최근에는 거물급 정치인사와 어울리는 스님들 사진이 자주 신문에 오르내리는 걸 보며 언제 또 기괴한 뉴스가 들려올지 걱정스럽다.
도시의 대로변에 으리번쩍하게 서있는 교회들은 또 어떤가. 사업을 제대로 키우려면 도심에 위치한 대형 교회 중 한 곳은 필수로 교인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이는 월급 목사를 두고 교회를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교회가 비즈니스를 위한 인맥 쌓기와 돈 버는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뜻인데, 과연 그런 곳에 낮은 곳으로 임하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살아있기나 할는지 의문이다.
타락한 종교의 실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진심으로 안타까운 점은 그럼에도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절과 성당과 교회로 발걸음을 향한다는 사실이다. 성현의 가르침을 새기겠다고 찾아가 엉뚱한 이들의 배를 불려주고 권력만 늘려주는 꼴이 아닌지... 혼탁한 세상에 참 종교인을 만나기란 매우 드문 일이니 차라리 홀로 명상하며 성찰하는 시간을 꾸준히 갖는 것이 영혼을 위해 더 이로울지 모르겠다.
여전히 유의미한 헤세의 성찰
스스로 성찰의 길을 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참고가 될만한 좋은 이야기가 있다. 바로 1922년 출간된 헤르만 헤세의 장편소설 <싯다르타>이다. 헤세가 40대 중반에 발표한 이 소설은 영원을 갈구하는 자아의 성찰을 종교적으로 녹여낸 작품으로, 진리를 찾는 구도자의 길에 대해 진중한 함의를 전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현재에도 충분히 유의미해 보인다.
헤세가 전하는 진중한 함의란, 아무리 현인이라도 말을 이용한 가르침으론 지식은 전할 수 있을지언정 진리와 지혜는 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리는 가르칠 수 없다'는 이 깨달음을 헤세는 일생에 꼭 한 번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싶었고, 그 시도가 바로 소설 <싯다르타>였다고 한다. 헤세의 이 자각은, 유명하다는 성직자와 종교인을 찾아 오락가락 정처 없이 방황하는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분명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헤세는 소설 속 청년 싯다르타를 통해 이 메시지를 선명히 전하고 있는데, 간단한 내용은 이렇다. 싯다르타는 이른 나이부터 바라문의 교리와 계율을 익히고 온갖 지식을 섭렵하며 해탈에 이르기를 염원하지만, 부족함을 느끼고 출가사문이 된다. 숲 속에서 참선과 고행으로 잠시 자아를 초탈하며 기쁘다가도 결국엔 자아로 되돌아옴에 실망하던 중 깨달은 자, 석가 고타마의 소문을 듣는다.
석가를 찾아간 그는 세상 만물이 인과법칙에 따라 생성, 사멸되며 단일하게 흘러간다는 연기법과 해탈에 이르기 위한 사성제와 팔정도에 대한 석가의 법문을 듣는다. 총명한 싯다르타는 석가의 설법 중 석연치 않은 부분을 발견하고 석가에게 묻는다. 석가의 해탈은 스스로의 생각과 침잠, 인식과 깨달음을 통해 얻어졌는데 그 깨달음의 순간에 체험한 것은 부처님의 제자가 된다 해도 결코 말로 배울 수 없는 것임을 지적한 것이다.
이 장면에서 싯다르타의 의견은 곧 헤세의 생각이기에 그의 일리 있는 지적이 놀랍다. 한편 싯다르타란 인물을 통해 논리적으로 매사 시시비비를 가려내는 데만 열중한 사람들을 빗대는 일화로 보이기도 한다. 상식에 어긋나는데도 전체의 일면만 따지고 들며 궤변을 늘어놓아 대중을 현혹하는 지식인이 요즘도 어디 한둘인가. 소설 속의 석가 역시 싯다르타의 총명함을 인정하지만 그가 무성한 의견들 속에서 목적을 잃고 미로에 빠지지 않기를 당부한다.
싯다르타는 결국 석가의 가르침을 뒤로한 채 자아를 찾으라는 내면의 소리를 따라 홀로 세상 속으로 나선다. 그는 곧 속세에서 여자를 만나고 돈 버는 법에 눈을 뜨며 쾌락과 권력에 빠져든다. 타락한 생활로 젊음의 시간을 다 보내고 나서야 쓰디쓴 절망과 구역질 나는 자기혐오에 사로잡혀 자신을 용서할 수 없게 된다. 강가에 다다른 그는 도도히 흘러가는 강을 앞에 두고 일순간 자각한다. 그의 타락한 세속생활은 진리의 통찰에 이르기 위한 일종의 극복 단계였음을.
내면의 오만했던 자아를 그제야 미련 없이 떠나보내며 그는 스스로 낮아진다. 그리고 뱃사공이 되어 강물소리를 듣고 강물로부터 배우기 시작한다. 그에게 강물은 생의 흐름에 대한 비유이자 시간의 극복을 의미하는 상징으로, 모든 만물이 순간순간 이미 완성된 자체로서 현존하고 있다는 이치를 알려주는 스승이었다. 오만한 자아를 내려놓으면 그 어떤 무엇에서라도 세상의 이치를 깨쳐낼 수 있다는 헤세의 함의가 한번 더 와닿는다.
선행자의 조언이 아닌 자신이 직접 깨달을 때
헤세는 소설의 말미에 싯다르타의 오랜 옛 친구 고빈다를 통해 실체적 삶에서 스스로 성찰해 내는 지혜의 중요성을 한 번 더 강조한다. 우연히 나루터에서 싯다르타를 만난 옛 친구 고빈다는 평생을 석가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중인데도 여전히 자주 불안하고 암담하다고 토로한다. 싯다르타는 아무리 현인이라 해도 일면만 전하는 말의 특성 때문에 진리와 지혜는 타인에게 완전히 전달될 수 없음을 일러준다.
"그 가르침이라는 것은 말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지. 자네가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바로 이 가르침이라는 것, 바로 그 무수한 말들이 아닐까 싶어." (212쪽)
그러고 보니 만사가 정말 그런 것 같다. 농사든, 요리든, 운동이든, 법이든, 의술이든, 글쓰기든 그것을 가르치는 원리 원칙과 선행자의 조언만 연구해서는 늘 제자리만 뱅뱅 돌 뿐이다. 스스로 직접 헤쳐나가며 현상을 깊이 관찰하고 사색하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작은 깨달음들이 쌓여갈 때 지식과 지혜가 조화로운 자아를 이루어가는 게 아닐까.
<싯다르타>는 정형화된 교리가 아닌 자족적인 영혼의 성찰을 통해 지혜를 구득해 가는 인물을 그린 종교적 성장소설이다. 지혜와 진리는 자신의 실제 삶에서 지속적인 노력을 통한 성찰로만 구할 수 있고, 이는 결국 스스로 이루어내야 하는 일이라는 점이 크게 와닿는다. 진리를 통한 구원을 얻는다는 명분으로 오늘도 각 종교시설로 향하는 우리 같은 미욱한 사람들이 새겨들을 만한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