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삶의 ‘흔적’이 쌓인 작은 공간조직이 인접한 그것과 섞이면서 골목과 마을이 되고, 이들이 모이고 쌓여 도시 공동체가 된다. 수려하고 과시적인 곳보다는, 삶이 꿈틀거리는 골목이 더 아름답다 믿는다. 이런 흔적이 많은 도시를 더 좋아한다. 우리 도시 곳곳에 남겨진 삶의 흔적을 찾아보려 한다. 그곳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기쁘게 만나보려 한다. [기자말] |
응봉산을 등지고 앉은 제물포는 월미도를 품어 한적하고 평화롭기 그지없는 포구였다. 바다를 향해 비죽이 혀 내민 제물량은 서해 뱃길을 보호하는 수군 군영이었다. 그런 포구가 격랑처럼 덮쳐온 침탈에 억지로 문을 열어야 했고, 도시와 항구로 변모한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개방은 시대의 요구였고, 새로운 세계를 맞아들이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 손으로 열지 못했다. 최소한의 준비조차 없었던 강제 개항은, 분명 뭔가를 앗길 수밖에 없는 필연을 예비하고 있었다.
일제가 도발한 운요호 사건으로 강화도에서 불평등 조약(1876)을 맺어야 했다. 조약엔 부산 외 두 개 항 개항이 포함되어 있다. 일제는 한반도 연안을 맘껏 측량하고 다닌다. 개항은 여러 이유로 늦어진다. 일제는 제물포를 염두에 두고 조선을 압박한다. 고종은 '제물포는 서울의 목구멍에 해당한다'며 거부하나 강압에 밀려 1882년 9월 개항하겠다 약속한다.
임오군란(1882.06)은 개항을 늦출 명분이었으나 한계가 농후했다. 군란으로 강압된 제물포조약 속약 첫 조항에 '부산·원산·인천 각 항구에 10리이던 일본인 여행 허용지역을 사방 50리로 확장한다'는 규정을 끼워 넣으며 개항이 공식화한다.
제물포는 천혜의 자연조건과 인문지리적 요건을 갖춘 최적지였다. 월미도 남쪽 갯골 수심은 만조 시 대형군함 입출항이 가능했고, 서울로 통하는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1893년 1월 부산, 원산에 이어 인천이 개항한다.
최초 계획도시
'조계지'는 중국의 직접 지배에 부담을 느낀 서구 열강이 상하이에 설치한 특수 형태의 치외법권 지역이다. 이 조계지가 제물포에 들어선다. 응봉산 자락 남쪽과 북서쪽을 휘감아 자리한다. 서구가 이 땅에 그린 최초 계획도시다.
조계지는 3구획이다. 개항하던 해 일본과 '인천구조계조약'을, 이듬해 중국과 '인천구화상지계장정'을, 각국과 '인천제물포각국조계장정'을 체결 함으로써 구획이 정해진다.
오스만 남작의 손에 중세도시 파리가 대대적인 개조에 들어간다. 미로형 가로에 넓은 직선도로를 뚫고 방사 환상형 가로망을 구성한다. 주택, 상하수도, 공원과 광장, 조명 등 모든 것을 바꿔 놓는다. 이로써 통일된 경관 도시 파리가 탄생한다. 근대도시의 시작이다. 이 '파리 개조계획'은 과학기술과 더불어 서구 근대화를 이끈 쌍두마차였다. 이런 계획 사조가 인천에 상륙한 셈이다.
3구획의 조계지는 공간구조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 서구 열강이 차지한 구획은 지형을 깎고 쌓아 직선의 격자형 가로망으로 계단식 단지를 구획한다. 조계지 남동쪽 가지런한 획지를 본떠 '일본전관거류지'도 같은 모양으로 구획된다. 북서쪽 각국 조계지도 지형을 극복해 가급 직선 가로로 획지를 구획하려 노력한 흔적이 역력해 보인다.
반면 영국영사관 북측 '청국전관조계'는 지형을 따라 획지를 구성한다. 따라서 가로가 지형을 따라 구불구불하다. 가로 폭도 휴먼스케일이다. 걷기 편하다. 지금의 '중화가' 문이 서 있는 길을 중심으로 좌측 독일 조계지였던 곳이 나중 차이나타운에 편입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렇게 형성된 조계지 공간구조가 인천개항지구로 남았다.
이와 함께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의 설계로 응봉산에 1888년 최초 근대 도시공원 '만국공원'이 생겨난다.
얼굴 다른 샴쌍둥이
조계지 공간구조는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봉건 도시는 대체로 자연 지형에 순응한 구불구불한 좁은 가로를 가졌다. 곡선은 순응과 적응이며 너그러운 관용이다. 도시를 유기체로 본다면 곡선 가로는 생태환경을 고려했다 할 수 있다. 중국 조계지가 지형에 순응한 모양새다.
파리 개조계획 이후 서구 도시가 앞다퉈 격자형 가로망을 채택한다. 직선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합리와 효율을 추구한다. 효율은 속도이며 날카롭다. 격자형 가로망이 이의 현시다. 속도를 상징하는 곧은 직선 가로가 이 땅에 첫발을 내디딘 곳이 제물포다. 서구 제국주의 모방에 열 올리던 일제는 철저히 서구 도시계획을 지향했다. 일본 조계지도 그래서 격자형이다.
둘은 샴쌍둥이로 태어났으되 얼굴이 다르다. 이를 아시아적생산양식과 침략적 제국주의 차이라면 논리 비약일까. 우리에겐 불행이었으나, 이 차이가 한반도 침탈과정에서 두 나라 간 성패를 가른 요인이었을까.
지금 차이나타운은 사람으로 늘 붐빈다. 반면 일본 조계지는 근대 문물의 흔적만 역력하다. 일제강점기 수십 년 동안 인천의 정치와 행정, 문화와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기능도 빠져나갔다. 둘의 차이가 공간의 지속가능성과 생명력을 가른 척도로 작용했을까.
밀려든 것들
개항하자마자 일본 상인이 먼저 움직인다. 이들이 조합을 구성해 접안시설을 만든다. 옛 지도로 보아 소형 증기선 접안이 가능한 수준으로 보인다.
제물포가 항구로 발돋움한 건 1906년 항만시설개선계획이 수립되면서부터다. 항만 설비를 갖추기까지 6년여 시간이 소요된다. 그러나 조수간만차를 극복하지 못해 대규모 화물 취급엔 한계가 있었다.
현대식 항만의 모습을 갖춘 건 2중으로 된 갑문식(閘門式) 선거(dock)를 만들면서부터다. 조수간만차를 갑문으로 극복, 일정 수위를 유지함으로써 큰 배의 입출항과 정박이 가능해진다. 1911~1923년 갑문식 선거가 건설되어 4500톤급 선박 3척이 접안 할 수 있었고 연간 하역 능력도 130만 톤에 이른다. 세관이 들어서 무역항으로 발돋움한다.
철도 시원도 이곳이다. 1899년 9월 '경인선' 인천~노량진 구간이 개통한다. 서울 가는 경인가도(경인 옛길)가 있었다. 우마차 교행이 가능한 폭의 구불구불한 길이다. 제물포 개항과 함께 철도와 도로축을 따라 도시가 확산한다. 확산한 시가지가 우각현(동구 창영동)까지 이어진다.
제물포는 서울 정동과 더불어 근대화의 상징이다. 가톨릭과 기독교가 발 디뎠고, 1902년 조선인 최초 이민자들이 이 항구에서 하와이로 떠난다. 전신선 가설로 통신이 가능해지며, 전기설비가 들어 온다. 일본에서 발행된 우표가 이곳으로 들어와 우편이 이뤄진다.
상업활동이 활발해지고 금융기관이 생겨나며 월미도엔 유원지가, 팔미도엔 최초의 등대가 불 밝힌다. 학교가 들어서고 기상관측소, 운동장, 연극무대, 극장과 박물관, 도서관이 순차적으로 생겨난다.
바다로 뻗은 땅끝 제물포는 외세의 전장 터이기도 했다. 1894년 동학혁명 때 청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이 이곳으로 상륙했고, 러일전쟁 땐 팔미도 해전에서 패한 러시아 군함 두 척이 소월미도 앞바다에서 자폭했다. 인천상륙작전도 빠질 수 없다. 자유공원 산정에 작전을 감행한 미국 장군 동상이 서 있다. 이 동상을 두고 한때 철거와 존치로 갈등을 겪은 적도 있다.
승학산 남측 인천의 전통적 통치와 권위 중심이었던 인천도호부가 쇠락한다. 경제권마저 제물포에 빼앗긴 건 '밀려든 것들'이 가져온 충격이었다. 힘없는 나라의 관문은 늘 애잔하다. 인천항도 예외일 수 없다. 피식민지 기간 이 항구로 얼마나 많은 백성의 피와 땀, 생명을 빼앗겼을까. 앗긴 정신과 신념은 또 얼마일까.
그렇다고 이게 전부는 아니다. 저항과 독립운동, 자주와 민주, 통일을 위해 투쟁한 숭고한 정신도 짙게 밴 공간이다.
지속가능성
거대도시의 중심지는 여럿이다. 다핵도시 중심지는 정치와 행정, 문화와 예술, 경제와 상업으로 분화한다. 제물포는 일제강점기 인천 유일의 중심지였다. 정치는 물론 행정과 금융, 상업과 문화·예술을 망라했다. 그러나 지금의 제물포를 어느 면에서건 인천의 중심이라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함에도 인천의 상징은 인천항이다. 북항과 연안항은 물론 매립으로 생겨난 송도 외항까지를 아우르는 물류 기능 중심이기 때문이다. 밖을 향해 열린 공간이다. 근대화가 이곳으로 밀려들었고, 이민자는 물론 전쟁과 수탈에 앗긴 모든 것이 이곳을 통해 빠져나갔다.
제물포는 지금 등 굽은 노년의 모습이다. 그래도 공간 매력은 충분해 보인다. 품위 있는 근대 유산이 자산으로 남았다.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충분한 자산을 갖춘 셈이다. 하드웨어보다 발랄한 소프트웨어가 필요해 보인다. 공간이 가진 자산으로 발길이 잦아지게 만들어야 한다. 기억할 과거가 현재와 미래의 거울이어야 한다. 근대 인천의 정신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할 수 있는 공간으로 살아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