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곁에 있을 수 있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합니다. 현재 조현정동장애(조현병과 우울증이 혼재된 정신질환)로 진단 받은 뒤 살아나가고 있습니다. 조현정동장애 환자는 2021년 기준 국내에 1만 2435명(건강보험심사평가원)입니다. 제 이야기를 통해 당사자들과 주변인들에게 힘이 되고자 하며, 조현병 스펙트럼 장애에 대한 인식 개선에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기자말] |
1년 정도 내원하던 정신병원에서 저를 담당했던 의사가 휴식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의사가 추천해 준 정신건강의학과의원(아래 '정신과의원')에서 진료를 보게 되었죠. 새로 다니게 된 정신과의원의 의사는 제가 조현병이 아니라 우울증일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어요.
조현병이라고 진단하기에는 제 행동과 상태가 기존의 조현병 유형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조현병이나 우울증 어느 한 쪽으로 확신하지 말고 한동안 지켜보자고 했죠. 우울증과 조현병에 함께 쓸 수 있는 약을 복용하고, 질병분류기호가 조현병에서 우울증 계열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우울증과 조현병 사이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시간
조현병이 아니길 바라던 부모님은 좋아했지만 저는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새로운 진단을 따르자면 조현병 환자로서의 정체성을 버리거나 유보해야만 했으니까요. 제 정신질환을 알고 있던 소수의 지인들은 정신질환자로서 정체성은 중요하지 않다고 하거나, 그 때 그 때 진단명에 따라 정체성을 수정하면 되지 않겠냐고 반응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우울증과 조현병 정신질환자가 가지는 각 질환에 대한 관점에는 조금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우울증만으로 고생하던 시기에는 쉽게 희망을 가졌습니다. 십 년 정도의 경험을 통해, 심하게 우울한 기간을 넘기면 나아지는 때가 올거라고 예측이 가능했어요. 정신질환에도 리듬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대응하기 어렵지 않았습니다.
조현병과 우울증을 동시에 가진 조현정동장애로 진단을 받은 후에도 우울이 강하게 느껴질 때는 언젠간 마음이 다시 평온해지리란 걸 믿으며 버팁니다. 그렇게 우울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익혔기에 우울증이라는 질환이 제 정체성의 큰 부분이 되진 않은 상태에요.
반면에 조현병은 치료가 가능하지만, 완치가 가능하다거나 좋은 때가 올 거라 단정해 말하기 어려운 정신질환입니다. 발병 후에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성격과 행동이 크게 바뀌기도 해요. 조현병의 역사가 시작되면 정신질환을 가진 당사자에게도 큰 전환점이 될 수 있습니다. 언제 어느 때 재발이 될지도 가늠하기 쉽지 않고요. 그래서 저는 조현병을 가지게 된다면 정신질환자로서 나름대로 정체성을 세우고 인지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요.
우울증과 조현병 중 어느 하나로 저를 설명하기 어려운 기간 동안에는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저를 우울증이라고 생각하는 부모님은 제가 희망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증상을 극복하며, 정체성을 가지지 않기 위한 노력을 해야만 한다고 질책했습니다. 제가 조현병이라고 생각하는 몇몇 지인들은 당사자가 조현병을 무시한 정체성을 가지는 건 불가능하며, 제가 발병 후 상태가 좋은 편이기에 그런 안일한 사고를 할 수 있는 거라 비판했죠.
그래서 저는 상황에 따라 우울증이나 조현병이라 바꿔 말하면서 제 행동과 증상을 설명했습니다. 그런 저를 지켜보는 사람들과 저 자신이 함께 혼란스러웠어요.
애매하게 아픈 정신질환자
정체성 방황의 마무리는 SNS를 하다가 '애매한 아픔'이라는 표현을 읽은 후 일어났습니다. 우울증이나 조현병 중 하나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없는 상태의 고통이 애매한 아픔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 굳이 고정된 병명으로 아픔을 표현할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죠. 애매한 상태의 아픔을 그냥 애매한 그대로 두고 받아들이자고요.
그 생각 이후부터 저는 저를 '애매해게 아픈 정신질환자'라는 정체성을 가진 채 살았습니다. 나중에 조현병과 우울증 증상을 동시에 포함하는 '조현정동장애'라는 진단명을 접하게 되자 무척 기뻤어요. 제가 가진 정신질환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던 거니까요.
제 경우에도 그랬지만 애매하게 아픈 상태, 진단명과 병명으로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을 '애매한 아픔'으로 수용하는 건 도움이 됩니다. 병명이 확실하면 의사의 치료에 용이하고 환자 자신의 상태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어요.
그렇지만 결국 그건 의학적인 설명과 치료를 보조하기 위해 쓰이는 단어일 뿐이에요. 환자에게는 그런 용어보다 자신이 스스로의 아픔을 파악하고 관심을 가지며 주의를 기울이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환자의 신체와 정신의 주인은 의사가 아니고, 병명이 하나더라도 증상은 환자마다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마찬가지로 진단명보다 정신질환과 함께 살아가는 인생의 요령을 찾는게 더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굳이 명확한 병명이 있지 않아도 될 거 같아요. 병명이 우리를 정의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정신질환에 대한 태도와 삶 그 자체가 우리를 정의내리는 것이 되어야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