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단 한 번도 공을 만져본 일 없던 여성이 축구를 시작했습니다. 축구하면서 접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함께하면 이렇게 따뜻하고 재밌다고, 당신도 같이 하자고요. [기자말] |
일반적으로 문화생활의 주축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축구를 즐기는 여성들의 주 나이대도 이와 비슷하다. 반면에 나는 어떤가. 축구를 시작한 지 1년, 이제는 30대를 지나 마흔이 되었다.
대통령의 공약으로 공식 나이가 서른여덟으로 깎일 예정이지만(생일 기준) 그렇다 해도 여자 축구계의 주류 나이대에서 한참 지나갔다. 일할 때는 나이로 스스로나 타인을 재단하지 않고 살았는데, 지금은 수시로 내 나이를 생각하고 남의 나이를 부러워한다.
몸이 자꾸 아프다
체력도 실력도 미약한 주제에 나보다 어린 친구들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나를 보고 한 친구는 이야기했다.
"스스로 마흔이라는 걸 받아들이면 편해져요. 마흔이란 말이에요, 늙은 사람들 중에서 제일 젊은 사람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젊은 애들 사이에서 제일 늙은 사람 취급 그만 받고, 늙은 사람들 사이에서 제일 젊은 사람 해요. 지금이야 못하면 어린 친구들한테 미안하고 염치없겠지만 4050팀 사이에 들어가 봐, 엄청 사랑받을 걸요? 언니들이 물고 빨고 난리날 걸?"
그렇다면 나는 지금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껴입으려 노력하고 있는 것인가? '다이어트 하면 언젠가 이 옷을 입을 수 있을 거야(내가 노력하면 언젠가 축구를 잘할 수 있을 거야).' 스스로를 세뇌하면서 못 내려놓는 사람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간단하다. 몸이 자꾸 아프기 때문이다. 아무리 축구가 에너지를 많이 쓰고 부상이 잦은 운동이라 하지만 그 어떤 몸싸움도 없었는데 뛰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종아리가 아팠는데 나중에는 발목이, 마지막에는 발바닥까지 아파져 발에 땅을 디딜 수조차 없게 되었다.
반면에 내 축구 친구들은 매일같이 공을 차도 별로 힘들어 보이지도 않는 것이다. 이것이 나이의 문제인 거겠지? 축구한 지 1년 된 기념으로 마음껏 뛰어다니고 싶었으나 나는 그저 침대 위를 점령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침대 축구...
더디게 낫는 다리를 보며 자꾸만 '내가 괜히 친구들 따라가다가 가랑이 찢어진 것 같아' 생각하던 차에 친구의 저 한마디가 마음에 깊이 박혔다. 그래, 거꾸로 생각해도 열 살 넘게 나이 많은 언니가 제대로 뛰지도 못하면서 자꾸만 '같이 놀자' 쫓아다니면 방해꾼 같겠지. 그래, 그럴 수 있어.
축구 인생을 가다듬고 삶을 재정비하기 위해 팀을 나와 당분간 재활에만 신경 쓰기로 했다. 주 3회 한의원에 출근 도장을 찍고, 안티푸라민이라는 소염제 연고로 수시로 다리를 마사지해주며 염증을 제거한다. 다 나을 때까지 축구는커녕 헬스, 걷기 운동까지 일체 그만두었다.
한의원에서 그러는데, 스트레칭도 폼롤러도 다 안 좋고,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낫겠답시고 뭔가를 열심히 하려다가 더 나빠져 온다고. 그래서 밥만 많이 먹는 중이다. 고기든 밥이든 눈앞에 있으면 계속 입안으로 넣는다. 먹어야 체력이 생기고, 그래야 부상도 빨리 회복되지 않을까 싶어서. 덕분에 얼굴이 통통해졌다.
좋은 대안이 생겼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이 생겼다. 축구 실력이 순식간에 사라질까 봐. 지난 한 달간 자꾸만 머릿속에 <슬램덩크>에서 강백호가 산왕과의 경기에서 등을 다치는 부상을 당했을 때 한나가 한 말이 떠올랐다.
"이 아인 불과 4개월 만에 놀랄 정도로 엄청난 실력을 쌓았어. (...) 만일 치료와 복귀에 시간이 걸린다면, 플레이를 오랜 시간 동안 하지 못한다면 배운 것을 잃어가는 것도 빠를 거야. 이 4개월이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강백호만큼은 아니지만 나 또한 지난 1년간 눈부시게 성장했는데, 나의 1년이 꿈처럼 사라지면 어쩌지? 나 이대로 시나브로 은퇴하게 되면 어떻게 해? 5060 언니들 사이에서 재롱도 못 부려보고 이렇게 사라지는 거야?
그때 번뜩 좋은 생각이 났다. 몸으로 익힐 수 없다면 머리로 익히면 된다. 다리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내 눈만큼은 건강하다. 그래서 최대한 많은 축구와 풋살 플레이들을 눈에 담으며 공부하기로 했다.
유튜브를 켜고 '한국풋살연맹' 동영상을 훑었다. 마침 두 개의 리그가 진행 중이었다. 드림리그와 슈퍼리그. 아는 팀이 하나도 없어서, 연고가 있는 팀 위주로 살펴보았다. 드림리그에서는 거주해본 경험이 있는 고양FS의 경기를, 슈퍼리그에서는 지금 살고 있는 은평FS의 경기를 주로 관람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에이스들이 눈에 띄고, 이름을 알고 나니 경기가 좀더 흥미로워졌고, 각 선수들의 주특기도 보인다. 나중에는 응원하는 선수도 생겼다. 노원FS의 성원권 선수, 내가 많이 좋아한다.
프로 선수들의 플레이를 직접 보고 싶어서 서울 은평에서 제천까지 다녀왔다. 그리고 눈앞의 멋진 플레이들이 펼쳐지는 순간, 아끼는 선수들이 더 많이 생겨버렸다.
무엇보다 그들을 보며 분명한 것을 깨달았다. 슈퍼리그 마지막 경기인 경기LBFS와 구미FS의 경기에서였다. 경기LB 팀 선수들이 경기 전 단체사진을 찍을 때 부상으로 부재하는 다른 선수의 유니폼 등번호를 눈에 띄게 들고 찍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 구미 팀에서는 은퇴하는 백전 노장의 마지막을 치하하기 위해 플래카드와 함께 사진을 찍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니까 팀이라는 건 부상당한 선수를 유니폼으로나마 기려주고, 마지막 경기를 뛰는 동료의 '유종의 미'를 위해 박수를 쳐주는 것이구나. 저런 팀을 내가 만난다면 나이가 많다고 짐스러울까 봐 걱정하고, 나이가 적고 젊다고 예쁨받을 상황을 기대할 필요가 없겠구나. 그냥 나이도 상황도 실력도 다 잊고 동료라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치하하는 원팀, 그들은 실력뿐 아니라 태도도 프로였다.
경기LB 팀 에이스이자 주장인 신종훈 선수가 패스 미스로 공을 놓쳤을 때, 짜증 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리는 그에게 한 동료는 손뼉을 치며 그의 눈을 똑바로 보고 외쳤다. "괜찮아, 잘했어!" 흔들릴 뻔한 멘탈을 잡아주는 동료 덕에 그날 그는 기록될 만한 원더골을 성공시켰다.
새로운 팀에 들어간다면 그런 이들을 만나고 싶다. 나이도 학력도 실력도 다 무관하게 그저 서로에게 애써 친절한 팀. 누군가 무너지면 멘탈을 잡아주고, 부상 등의 어려움에 처한 이를 차분히 기다려주는 팀. 공이 발에만 맞아도 애써 "나이스!" 소리쳐주고 박수쳐주던 나의 첫 팀 친구들이 언젠가 내게 건네던 그 따뜻한 순간들을 다시 한 번 마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