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나시에 며칠을 머물고, 밤 기차에 올라탑니다. 기차가 향하는 곳은 마디야프라데쉬 주의 주도인 보팔입니다. 사실 보팔에 들르게 되면 이동 거리가 한참 늘어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인도 일정을 많이 줄인다고 줄였는데도, 보팔을 뺄 수는 없었습니다. 산치의 스투파만큼은 꼭 보고 싶었거든요.
아침이 밝고, 연착도 거의 없이 열차는 보팔 역에 도착했습니다. 보팔 역 짐 보관소에 무거운 배낭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한두 시간을 기다린 뒤, 다시 기차를 타고 저는 인근의 산치 역으로 향합니다.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 부처님의 시대까지 인도는 여러 도시 국가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인더스 문명과 아리아인의 남하, 전기 베다 시대와 후기 베다 시대까지 통일 왕조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었죠.
기원전 5세기에는 페르시아가 인도 북서부에 진출합니다. 기원전 3세기에는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 왕국이 인도와 접경했죠.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문화는 남아시아 문명에 새로운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 이후 탄생한 최초의 중앙집권적 통일 왕조가 바로 마우리아 왕조입니다.
마우리아 왕조는 기원전 4세기에서 2세기경 찬드라굽타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손자인 아쇼카 왕의 이름이 더 익숙하죠. 아쇼카는 마우리아 왕조의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영국령 인도 제국 이전에는 유일하게 남북 인도를 모두 통일한 국가로 칭해지기도 합니다. 물론 고대국가의 지배와 통일이라는 것은 근대국가의 방식과는 분명히 다르지만요.
다만 아쇼카 왕 시대 마우리아 왕조가 강성한 국가였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인도 아대륙 전체를 영향권에 두었습니다. 무역도 적극적으로 실시했죠. 땅으로는 헬레니즘 문화권을 비롯해 주변 지역과 교류했고, 바다로는 동남아시아와 무역에 나섰습니다.
물론 우리가 아쇼카 왕을 알고 있는 이유는, 단순히 그가 거대한 국가를 꾸렸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후일 불교에 귀의했다는 사실이 유명하죠. 불교에 귀의한 아쇼카 왕은 강제노역을 금지하거나, 빈민에게 곡식을 빌려주는 등 불교에 기반한 일종의 복지정책을 만들었습니다. 동남아시아나 스리랑카를 비롯한 주변 지역에 불교를 확산시키기도 했습니다.
그 흔적이 남은 것이 아쇼카 시대의 석주입니다. 아쇼카 왕은 인도 아대륙 전반에 돌로 기둥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석주에 고대 산스크리트어나 일부 그리스어, 아람어(Aramaic) 등으로 포고문을 새겼죠. 국가 정책에 관한 내용도 있고, 살생을 제한하는 등 불교적인 내용도 있습니다.
석주와 함께 아쇼카 왕이 남긴 유적이 바로 스투파(stupa)입니다. 스투파는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기념물을 말합니다. 이 '스투파'가 한자로 음차되어 솔탑파(率塔婆)가 되죠. 그리고 그걸 줄여서 우리가 알고 있는 '탑(塔)'이 됩니다. 그러니, 아쇼카 왕이 남긴 스투파는 지금 우리가 사찰에서 볼 수 있는 탑의 원형인 셈이죠.
아쇼카 왕은 아내인 데비(Devi)의 고향이었던 산치에 스투파를 만들었습니다. 물론 스투파 자체는 인도 전역에 많이 만들어졌지만, 현재까지 그 원형을 어느 정도 보존하고 있는 것은 산치의 스투파가 유일합니다. 인도 고대 건축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아주 희귀한 자료죠.
물론 산치의 스투파도 여러 고초를 겪었습니다. 아쇼카 왕은 50여 년을 집권한 뒤 사망했습니다. 긴 집권기간 탓에 이미 아들들은 사망하거나 승려가 되었고, 그 손자가 왕위를 이었죠. 하지만 이후 각종 반란과 지방 정권의 성장이 이어집니다.
이후 성립된 슝가 왕조는 불교 왕조가 아니었습니다. 덕분에 산치 스투파는 한동안 방치되고 파괴되었죠. 하지만 여전히 불교를 믿는 지방 세력들은 많았고, 여러 귀족이나 집단의 후원으로 산치 권역은 복원되고 증축됐습니다.
산치의 스투파는 거대한 제국의 유산이지만, 지금 산치는 작은 마을에 불과합니다. 보팔 역에서 한 시간이 채 되지 않는 기차 여행 끝에 산치 역에 내렸습니다. 역 앞에는 작은 식당과 매대 몇을 제외하면 아주 한적합니다. 시골길을 걸어 언덕을 오르면 곧 산치 스투파가 나타납니다.
산치 유적의 중앙에 위치한 스투파는 지금 봐도 거대합니다. 탑의 가장 위에는 존귀한 사람을 나타내는 양산(Chatra) 모양이 올라가 있죠. 이 형태가 확장되고, 후일 동아시아의 목조 건물 양식과 만나며 지금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탑의 모습이 만들어졌다고도 합니다.
탑의 사방으로는 토라나(Torana)라고 불리는 문이 있습니다. 이 토라나가 중국의 패루(牌樓)나 한국의 홍살문, 일본 토리이의 원형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만, 사원 앞에 문을 세우는 전통이나 그 형태 정도는 유래를 찾아볼 수도 있겠습니다.
산치 스투파의 토라나에는 여러 장면이 빼곡히 조각되어 있습니다. 부처의 탄생이나 설법과 같은 불교적인 도상이 많죠. 부처의 전생 이야기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인도의 전통적인 천녀 도상도 찾아볼 수 있고, 아쇼카 왕의 행렬을 그린 도상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많은 도상을 아무리 살펴봐도 부처님의 모습은 없습니다. 당시에는 부처의 모습을 표현하지 않았거든요. 미술사에서는 이것을 '무불상 시대'라고 부릅니다. 존귀한 사람은 오히려 형상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림에서는 존귀한 사람을 나타내는 양산이나 발자국, 보리수 나무의 모습으로 그 자리만을 표시합니다.
존귀한 사람을 그림에 표현하지 않는 것은 그리 이례적인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수니파 이슬람교에서는 무함마드의 모습을 그리지 않죠. 물론 이것은 우상숭배를 경계하는 의미도 있지만요. 한국에서도 왕의 모습을 가마 등으로 대체해 표현하거나, 아예 자리를 비워 두는 경우도 있죠.
인도에서 본격적으로 불상이 표현되는 것은 마우리아 왕조가 무너진 다음입니다. 곧 쿠샨 왕조를 비롯해 헬레니즘의 영향을 짙게 받은 왕조가 들어섰죠. 쿠샨 왕조는 애초에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다 흉노에 밀려온 월지(月支) 민족이 세운 국가이기도 하고요. 한나라의 장건이 실크로드를 개척하며 찾아온 세력이 바로 이 월지였습니다. 그 지배 영역도 지금의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더 가까웠습니다.
쿠샨 왕조는 헬레니즘 문화권을 비롯해 다른 문화권과 적극적으로 교류했습니다. 이들이 곧 불교를 받아들였고, 간다라 지역에서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죠. 물론 인도 아대륙 안에서도 마투라(Mathura)에서 자체적으로 불상을 만들기 시작했고요. 그제야 무불상 시대가 끝나고 불상 시대가 시작됩니다. 불교 탄생 이후 500여 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습니다.
산치 스투파가 있는 언덕 뒤편으로는 전원적인 풍경이 펼쳐져 있습니다. 제국의 화려한 풍경은 없습니다. 스투파 주변에는 원래 여러 스님들이 수행하던 승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승원들도 이제는 무너져 기단만이 남았습니다. 기단만 남은 승원 터는 이제 원숭이들의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스투파는 남았습니다. 2천년이 넘게 그 자리에 서서 남았습니다. 이 탑을 세우라 말한 왕도 이제는 없습니다. 벽돌을 올렸을 석공도 이제는 이름조차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탑만은 남아 여행자를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승원은 이제 없지만, 수행하던 승려들의 마음만은 남았습니다.
무불상 시대에 대해 처음 배웠을 때가 기억납니다. 교수님이 보여주신 슬라이드로 산치 스투파를 보면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 정도의 뛰어난 조각 능력을 가지고, 대체 불상을 만들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저는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표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원히 남을 수 있는 것도 있겠죠. 표현되지 않았을 뿐, 그곳에 있다는 걸 모두가 알 수 있는 것도 있는 법입니다. 꼭 불상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그들이 이 탑을 세웠을 마음도 표현되지 않은 불상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마음도 어디에도 표현되지 않았지만, 어디에나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겠죠. 표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탑의 벽돌 하나하나에 아마 영영 지워지지 않고 남을 수 있겠죠.
산치의 모습은 스투파가 세워졌을 2천년 전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넓게 펼쳐진 논밭과 그 사이를 유유히 지나가는 소 몇 마리. 하지만 그 풍경은 별로 황량해 보이지 않습니다. 높은 건물처럼 눈에 띄게 보이지는 않아도, 영원히 남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