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정권 이래 우리나라에서 크게 잘못된 과제의 하나는 국가의 서훈문제이다.
공적에 따라 엄정하게 주어져야 할 서훈질서가 권력자나 정권의 편의에 따라 이루어진 경우가 적지 않았다. 독립운동가 1등급에 이승만의 비서가 들어가고, 독립군에 총질을 한 일본군장교 출신이 높은 훈장을 받고 국립묘소에 누워있다. 심지어 친일경력자가 서훈의 심사를 맡기도 하였다.
김가진이 뛰어난 점은 그가 오류를 범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다. 그는 과감히 오류를 바로잡았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망국대신 김가진은 모든 것을 버리고 목숨을 걸고 망명을 하여 임시정부로 와 '민국의 신민(新民)'으로 거듭났다. 고종의 죽음과 삼일운동의 좌절 뒤에 마음 붙일 곳이 없던 대한제국의 신민(臣民)들을 대한민국의 신민(新民)이 되도록 이끌며 그 자신이 노구를 이끌고 몸소 모범을 보인 것이다.
그는 일부에서 오해하듯이 시대착오적인 복벽을 꿈꾼 것이 아니라 제국에서 민국으로 넘어가는 새 길을 앞장 서 달려간 대한민국 수립의 원훈이었다. 그런 그를 두고서 작위를 받은 적이 있다고 서훈을 주저한다는 것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일이다. (주석 5)
구한말 국난기에 다양한 인물이 다양한 층위에서 국난극복운동에 나섰다.
서재필과 민영환은 동농의 둘도 없는 친구였다. 서재필은 김옥균과 함께 갑신정변에 참여했다. 그 결과 가족이 몰살당하고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이후 서재필은 미국 시민이 되어 한국으로 돌아와 동농과 함께 독립협회를 만들어 활약했다.
민영환은 동농보다 연배는 아래였지만 직위는 높았다. 동농이 만일 군인이었다면 무장투쟁을 했을 것이고, 의분에 투철한 관료였다면 자결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동농은 외교관 출신이었다. 동농은 민영환이 자결하기 전 백운장에서 함께 대취하여 지은 시가 있다. "어떻게 하면 조선의 명백을 이을까"하는 친 고종 개화파의 고민이 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동농은 왜 이회영 형제들처럼 만주로 망명하지 않고, 민영환처럼 자결하지 않고, 또 조정구 처럼 작위를 반납하지 않고 3.1운동 직후 지하조직인 대동단의 총재가 됐을까? (주석 6)
김자동은 이후에도 여러차례 할아버지 서훈신청을 했으나 번번히 수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관변에서 흘러나온 괴이한 말을 듣게 되었다. 자신을 비롯 후손들의 반정부적인 전력 때문이라는 것이다.
동농은 왜 버림받고 있는 것일까? 독립운동을 하다 친일로 돌아선 인물들 조차도 독립유공자의 서훈을 너도나도 받은 마당에 동농만은 안된다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김자동씨는 "서훈을 내리지 않는 진짜 이유는 그동안 후손들이 보훈처 서훈심사의 문제점을 끊임없이 물고 늘어졌으며 또 반정부적인 활동을 한 전력이 있다는 게 진짜 이유일 것"이라고 의혹을 제기한다. 실제로 김씨는 4.19혁명 이후 반정부적인 신문인 <민족일보> 기자로 일했으며, 그 뒤로도 민간통일운동에 줄곧 참여해 정부쪽과 거북한 관계였다.
또 광복군 출신인 김씨의 사촌형 석동씨도 80년대 광복회에서 줄곧 친일파에게 서훈이 주어진 것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며, 보훈처와 끊임없이 충돌했다.
김씨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는 나라에서 임시정부 고문을 지낸 동농을 친일부역자로 모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동농에 대한 평가는 그때 끝난 것이 아닌가?"라고 되묻는다. (주석 7)
주석
5> 한홍구, 앞의 책, 131쪽.
6> 장명국, 앞의 책, 192~193쪽.
7> <한겨레21>, 1997년 8월 21일, 제171호, <버림받는 애국자, 김가진>.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