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수업을 듣고 있는 센터로 가는 길목에는 재래시장이 하나 있고, 길을 따라서 자그마한 노점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야채와 과일, 건어물은 물론이고 작은 꽃화분에 일바지와 때밀이 수건까지 노점상에서 파는 물건들도 참 다양하다. 집 주변에 장 볼 곳이 마땅치 않은 동네에 살다보니 일주일에 한 번씩 그 길을 지나갈 때마다 이것저것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두 달간 진행되었던 수업의 마지막날, 길 양옆으로 펼쳐져 있는 좌판들 사이에서 열무와 얼갈이가 눈에 들어왔다. 시어머니께서 담가주신 김장 김치가 반 통밖에 남지않아 새로 김치를 담가야 하는데 귀찮아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참이었다.
김치를 직접 담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김치를 담그는 일이 여간 손이 많이 가는 게 아니다. 김칫거리를 다듬고 씻고 절이고 버무리고, 거의 반나절을 부엌에서 동동 거려도 겨우 김치통 한 통이 채워질까 말까 하니, 김치 담그기는 집안일 중에서도 최고로 힘든 일이다. 더욱이 치킨을 배달시켜도 김치부터 꺼내는 남편과 살고 있는 나에게 김치는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이다.
계산 후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날도 그냥 지나쳤어야 했다. 나는 분명 안식년을 보내고 있고, 주부로서가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 먹었으니 일주일에 하루쯤은 집안일을 잊어버렸어야 했다. 그런데 채소더미 위에 커다랗게 써 있는 가격표를 보고 그만 발길을 멈추고 말았다.
'열무/얼갈이 1단 1,980원.'
전날 동네 대형마트에서 한단에 3980원 하는 열무를 만지작 거리다가 안 사고, 돌아오는 길에 청과물 가게에서 4000원이라는 가격을 듣고 마트에서 사지 않은 걸 후회하고 있던 참이었으니 '1980원'은 눈이 번쩍 뜨이는 가격이었다. 게다가 무척 연하고 싱싱해 보였다.
그래서 수업에 대한 소감을 나누고 정리하는 마지막 시간이었는데도 다른 사람들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수업시간 내내 머리 속으로는 집에 가는 길에 '살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센터에서 집까지 버스로는 한번에 갈 수 있고, 전철은 한 번 갈아타야 해서 더 오래 걸리는데 열무를 파는 곳은 전철역 근처에 있었다. 다시말해 열무를 사지 않을 거면 굳이 전철을 탈 이유가 없는 것이다.
동네에서 파는 열무 값의 반도 안 되는 착한 가격은 내 발길을 전철역으로 향하게 했고, 결국 열무 2단과 얼갈이 1단을 사고야 말았다. 계산을 마치고 김칫거리를 커다란 파란색 비닐봉투에 담는 순간 후회가 밀려왔다.
바퀴가 달린 캐리어 장바구니도 아니고 내용물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비닐봉투를 들고 전철을 타자니, 마치 내가 '돈 몇 푼을 아끼기 위해 멀리서 장을 봐서 이고지고 가는 억척스런 주부'라고 광고하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또 조금만 무리를 해도 허리가 아파 며칠씩 드러눕고는 하는데 무거운 짐을 들고 전철역의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니 몇 푼 아끼려다가 약값이 더 드는 건 아닐 지 걱정스러웠다.
가족과 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더라도
며칠 전 JTBC 드라마 <닥터 차정숙>에서 엄정화(차정화 역)가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가족들만을 위해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며 "이제 나 꼴리는대로 살겠다" 선언했던 장면에서 격하게 공감을 했던 나였다. 아내와 엄마의 수고는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자신들의 기분대로 타박만 하는 가족들에게 보란듯이 아침 준비를 거부하고, 시어머니 심부름으로만 만져보던 명품백을 자신의 몫으로 지르는 대목에서는 카타르시스까지 느꼈었다.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며 "이제부터 나도...!" 하고 굳게 다짐했었는데 꼴랑 '1980원'에 무너지고 말았으니 27년 동안 차곡차곡 쌓여온 주부근성은 이미 통제 불가능한 수준이 되어버린 듯하다. 전철 안에서 김칫거리가 담겨 있는 비닐봉투를 힐끗힐끗 쳐다보는 시선들이 신경 쓰였지만 무려 6000원이나 절약했다는 뿌듯함에 그런대로 참을 만했다.
집에 돌아와 열무와 얼갈이를 다듬고 씻고 절이고 양념에 버무려 김치를 담갔다. 김치대야 가득 산처럼 쌓여 있던 김칫거리가 담고나니 역시나 김치통 한 개도 제대로 채우지 못했다.
27년 동안 김치를 담그는 데 들였던 내 시간과 노력과 수고를 억울해 하며 급기야는 안식년까지 선언한 나인데... 집안일로부터의 해방을 부르짖고 있으면서도 며칠 뒤 식구들이 잘 익은 김치를 맛나게 먹을 생각에 속없이 미소가 지어졌다.
안식년에도 숨길 수 없는 나의 주부 본능! 올 일년을 나를 위해서 살다보면 깨끗이 지워질까? 가족들만 바라보며 살아온 내 인생에 대한 억울함과 여전히 내 손으로 만들어지는 가족들의 편안함과 행복 사이에서 나는 자꾸만 갈 길을 잃어버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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