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랑가바드 여행을 마친 뒤에는 장거리 버스를 타고 고아(Goa)로 향했습니다. 슬리핑 버스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니 어느새 버스는 고아 근처에 와 있습니다. 아침 8시, 벌써부터 더운 고아 주의 주도 파나지(Panaji)에 내렸습니다.
복잡한 버스 정류장을 벗어나 시내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골목의 풍경이 놀라웠습니다. 아침의 골목은 조용합니다. 건물들은 아름다운 파스텔톤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유럽식 건축물과 깨끗한 거리가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순간 이곳이 내가 알고 있던 인도가 맞나, 생각했습니다. 이제까지 여행하던 인도의 모습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남인도와 북인도의 풍경이 다르다는 것쯤은 상상했지만, 고아의 풍경은 다른 남인도 도시들과도 또 다른 느낌입니다.
사실 고아의 풍경은 인도의 다른 도시와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고아는 영국이 아닌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은 도시니까요.
포르투갈은 영국에 비해 더 이른 시기에 인도에 닿았습니다. 포르투갈은 동방 무역을 가장 먼저 개척한 국가 중 하나이니까요. 동방 무역로에 뛰어든 포르투갈은 16세기 초반부터 무역기지 건설에 나섰습니다. 포르투갈이 무력으로 고아를 차지하고 식민 정부를 건설한 것이 벌써 1510년의 일입니다.
포르투갈의 고아 지배는 오랜 기간 이어졌습니다. 1843년 전염병의 창궐로 수도를 올드 고아에서 지금의 파나지로 옮겼지만, 식민지배는 이어졌습니다. 영국이 인도를 장악하고 영국령 인도 제국을 만들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아를 비롯한 포르투갈의 영토는 그대로 남았습니다.
포르투갈의 지배는 영국의 지배보다 더 늦게 끝났습니다.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독립하며 영국의 지배는 끝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았죠. 포르투갈은 1974년 카네이션 혁명 이전까지 앙골라나 모잠비크를 비롯한 다른 식민지도 포기하지 않았으니까요.
포르투갈이 가진 인도 내 식민지는 인도 전체에 비하면 작은 크기였습니다. 고아가 그나마 큰 지역이었죠. 디우(Diu)를 비롯한 다른 포르투갈령을 합쳐도 4,000㎢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식민지배를 물리치고 새로운 국가를 세운 인도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식민지의 의미는 컸습니다.
결국 인도는 1961년 12월, 군사작전을 통해 고아를 병합합니다. 쇠락한 식민 제국이었던 포르투갈은 저항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다른 식민지에도 신경을 써야 했죠. 식민지를 위한 전쟁에 정당성도 없었습니다. 결국 수십 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고아와 포르투갈의 식민지는 인도에 병합됩니다.
고아는 인도의 특별행정구가 되었다가, 1987년 고아 주로 승격되었습니다. 고아도 이제는 특별할 것 없는, 인도를 구성하는 28개의 주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언급했듯 고아의 풍경은 인도의 다른 도시와는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남쪽으로 내려와 날씨는 더워졌습니다. 하지만 고아의 골목은 그 더위 속에서도 조금 더 걷고 싶은 마음을 내게 합니다.
인도 전통 복식을 입은 사람들이 종종 보이는 것을 제외하면 인도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풍경입니다. 고아의 카페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면, 긴 인도 여행에서 잠시 탈출한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고아는 해변 휴양지로 유명합니다. 저야 파나지 시내에 머물며 바닷가는 잠시 구경만 했을 뿐이었죠. 하지만 그럼에도, 여행자들이 고아를 찾는 이유만은 알 것 같았습니다. 인도를 여행하며 인도와 다른 풍경을 찾는다는 게 역설적이지만, 여행이 길게 이어지면 일탈을 찾게 되기 마련이지요.
역사는 그렇게 묘한 흔적을 남깁니다. 고아는 인도에 남은 최후의 식민지였습니다. 끝까지 되찾지 못해 전쟁과 무력을 동원해야 하는 땅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제국과 식민의 상처가 깊이 남아있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고아는 여행자들이 찾아오는 휴양지가 되었습니다.
사실 고아뿐 아니라 많은 도시의 역사가 그렇습니다. 빛바랜 흔적으로만 남은 식민의 도시가 관광지가 되고, 휴양지가 되는 경우를 아시아의 수많은 도시에서 이미 보았습니다. 사람들의 기억과 역사의 흔적이라는 것이, 그리 일방적인 형태로만은 남지 않는 것이죠.
인도 여행에는 음식의 제약이 많이 따릅니다. 힌두교의 영향으로 소고기를 먹기는 아주 어렵죠. 정책적으로 소고기 도축과 유통을 금지하는 주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돼지고기를 찾기도 어렵습니다. 도축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무슬림이기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해산물 역시 거의 먹지 않죠.
힌두교는 애초에 육식을 꺼려하는 탓에, 일부 보수적인 지역에서는 육식 요리 자체를 판매하지 않는 곳도 있습니다. 음주 역시 마찬가지죠. 허가를 받은 곳에서만 주류를 판매할 수 있고, 주세가 높은 탓에 술의 가격은 대부분 한국보다 비쌉니다.
하지만 고아는 그렇지 않습니다. 해산물과 돼지고기를 주력으로 하는 식당들이 많습니다. 식재료의 제약에서 자유로운 기독교인이 많다는 점이 영향을 미쳤겠죠. 주세도 낮아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싼 가격으로 인도의 술을 만날 수 있습니다.
고아의 대표적인 요리로 알려진 빈달루(Vindaloo)는 포르투갈의 전통 요리를 인도식으로 변형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돼지고기나 새우가 들어간 빈달루와 맥주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것은, 인도에서는 고아 정도에서만 가능한 일이겠죠.
포르투갈이라는 쇠락한 식민 제국은 인도의 한 해안 도시에 이런 묘한 흔적을 남겼습니다. 500년 가까이 이어진 식민지배는 인도의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풍경의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차별과 식민의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골목을 장식한 다양한 색의 건물도 그리 쉽게 빛바래 사라지지는 않겠죠. 역사는 그런 모순과 역설을 모두 한 곳에 품고 흘러가기 마련이니까요.
저는 그것을 흑과 백으로 단칼에 재단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 모두가 같은 도시의 같은 사람들에게 새겨진 양면의 역사일 테니까요. 다만 그 상처도 번영도 함께 이해하고 극복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지. 역사의 여러 얼굴을 모두 부정하지 않으면서 더 나은 역사를 미래에 물려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지. 그저 고민하게 될 뿐입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