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척 영민했던 그는 성장하면서 나라의 명운이 걸리는 일들을 목견하게 되었다. 그중의 하나가 18세 때인 1876년의 강화도조약이다. 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불리는 이 조약은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동시에 불평등조약이다. 한해 전 일본은 운요호사건을 핑계로 8척의 군함과 600명의 병력을 조선에 보내 무력으로 협상을 강요했다. 그리고 무능한 정부를 겁박해서 조약을 맺었다.
조약에서는 조선을 자주국으로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고 했으나 실제는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정해 침략을 쉽게 하려는 의도였다. 이 조약으로 부산 외에 두 항구(원산과 인천)을 개항하여 일본인의 통상활동과 개항장에서 일본인들의 거주가 허용되었으며, 조선 영해의 자유로운 측량을 허가함으로써 통상 교역의 경제적 목적을 넘어 정치·군사 면에서 거점이 마련되었다.
이후 일본은 조선을 야금야금 먹어 들어왔다. 일본 군함이 전국의 해안을 측량하고, 조정에서는 일본군 공병소위 호리모토 레이조를 훈련교관으로 초빙, 일본식 군복과 일본 총을 사용하는 별기군을 설치했다.(임오군란으로 1882년 폐지).
1882년 7월, 임오군란 때 본국으로 도망쳤던 일본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가 15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서울에 들어와 임오군란의 주모자 처단, 일본 피해자 유족과 부상자 배상 등을 요구하는 내용의 제물포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역시 불평등조약이었다.
일본과 청국이 조선이라는 먹잇감을 놓고 으르렁대고 있을 때, 고종과 민씨 척족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채 권력유지에만 정신을 팔고 있었다. 개화파들이 1884년 10월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청국군을 끌어들여 진압하고 권력을 유지했다. 이상룡은 28세가 되던 1886년 과거에 응시했다. 썩을대로 썩어가는 정부의 녹을 먹는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이제껏 닦은 학문과 꿈을 펴보이고, 관리사회의 한 가닥 청류를 만들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이미 합격자가 내정된 과거는 요식행위일 뿐이었다.
김구·이승만 등도 이때를 전후하여 과거에 나섰다가 줄줄이 낙방했다. 과거제의 부패는 유망한 청년들이 낙방으로 민족운동의 지도자가 되는 길이 되었다는 역설의 효과도 있었다고 할 것인가.
부패의 현장에서 패배의 쓴맛을 본 그는 크게 상심하여 쉽게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1년여 동안 발길 닿는대로 전국을 주유하며 사람들을 만나고 산천을 돌아봤다. 조국 강산 어디서나 백성들의 헐벗고 굶주린 모습은 한결 같았다.
1894년 정초 호남에서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했다. 그리고 곧 삼남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안동은 동학농민혁군의 활동이 거의 없었다. 영남만인소운동 등의 중심이었던 것과 비교된다.
안동지역에서 농민군의 활동이 두드러지지 못했던 이유로는 1871년의 이필제란(李弼齊亂)을 먼저 들 수 있다. 영해작변(寧海作變)이라고도 불린 이 난은 이필제의 주도로 영해에서 동학교단이 최초로 전개한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교조인 최제우가 죄 없이 사형되었다는 점을 인정받으려는 운동)이었다. 여기에 영해만이 아닌 인근 18개 지역의 동학조직이 총동원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안동의 교도들도 참여하였고, 이들 가운데 네 명은 잡혀 효수되거나 유배당하였다. 이필제란은 실패하였고, 300여 명에 이르는 교도와 농민들이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이는 초기 경상좌도지역의 동학조직을 부셔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사건이 다른 지역에서도 있었는데, 그 지역에서는 농민군이 크게 일어나기도 하여 안동지역과 대조가 된다. (주석 1)
동학혁명에는 한발 늦었지만 1894년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입하는 갑오변란이 일어나자 안동은 가장 먼저 갑오의병을 일으켰다. 공주 유생 서상철(徐相轍)이 제천에서 살다가 안동인들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을 시작했다. 이어서 1895년 8월 명성황후 살해사건이 일어나자 전개된 을미의병 역시 안동은 중심지가 되었다. 을미의병의 주도자 중에는 이상룡의 스승 김흥락도 들어 있었다.
안동 을미의병 발의자는 면우 곽종석(俛宇 郭鍾錫)·척암 김도화(拓菴 金道和)·서산 김흥락(西山 金興洛)·세산 유지호(洗山 柳止鎬) 등이 논의를 주도했고, 그 결과 안동의진 결성을 결의했다. 이들은 <안동통문>을 작성하여 각지에 발송하였다. 이것은 곽종석·김도화· 김흥락·권진연(權晉淵)·강육(姜錥) 등 다섯 사람의 이름으로 작성되었다.
그들은 통문에서 "……중전(中殿)을 바라보니 8월의 변고가 생겼으며, 금수의 무리가 금궁(禁宮)을 육박하여 심한 농간을 부리고 임금을 협박하여 영(令)이라 빙자하여 중외(中外)에 호령하고 속이고 있으며, 심지어 머리를 깎고 옷섶을 왼편으로 하는 야만스런 행동이 이미 임금의 주변에 가해졌습니다……여러분께서는 이 나라 백성 모두가 선현의 자손으로서 의리의 강론은 내력이 있고, 충분의 축적은 배설되지 않았으니, 각기 죽음을 맹세하고 몸소 앞장서서 주먹을 불끈 쥐고 용맹으로 떨쳐 나와 선왕의 법복과 부모의 유체를 보전할 것을 생각한다면, 어찌 위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무쪼록 힘써 주소서. 아! 이 몸이 한 번 죽으면 오히려 의로운 귀신이 될 것이나 이 머리는 한 번 깎이면 영원토록 오랑캐가 되는 것이니 각자 마음에 행세하여 대의를 붙잡기 바랍니다." (주석 2)
주석
1> 김희곤, <안동의 독립운동사>, 39~40쪽, 안동시, 1999.
2> 앞의 책, 58~59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암흑기의 선각 석주 이상룡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