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삶의 ‘흔적’이 쌓인 작은 공간조직이 인접한 그것과 섞이면서 골목과 마을이 되고, 이들이 모이고 쌓여 도시 공동체가 된다. 수려하고 과시적인 곳보다는, 삶이 꿈틀거리는 골목이 더 아름답다 믿는다. 이런 흔적이 많은 도시를 더 좋아한다. 우리 도시 곳곳에 남겨진 삶의 흔적을 찾아보려 한다. 그곳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기쁘게 만나보려 한다. [기자말] |
뭔가를 '만들어내는' 행위는 존중받아 마땅하다. 과정에 투입된 노동력이 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행위에도 쓰이는 표현은 제각각이다. 집은 짓는다고, 건물은 세운다고 한다. 누리며 삶을 꾸려가는 객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도시는 더 다양하다. 조성한다거나 건설했다거나 앉혔다, 세웠다 등의 표현이 상황에 맞게 적용된다. 정치·경제·문화·교육·산업이 집약적인 역량을 발휘하도록 형성된 공간인 까닭이다. 노동력이 창출해 낸 최고봉인 셈이다. 그러함에도 수십만이 살아갈 신도시를 기계에서 제품 찍듯 뚝딱 몇 년 만에 '만들어낸' 낯뜨거운 시절도 있었으니.
한강 제방 위로 난 자유로를 따라가다 보면, 오직 책을 펴내기 위해 조성된 이색적인 공간 하나를 만나게 된다. 출판단지라거나 출판도시라 부르는, 정식 명칭은 '파주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다. 오래된 인식으로 본다면 공업단지인 셈이다. 의구심이 앞선다. 이런 공간이 왜 이곳에 자리하게 되었을까. 더구나 경직된 우리 법이 정하는 테두리에서는 도시가 아니라니 그저 의아할 뿐이다. 왜 이런 현상이 빚어졌을까.
도시를 떠받치는 근간은 정보의 교환과 소비다. 이를 바탕으로 도시 활동이 이뤄진다. 정보의 매개체가 활자화한 문자이고 출판이다. 그렇다면 한 권의 책을 펴내는 과정은 어찌 표현해야 할까.
말이 있어 문자가 탄생했고, 문자로 인해 책이 탄생하였다. 책을 펴낸다는 건, 누군가의 생각이나 사상을 문자나 그림을 통해 널리 알리려는 의도된 행위다. 인간이 가진 원초적 행태라 할 수 있다.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라 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문자가 매개하는 최고의 경지다. 그렇다면 이 공간에도 문자향서권기가 서려 있을까.
출판도시의 꿈
1986년부터 몇 년간 저달러·저유가·저금리라는 이른바 3저 호황으로 우리 경제가 유례없는 활황을 맞는다. 군사 정권에겐 무척 행운이었다. 호황을 이룬 경제는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 급기야 부동산 시장을 자극하기 시작한다. 자고 나면 집값, 정확히 아파트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빈부격차는 물론 상대적 박탈감을 극대화하기에 이른다. 혹자는 폭동 일보 직전이라 평할 정도였다.
이의 해소책으로 1988년 9월 '200만 호 주택 건설계획'을 발표하면서 분당·일산·평촌·중동·산본이란 수도권 1기 신도시 계획이 구체화한다. 관건은 베드타운이 아닌 최소한의 자족 기능을 충족하는 신도시 건설 여부였다.
당시 출판은 어땠을까. 출판을 생산∼유통으로 단순화하면 생산은 출판사 및 인쇄와 제본으로, 유통은 총판 혹은 도매상으로 나눌 수 있다. 저술가를 예외로 하면, 생산 부문 최정점인 편집·기획자가 활동하는 출판사가 주로 서교동에 몰려 있었다. 제지산업이나 기계·부품회사 등이 관계되는 인쇄와 제본은 을지로에 몰려 있었다.
생산된 서적의 유통을 담당하는 총판 혹은 도매상은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한마디로 출판산업을 매개하고 구성하는 '생태계'가 서울이라는 거대도시 곳곳에서 각자도생하고 있었던 셈이다. 여기에 광고업계와 서평을 담당하는 신문 등 미디어가 한 축이었고, 이 기능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출판인들이 꾸린 단체가 있었다. 1989년 이들은 위원회를 꾸려 출판도시 건립을 꿈꾼다. 크게 서교동과 을지로에 이원화되어 있는 출판계 생산 부문을 한곳에 모으고, 별도 유통회사를 설립해 일원화한 생태계를 구축하고자 했다.
일산신도시가 대상지였다. 1990년 10월 263개 출판사를 포함 총 360개 사가 출판도시를 건설할 조합을 설립하여 70억 원 상당의 사업기금을 마련한다. 곧이어 중간 규모 유통회사 설립계획도 수립한다. 일산신도시 개발 주체인 한국토지개발공사와 입지에 대해 협의를 진행한다.
신도시 건설 근거 법률은 '택지개발촉진법'이다. 즉 주택건설용 택지를 조성하는 게 핵심이다. 출판을 당시엔 제조업으로 보았나 보다. 무척 인색한 인식이다. 이는 일산신도시 조성에 적용된 법률은 물론 200만 호 주택건설이란 측면에서 이질적 존재로 취급받는 계기가 된다.
조합은 일산신도시 동쪽 초입 업무지구 11만여 평에 출판도시를 구상한다. 하지만 토지개발공사는 택지 분양에 공개경쟁입찰이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는다. 면적에 대한 줄다리기에서부터 출판유통 업무용지 지정, 최종 분양가와 부지 배정 우선권 등에서 상당한 이견을 보인다. 조합과 토지개발공사 사이 크나큰 입장 차가 있었던 셈이다.
결국 일산신도시에 건립하려던 출판도시 계획은 수년간 노력에도 불구하고, 1994년 7월 무산되고 만다. 베드타운이 아닌 최소한의 자족 기능을 갖춘 신도시는 이로써 수포로 되고 말았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무척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자유로가 만들어낸 습지에
임진각이 종점인 자유로는 일산신도시와 통일전망대를 조성하면서 생겨난다. 큰물에 무너지곤 하던 한강 제방을 높이고 넓혀 직선화한 상부에 개설한 도로다. 자동차전용도로이자 지방도이며, 광역화한 베드타운 고양과 파주를 서울과 연계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자유로 개설로 하천이 한강, 임진강과 만나는 접점 곳곳에 습지가 생겨난다. 공유수면 매립과 비슷한 현상이 빚어진 셈이다. 일산신도시 입성이 무산된 출판 조합에, 토지개발공사는 문발리 습지를 후보지로 추천한다. 궁여지책이자 대체재인 셈이다.
1990년대 개발은 땅을 깡그리 밀어내고 형질을 변경시켜 부지를 조성하는 방식이었다. 큰 흐름에서 부지 면적을 최대한 확보하려는 전략이었다. 따라서 자유로가 만들어낸 습지와 개울도 곧 사라질 위기였다. 이 조치에 가장 먼저 환경단체가 반대하고 나선다. 당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던 천혜의 습지를 없애려는 시도에 대한 반발이었다.
환경단체 움직임이 나비효과를 일으킨다. 택지조성과 도시설계, 건축설계에 이들 의견과 주장이 한껏 반영된다. 비록 직선화시켰을망정 큰 물줄기는 살아남았고, 기왕 생겨난 습지를 보존하려는 시도가 이뤄진다.
문발리 습지에 자생하는 식물을 조경용으로 식재하고, 건축물 높이를 4층 이하로 규제한다는 조건이 관철되어 도시설계가 이뤄진다. 이 공간이 그나마 여타 신개발지에 비해 쾌적한 환경과 경관을 갖추게 된 첩경이다. 아울러 깡그리 밀어내던 기존 개발방식에 일대 충격을 가한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의 불행도 잉태된다. 이곳에 적용된 법률의 한계였다. 막연했거나 우매했거나 둘 중 하나다. 산업단지를 효율적(?)으로 조성하기 위해 제정된 '산업 입지 및 개발에 관한 법률'을 적용하는 우(愚)를 범한다. 출판은 여전히 제조업이었던 셈이다.
주무관청이 산업통상자원부가 아닌 문화체육관광부로 바뀐 걸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출판도시가 아닌 출판단지가 탄생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가 덧씌워진 셈이다. 이로써 주거와 상업 기능 입지에 한계를 보이게 된다.
출판생태계는?
이곳에 순환 체계를 이룬 일체화한 출판생태계가 꾸려졌는지는 의문이다. 2023년 현재 대형 출판사 몇은 서울로 되돌아갔고, 사옥은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다.
애초 조합이 중점을 두었던 유통기능은 오히려 퇴보하였다. 전반적인 출판 불황이 제1 요인이겠으나, 생태계가 순환 고리로 작동하지 못한 측면도 엿보인다. 몇 년 전 부도를 맞아 충격을 주었던 송인서적은 출판계 전체를 되돌아볼 계기였다. 그러함에도 큰 변화는 없었다.
인쇄와 제본 등 생산기능은 열악하기 그지없다. 산업단지인데도 말이다. 조합에 참여해 입주한 업체들이, 부동산 과실만 따 먹었다는 비판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대목이다. 더구나 출판계는 여전히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란 말에 갇혀, 역력한 한계를 보이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산업단지로 조성된 한계로 저녁이면 텅 비어버리는 공동화 현상도 빚어진다. 미약한 주거와 상업 기능 때문이다. 대도시 중심지에서나 보이는 공동화 현상이 외떨어진 이 공간에서 벌어진다.
공동화 현상은 도시 활동과 토지이용 효율을 떨어뜨리는 일등 공신이다. 공동화는 통상적으로 범죄를 유발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인근에 신도시가 세워짐으로써, 공동화 문제는 영영 해결 불가능한 상황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시작부터 적정한 주거와 상업 기능을 안배하였더라면 이 공간이 어찌 바뀌었을까.
집이나 도시처럼 책도 '짓는다'라는 표현이 적절해 보인다. 부디 이 공간에서 좋은 책이 많이 지어져 우리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동량으로 자리매김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