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왼쪽 사진) 안동독립운동기념관 게시 사진 중 압록강을 건너다가 일경의 건문을 당하고 있는 모습 (오른쪽) 이상룡 고택 임청각
(왼쪽 사진) 안동독립운동기념관 게시 사진 중 압록강을 건너다가 일경의 건문을 당하고 있는 모습 (오른쪽) 이상룡 고택 임청각 ⓒ 정만진
 
경술국치라는 미증유의 국난 속에서 이상룡은 단호했다.

많은 지식인과 민중들이 역사의 격변을 맞아 방향을 잡지 못한 채 우왕좌왕할 때 그는 추진해온 대로 해외 망명을 결행했다. 그동안 집안 일을 해온 머슴들을 모두 해방시키고 노비문서를 불태웠다. 그리고 가족들의 해외 이동과 정착에 소요될 비용을 위해 논밭과 집을 팔아 마련했다. 정치사회적으로 격변기이고 갑작스런 매매여서 제값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이상룡은 1911년 음력 1월 5일 새벽에 사묘(祠廟)에 절하고, 날이 저물 무렵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홀로 길을 나서, 추풍령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을 거쳐 1월 19일 신의주로 갔다. 이어서 1월 25일 가족이 신의주에 도착하였는데, 그 길에 이상룡의 막내동생 이봉희, 아들 이준형(1875~1942), 조카 이형국(1883~1931), 이운형(1892~1972), 이문형(1895~1945), 이인형(1909~1978), 손자 이병화(1906~1952) 및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이 동행하였다. 이틀 뒤 이들은 압록강을 건너고, 2월 7일에 횡도천(恒道川)에 도착하여, 먼저 도착해 있던 맏처남 김대락과 그의 아들 김형식을 만났다. (주석 2)

가솔 50여 명은 가족이 아닌 척 일행을 분산시켜 차디찬 겨울 밤 압록강을 건넜다. 무사히 검문을 통과한 것은 추운 계절인데다 초라한 행색이어서 일제의 국경경비대가 전혀 주목하지 않았다. 이상룡은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조국산천을 떠나면서 참담한 심경으로 시 한 수를 읊었다.  

 삭풍은 칼보다 날카로워 나의 살을 애는데
 살은 깎여도 오히려 참을 수 있고
 창자는 끊어져도 차라리 슬프지 않다.
 옥토 삼천리와 이천만 백성의 극락 같은 부모국이
 지금 누구의 차지가 되었는가.
 차라리 이 머리 잘릴지언정
 어찌 내 무릎을 꿇어 그들의 종이 될까보냐.
 집을 나선지 한 달이 못 되어 압록강 물을 건넜으니
 누가 나의 길을 더디게 할까 보냐
 나의 호연한 발걸음을. (이상룡, <서사록>)

무릎 꿇어 왜놈의 종이 되기를 거부한 이들 일가는 남부여대하고 멀고 험한 길 만주로 거처를 옮겼다. 의병운동에 참여했던 이상룡은 막강한 왜적과 싸우기 위해서는 의병수준을 뛰어넘는 조직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구축해야 한다는 일념 뿐이었다. 

이상룡의 행장에 쓰여 있는바 의병으로는 안된다는 '사고의 전환'은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 건설운동에 중대한 의미가 있다. 독립운동기지 건설론자들은 대개 현실적 힘을 중시하면서 장기적 전망에 서 있었기 때문에 이상룡과 비슷한 사고를 하였지만, 이상룡은 특히 더했다.

을미년 이래 안동 일대에서의 의병 활동과 의병장의 의식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고, 을사년 이후에는 수년 간 의병 투쟁에 깊숙이 개입한 바 있어서 그의 사고는 누구보다도 실천적 체험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체험은 압록강을 건넌 이후에도 그의 사고와 행동 양식에 강렬히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주석 3)

이상룡 일가는 10여 일 후 회인현 횡도천(恒道川)에 도착하였다. 그동안 만주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굶주리며 용케 전원이 무사했다. 앞의 인용문대로 횡도천에는 이상룡의 처남 김대락이 먼저 들어와 살고 있었다. 선발대 역할을 한 것이다. 

망명시 이상룡의 목적지는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였다. 유하현은 한국의 만포 대안인 집안현(輯安縣)에서 북쪽으로 가 통화현(通化縣)을 지나야 닿을 수 있는 지역이었다. 이상룡이 회인현에 있을 때 이미 신민회의 계획에 의해 이회영 일가와 이동녕 등이 유하현에 도착해 자리잡고 있었다. 이에 이상룡은 아들 준형에게 몇 명의 청년을 붙여 유하현에 가 거주할 집과 경작할 토지를 구하라고 보냈다. (주석 4)

신민회의 결정에 따라 이상룡 일가보다 먼저 이주해온 우당 이회영 일가 등이 들어오면서 예전과는 달리 많은 인력이 마차와 말을 이용한 것을 보고 일제의 앞잡이들이라고 오해하면서 청국관청이 나서 통제를 시작한 것이다. 결국 오해는 풀렸으나 이준형의 유하현 가는 길은 포기해야 했다. 

당초 목적지 유하현은 포기하고 횡도천에 짐을 풀었다. 마침 빈집이 있어서 세를 얻어 마치 수용소와 같은 집단생활을 하게 되었다. 나라 찾기 위한 망명길이 평탄할 리 없었지만, 혹한에 굶주리고 중국 토착민들의 텃세까지 겹쳐 곤경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젊은이들 사이에 불평불만이 나오고, 그럴 때마다 이상룡은 "나라를 잃고 이역만리 타국에 온 것은 구차하게 몸과 목숨을 보전하려는 것이 아니니 지금은 다소 곤란한 일이 닥쳐도 이를 이겨내야 한다."고 달래었다. 


주석
2> 안동독립운동기념관 편, <서사록>, <국역 석주유고> 하, 15~26쪽, 경인문화사, 2008.
3> 서중석,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45쪽, 역사비평사, 2001.
4> 채병국, 앞의 책, 98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암흑기의 선각 석주 이상룡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이상룡#석주이상룡평전#이상룡평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