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1884년 말 혈기방장한 젊은이들이 기도했던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혁명의 실패는 지옥문을 열었습니다. 오늘은 그 일단을 엿보겠습니다.
먼저 나의 신상에 관한 일입니다. 1884년 말 남도 여행에서 한양으로 살아돌아오자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란 눈으로 내가 살아돌아온 것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 사이에 내가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퍼졌던 모양입니다. 푸트 공사 부인은 내가 살해당했다는 취지로 일본에 편지를 쓰기까지 했더군요.
나는 겁이 덜컥 났죠. 그런 소문이 일본과 중국에 퍼졌을 것이고 미국 부모님의 귀에 들어갈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죠. 부모님이 비탄에 젖어 있을까 봐 나는 몹시 걱정이 되었죠. 1885년 1월 초에 부모님전 상서를 쓰면서 서두에 내가 살아 있으니 걱정 마시라고 밝혀야 했지요.
나는 더 이상 청계천 마을에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크고 텅빈 공사관을 홀로 지켜야했죠. 공사관의 물품들을 푸트공사가 가지고 떠나버린 데다가 청계천 마을의 내 집도 털렸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습니다. 대리 공사라는 허울을 썼지만 해군 소위의 봉급으로 먹고 입을 것도 없는 극빈에 시달렸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믿으시겠습니까?
외국인에 대한 의심과 적개심이 팽배하여 무장을 하고 경호원을 대동하지 않고는 외출할 수가 없었지요. 서양인들은 거의 다 조선 땅을 떠났습니다. 남아 있는 서양인은 손에 꼽을 수 있는데 영국인 둘, 나를 포함하여 미국인 셋, 그리고 세관에 근무하는 독일인이 세명이었습니다.
고종 임금과 조정은 일본이 앙갚음을 해올까 봐 전전긍긍하였습니다. 일반 백성들도 물론 불안감에 사로잡혔구요.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한 무리의 조선인들이 공사관으로 나를 찾아와서 흥분된 어조로 말하기를 왜놈들이 근처의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죽이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상황을 알아보니 정말 인근의 길거리에 흥분한 사람들이 몰려들어 여차하면 무슨 사단이 일어날 것만 같았습니다. 세 명의 왜병이 날카로운 닛뽄도로 짖는 개들을 내리친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나는 일본 관헌에게 연락하여 문제의 왜병들을 체포하도록 하였고 간신히 사태가 수습되었지요.
그러한 상황은 청나라로 하여금 조선을 더욱 옭죄게 하였고 조선인들로 하여금 청나라에 더욱 의존하게 만들었습니다. 때를 놓칠새라 청나라 조정은 1885년 1월 1일 2500명의 군대를 서울에 입성시켰지요. 이틀 후인 1월 3일 1000명의 일본군이 성문 밖에 주둔하였습니다, 성안의 청군과 성밖의 일본군이 대치하는 형국이 되었지요. 일본군과 충돌을 원치 않았던 청군은 일단 성밖으로 철수하였습니다.
청나라 사절은 조선애 대한 종주국 행세를 하였지만 일본은 청나라를 배제하고 조선에 14만불이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강압적으로 요구하였습니다. 일본은 배상이 문제가 아니라 조선에 올가미를 씌울 호기라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한 외우내환의 국난 속에서 이를 드러내고 발톱을 세우는 세력이 있었으니 조선의 친청사대수구파였습니다. 그들은 청나라를 등에 업고 아니 청나라의 충직한 종이 되어 진보파 숙청에 올인하였습니다. 몰락해 가는 조국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나의 친구 서광범은 역적이 되었고 조선 땅을 떠났습니다.
그의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조카 하나가 1885년 1월 현재 산속에 숨어 있는데 나는 양심과 의리상 그들을 살리기 위해 극비리에 돕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만일 발각되면 무슨 재앙이 닥칠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시달리면서. 나는 짐짓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예전처럼 외출을 자주하고 돌아다니는 일상을 이어갔지요. 무장을 한 채.
자발적으로 빠져든 이 끔찍한 상황을 나는 탈출하고 싶었습니다. 그부모님에게 이렇게 고백했지요.
"만일 부모님이 조선의 이 끔찍한 상황을 알게 되면 저의 삶을 얼마나 기괴하게 여기실까 하는 생각을 이런 편지를 쓸 때 비로소 깨닫게됩니다. 저는 조선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보았는데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앉아서 그 전모를 써보려고 하면 그만 막연해지고 만답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저는 나중에 필히 방대한 조선 견문록을 쓸 겁니다, 꼭. 머리를 쉬기 위해 한두 달 나가사키에 가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요즈음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 제 정신이 어떻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랍니다. 이곳에 얼마나 오랫동안 머무를 지는 모르겠습니다. 사태가 심각해지면 떠나야겠지요." - 1855년 1월 18일자 편지에서
조선의 친청사대수구파들이 일으킨 피바람은 지옥의 광경을 연출했습니다. 그들은 마구잡이로 사람을 잡아들여 고문하고 처형했습니다. 때로는 금품을 갈취하기 위해 무고한 사람을 체포했습니다. 1월 28일 나는 잘린 머리 여섯구가 거리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어서 다음날에는 다섯구가 더 걸렸습니다.
3일 동안 걸려 있는 머리를 사람들이 눈을 흘끔거리며 엿보더군요. 감옥에서는 고문에 못이겨 열두 명이 죽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갑신정변 연루자들의 하인이나 종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정변과 무슨 상관이 있었겠습니까?
2월 3일 수구파들은 정변 연루자 부인들의 목을 베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에 몹시 흥분한 나는 위험천만한 일에 끼어들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서광범의 친구가 은밀히 날 찾아 왔습니다. 독약을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나는 여인네들이 체포되어 고문, 살해 당하기 전에 삼킬 수 있는 충분한 양의 약을 건네주었습니다. 약 이름은 morphia와 laudanum. 나는 부모님께 이렇게 썼습니다.
"이러한 야만속에 내던져져 있는 저에 대해 부모님은 어떤 마음이실까요? 저의 정신 적인 고통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으실 겁니다. 아직 여인네들의 처형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듣기로는 고종 임금이 수구파들의 만행을 막았다고 합니다. 고종은 그런 위인입니다. 인간적이고 심성이 선량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나 아, 지구상의 오물인 청나라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무력한 군주일 뿐입니다. 만일 고종이 수구파의 만행에 결연히 맞선다면 수구파들은 그를 제거하려 할 겁니다." - 1885. 2월 5일자 편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