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임(難妊) 부부의 이야기를 다룬 김금숙의 그래픽 노블 신작 <내일은 또 다른 날>(2023)이 딸기책방에서 최근 출간되었다. 일부의 독자들은 책에 실리는 이야기라고 하면 무엇인가 특별한 사연이나 공감대를 기대할 수 있겠다. 그런데 김금숙의 이번 텍스트는 자연스러운 임신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니 이 주제가 이야기가 될 수 있는지 의아해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쉽고 당연할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절박하고 애절한 것이 아이 갖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이나 뉴스 기사에 올라오는 것처럼 너무나 흔한 소식일 수 있으나, 아무리 노력해도 닿지 못하는 손길처럼 희망은 있되 희망하기 힘든 것이기도 하다. 이런 희망이라면 당사자들은 얼마나 힘들까.
<풀>, <기다림>, <지슬>을 통해 다수의 국제만화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그래픽노블 작가로 알려진 김금숙의 신작 <내일은 또 다른 날>은 이런 마음을 개인의 경험을 통해 그린다.
아이를 갖고 싶은 젊은 부부
등장인물인 '바다'와 '산'은 그림작가와 시간강사를 하며 즐겁게 근근이 삶을 살아가는 삼십 대의 젊은(?) 부부이다. 그런데 이들에겐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 이 아킬레스 건이 부부를 혼란 속으로 밀어 넣는다. 하지만 이들을 어렵게 만든 것은 주변의 시선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까운 지인들이 그들을 더 힘들게 했다.
손주 자랑을 주변에 하기 위해 임신을 재촉하는 시엄마, 아빠가 되어야만 어른이 될 수 있다고 믿은 어리석은 친구들, 개인적인 사정으로 애를 갖지 않(못)겠다는 사람들을 '페미니즘'으로 치부해 버리는 친구들, 형부와 시댁의 강요로 여러 번 유산을 거친 후, 목숨 걸고 아이를 낳은 언니의 사연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사랑도 나무도 다 때가 있다며 아이를 가져야 한다고 강요하는 친정엄마는 이들 부부를 위태롭게 한다.
하지만 아이를 누구보다 갖고 싶은 것은 이들 부부였다. 이들이 남들과 다른 것이 있다면 조금 느렸을 뿐이다. 낯설고 두려운 시험관 수술을 감행한 것도 그런 이유이고, 깊이 잠 드는 성격으로 인해 남편 산이 코고는지도 몰랐던 바다가 자연 임신을 했을 때, 설레며 남편의 코 고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것도 아이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담아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시험관 수술은 잘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살아가다 운 좋게 자연 임신이 되기도 했지만, 이런 행운마저도 이들 부부에게는 따라주지 않았다. 어느 순간 갑자기 태아의 심장이 멈추었던 것이다. 안타깝지만 '바다'와 '산'은 앞으로 '편견'과 '혐오'에 둘러싸인 채 힘겨운 삶을 살아가야 할 운명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젊은 부부는 이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
작가의 의도가 숨어 있는 만화적 연출
김금숙 작가는 고통받는 난임 부부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를 통렬히 비판한다. <내일은 또 다른 날>은 한 개인의 이야기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한 젊은 난임 부부의 애절한 사연을 통해 사회의 잘못된 잣대를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도 출생률이 전 세계적으로 저조한 대한민국에선 앞서 서술된 편견과 혐오가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회는 앞으로 개인의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아이 낳을 것을 어떤 방식이든지 강요할 확률이 높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텍스트가 안고 있는 문제제기는 의미 있다.
앞서 간략하게 적었지만 줄거리를 탐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김금숙의 작품을 만화적으로 읽으면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보다 더 진득하게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칸과 칸으로 이뤄져 있는 만화의 형식에 최선을 다하려는 아티스트의 노력을 확인하다 보면 더 진득하게 작가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게 된다.
그러니 독자들은 그림과 말풍선으로 이뤄진 '형식'을 손쉽게 넘겨 보기보다는 작가가 무슨 이유로 칸을 허물었는지, 한 페이지나 두 페이지를 한 컷으로 운영해 담아내려고 했는지, 선택한 장면을 강조하기 위해 어떤 연출을 선보였는지에 대해 작가의 의도를 생각해 보면 만화 읽기의 즐거움을 탐닉할 수 있다. 그럴 때 그래픽 노블은 좀 더 진정성 있게 독자들에게 다가온다. 같은 내용이지만 깊이를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아이를 너무나 갖고 싶지만 품을 수 없는 답답한 심정을 말풍선과 칸의 미학으로 펼쳐 보이는 작가의 '의도'를 만나게 될 때면 섬뜩 놀라기도 한다. 마치 작가가 직접 경험한 흔적을 선과 그림과 칸으로 이야기하듯 말하고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느 신문사 인터뷰에서 자신의 경험을 일부 반영했다는 김금숙의 목소리를 읽고선 이러한 특징이 그때서야 수긍이 가기도 했다. 자신이 직접 겪은 경험처럼 진정성 있는 고백은 없으니까. 진정성 있는 연출과 관련해 한 장면만 꼽아보자면 아무래도 주인공 '바다'가 병원에서 시험관 수술을 받게 되는 과정일 것이다. 수술을 받기 위해 방문한 병원에서 바다는 자신과 닮은 표정들을 응시한다.
예약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기다림은 길었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걸까? 문득 앞에 있는 여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했다. 우리는 모두 다르게 생겼는데…나이도 다르고, 사는 곳도 다른데…묘하게 닮았다. 마치 거울 속의 나를 보는 것처럼. 당신들도 나처럼 시험관 시술을 하러 왔구나. 남편 없이 온 걸 보니 과배란 주사를 맞으러 왔는가? 머지않아 이 중에 누구는 웃고 누구는 눈물 흘리겠지…나는 어떻게 될까? 노력해서 되는 일이면 좋겠다.(91~92쪽.)
결과론적이지만 바다는 눈물을 쏟는다. 작가는 이 장면에서 통상적으로 쓰이는 '칸'을 허물고 병원에서 고개 숙인 표정들을 담아낸다. 이 장면을 응시하고 있으면 '나'와 가깝거나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왜 그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것일까.
수술대에 누워있을 때, 집도(執刀)하는 자들이 누워있는 '바다'의 애절한 사연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너무나도 현실적이기도 하다. 수술을 받아본 사람은 안다. 수술 의사들에게는 '수술' 하는 행위가 특별하지 않게 다가오기도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들에게는 일상인 것이다. 그러니 '바다'의 입장에서는 '나'의 존재가 위축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회상(回想)은 바다의 심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개구리 해부 수업이 있었다. 열 명씩 한 조가 되었다. 사지를 벌린 채 죽은 개구리를 보고 몇몇 아이들이 킥킥거렸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그 작은 몸의 배를 가르라고 했다. 아이들이 끝이 날카로운 가위로 개구리를 찌르기 시작했다. 내가 그 기억을 떠올릴 때 간호사가 내 손등의 정맥을 찾지 못해 몇 번씩 주사바늘로 찔러댔다.(95쪽.)
이런 장면 이후 펼쳐지는 칸들은 칸과 칸을 허물며 바다의 심리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동시에 작가가 이 주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게 된다. 시험관 수술 전 바다가 어떤 다짐을 했었는지, 얼마나 초조해 했었는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지에 대한 감정을 나누다 보면 마음이 흔들린다. 따라서 이런 연출을 셈하며 텍스트를 읽을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작가의 의도는 나의 의도로 전염된다. 더 나아가 이런 전염은 우리 사회의 편견을 바꿔 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아이 없는 삶도 괜찮다
김금숙 작가는 이 작품에서 임신하기 힘든 한 여성(바다)의 삶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래서 이 작품을 읽는 여성 독자들은 깊이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여성의 입장에만 이 이야기를 서술하진 않았다. '바다'를 사랑하는 '산'의 입장을 적어 주었다. 분량은 적었지만 아니 적을 수밖에 없었지만, 아이를 바라는 것이 '이기심'일 수도 있다는 '산'의 입장을 적음으로써 진정한 '사랑'과 행복이 무엇인지 묻는다.
다행인 것은 김금숙 작가가 에필로그를 통해, '바다'의 미래가 나쁘지 않다고 그림으로 남긴 것이다. 이 마지막 칸들은 비극적(?)으로 보이는 서사가 꼭 정답일 수는 없음을 증명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골에서 작은 책방을 운영하는 바다는 말한다.
아이 있는 삶을 겪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아이 없는 삶도 괜찮다.
외롭지만 자유가 좋다.(224쪽.)
그렇다.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 사회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은 사회의 잘못된 잣대에 대해 질문한다.
사회가 정한 잣대는 정말로 누구를 위한 잣대인가. 지금 이 시점에서 '잣대'는 얼마나 유효한가. '나'와 '당신'을 위한 잣대인가. 아니면 어느 한 사회의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만들어낸 잣대인가. 혹은 단순히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한 잣대인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김금숙의 <내일은 또 다른 날>은 이 작업을 이행한다. 사회적 편견과 맞서 싸우는 독자들에게 이 텍스트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