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9일 토요일 오후 6시 34분 경찰에 첫 신고가 들어왔다. "압사당할 거 같다." 공권력이 제대로 대응만 했다면 159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이태원 참사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 <오마이뉴스>는 매주 토요일 오후 6시 34분 이태원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태원 참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편집자말] |
"어! 세은 시(時)다!"
11시 27분이면 세은은 항상 이렇게 외쳤다. 2001년 11월 27일 태어난 막내딸. 자기가 태어난 날을 '세은 시'로 명명하고 때마다 매번 공지하며 가족들에게 웃음을 안겼다. 가족들은 이제 11시 27분이 되면, 버릇처럼 '세은 시'를 외치던 딸을 떠올린다. 때마다 집안은 잠시 고요한 적막에 잠기곤 한다.
아빠 옆에서 언제나 큰 'V'자 그리던 딸
이태원참사 희생자인 고 진세은씨는 "집안의 웃음 포인트"였다. 아빠와 언니가 투탁이다 서로 뚱한 채 있으면, 그 잠시간의 어색한 적막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아빠, 쏘주 콜? 엄마한테 허락 맡을까?" 결국 모두를 다시 웃게 만들곤 했다. 아기일 땐 '엄마 껌딱지' 울보였지만, 자라선 웃는 얼굴만 보여준 '가족바라기'였다.
"세은이는 집에서 그런 존재였어요. 가족끼리 여행을 많이 다녔는데, 차 뒷좌석에 있으면 잠을 잘 수도 있잖아요? 혼자서 끝까지 버텨요. 아빠한테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거예요. (운전하는) 아빠 심심할까 봐."
진세은씨 아버지 진정호(51)씨는 지난 5월 17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세은씨의 생전 모습들을 떠올리다 이따금 딸의 생글생글한 말투를 따라하며 웃어보였다. "헤헤, 고기 먹으러 가자!" 대학 3학년이 되며 진로를 고민하던 딸은, 잠시 깊이 고민하다가도 이내 낙천적인 모습으로 가족들 앞에 섰다.
참사가 발생하기 직전인 지난해 10월 초, 아빠의 생일을 맞아 가족끼리 강릉 여행을 떠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빠가 가족들을 앞세우고 뒤따라 걷고 있으면, 꼭 쫓아와 '같이 가자'고 손을 잡던 딸이었다. "한강 지나간다! 아빠 사진 찍어, 찍어" 아빠의 출근길과 같은 지하철 노선을 타고 함께 등교하던 딸. 정호씨가 꺼낸 사진들 속 세은씨는 언제나 아빠의 어깨에 폭 기대어 큰 'V'자를 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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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원 참사 고 진세은씨 유가족, “사후세계가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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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성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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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냥 막내 같지만도 않았다. "엄마 화났어, 빨리 들어와" "아빠 거기로 택시 보내줄까?" 회식 술자리 때문에 아빠의 귀가가 늦어지면 오후 10시쯤 딸의 애정 가득한 귀가 알림이 날아들곤 했다. 아빠 기억에, 세은이는 '다른 이가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을 많이 해주는'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자신을 제외한 온 가족이 코로나19에 확진된 지난 추석 명절 때는 혼자 시골 본가까지 기차를 타고 내려가 집안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겠다고 해 모두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세은씨는 일명 '코로나 학번'으로 캠퍼스 생활을 맘껏 누리지 못했다. 코로나19가 한풀 꺾여 가던 지난해는 달랐다. 한참 놀기 좋은 나이, 세은씨는 연년생 언니와 함께 지난해 말 유럽 여행을 갈 준비도 모두 마친 뒤였다. 각자 방이 있으면서도 함께 자는 걸 좋아했던 자매. 여느 때보다 설렘으로 가득했던 가을날이었다.
밤 11시까지 도넛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여행자금도 차곡차곡 모았다. 그러나 여행 출발일이 세은이의 49재가 됐다. 여행을 함께 떠나기로 했던 언니는 부모님 곁에서 함께 세은을 보냈다. 그 즈음 결혼기념일인 정호씨 부부에게 선물 하나가 도착했다. 세은씨가 기념일에 맞춰 배송되도록 주문해 놓은 피부 관리 화장품들이었다. 정호씨는 "아직 못 바르고 있다"고 했다.
순식간에 모인 지정 헌혈... 세은이의 마지막 길, 함께 해준 사람들
지난해 10월 29일 참사 당일에도 세은씨는 모처럼 밖에서 친구를 만나고 있었다. 외삼촌들에게도 "3년 동안 못 놀다가 이제 놀 수 있다"며 이태원 이야기를 신나게 했다던 딸. 단짝 친구와 당시 제일 좋아했던 음식인 마라탕을 함께 먹고, 식당을 나섰다. 영수증에 찍힌 시각은 오후 10시 5분쯤. 그리고 3시간 여 뒤인 10월 30일 새벽 1시 30분께,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아이가 이태원에 있다가 병원에 실려 왔습니다."
세은씨는 병원 이송 당시 엄마의 전화번호와 이름을 이야기할 정도로 의식이 있었다. "세은아 괜찮아?" 하는 소리에 고개도 끄덕였다. 가족들은 중환자실로 올라가는 딸을 보며 그래도 생각했다. "깨어날 수 있을 거야" 정호씨는 이틀밤을 샜다. 하느님, 부처님, 돌아가신 아버지까지 찾으며 무조건 기도했다. "한두 시간 넘기기 힘들 것 같다"는 의료진의 말에 낙담하다가도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세은씨는 4번의 수술을 버텨냈지만, 11월 1일 오전 9시께, 결국 세상을 떠났다.
아빠는 세은씨를 보내며 맞닥뜨린 수많은 일 중에서, 감사한 기억을 먼저 떠올렸다. '부모 입장에서 지금 할 수 있는 게 뭐냐'고 물었을 때, 의사는 혈소판 수혈을 위한 지정헌혈이 있으면 지혈을 위한 수술을 할 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세은씨의 언니가 SNS를 통해 동생의 상황과 헌혈을 요청하는 글을 올린 지 5분여, 삽시간에 많은 시민들의 참여가 이어졌다.
"몇 백 분 이상 해주셨다고 들었어요. 세은이가 떠날 때 장례식장에 한 낯선 어르신이 오셔서 '어떻게 오셨나' 여쭈어보니 세은이를 알지는 못하는데 그 SNS를 보셨다고, 그래서 헌혈을 하셨는데 아이가 떠났다는 이야기를 뉴스에서 듣고 한 번 와 보고 싶었다고. 그렇게 시민 분들이 연결, 연결되어 주셨어요. 세은이는 결국 (헌혈들을) 쓰지 못했지만, 그분들께 꼭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마지막까지 세은씨의 치료를 위해 밤을 새며 최선을 다한 담당 의사 선생님에게도 "너무 감사하다"고 했다. 중환자실에 들어간 세은씨에게 가족들은 의료진이 건넨 휴대전화를 받아들고 "우리 여기 있어, 힘내" 등 응원을 녹음해 전했다. 의료진의 '세은이가 고개를 끄덕이더라' 소리에 안도한 짧은 날들. 의사로부터 "아이가 버티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그러나 11월 1일 새벽 2시부터 찾아온 심장마비. 마지막 인사를 위해 세은씨 곁에 가족들이 섰다. 숨을 거두기 전까지, 3시간이 허락됐다. "사랑했어 세은아", "우리 딸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오열하며 인사를 전하는 가족들에게 세은은 한줄기 눈물을 떨구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황망한 소식이 또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이태원을 갔던 세은의 단짝, 유연주씨의 안부를 다른 친구들에게 묻곤 했던 가족들은 정확한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런데 세은이의 빈소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친구 연주의 소식을 듣게 됐다.
"병원에서 장례식장 호실을 하나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선택하고 준비하며 있었는데, 그날 검은 상복을 입은 분이 들어오시더라고요. 연주 아버님이셨어요. 연주가 11월 1일 오전 6시 발인으로 이 호실에서 떠났다고. 그때 연주가 갔다는 걸 알았어요. 그 호실을 제가 선택한 거예요. 아 우리 세은이 연주랑 같이 갔구나... 싶더라고요."
딸이 떠난 뒤, 아빠는 시민분향소를 들를 때마다 딸에게 편지를 쓴다. 딸의 친구인 연주 생일날에는 연주에게도 자신의 휴대전화 메모장에 편지를 남겼다.
"사랑하는 연주야, 생일 축하해. 세은이랑 잘 지내고 있지? 꼭 다시 만나자."
아빠의 메모장에는 이렇게 하늘로 보낸 편지들이 가득했다.
아빠의 결심
아빠는 딸이 떠난 이후 '왜 이렇게 말랐냐' 소리를 자주 들었다. 농담으로 "이 상황에서 찌면 이상하죠" 하고 넘기곤 했다. 경찰에서 알려준 트라우마 치료 지원을 신청해 봤지만, 여섯 차례 통화하며 '유가족 증명'을 해야 했을 때는 마음의 병이 더 쌓이는 것만 같았다. 이후 한 시민단체에서 지원하는 심리 상담을 받으면서 차츰 안정을 찾았다.
처음에는 괜히 가족들 마음 다칠까 걱정 돼 카메라 앞에는 잘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아빠는 가족들과 상의 끝에, 세은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참사의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해 목소리를 내기로 결심했다.
"이제는 알려야겠어요." 인터뷰에 응한 이유를 묻는 말에 돌아온 답변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아빠는 참사 당일과 그 이후 벌어진 국가기관의 면면들을 보며, "이게 대한민국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고 했다.
"(112) 사고 신고가 70 몇 건이 넘었다잖아요(참사 당일 오후 6시부터 4시간가량 이태원 일대의 신고 건수는 총 79건이었다-기자 말). 그 때 뭘 했으며... 누군가 하나 가서 제대로 봤다면... 비상긴급문자도, 압사 위험이 있으면 오후 6시, 아니 10시가 됐든... 그때 문자 하나라도 보냈다면. (세은이가) 오후 10시 5분 마지막으로 카드 결제한 기록이 있어요. 겁이 많은 아이예요. 그런 위험이 있다고 하면 움직이지도 않을 애였고..."
진씨는 사회적 참사를 겪고 대응 매뉴얼까지 갖췄던 국가 기관의 시스템이 "왜 교육도 안 되고, 이런 식으로 처리됐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평소 사회 문제에 관심을 두고 아이들과 함께 여러 집회 현장도 가봤지만, 사회적 재난 문제만큼은 '그래도 정리가 됐겠지' 생각했다.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누구 하나 나와서 잘못했습니다, 무릎 꿇고 사과하는 사람도 없고, 기록 지웠다고 죄송하다 말도 한 번 안 하고... 유가족들이 모여서 '이런 법 필요 합니다, 만나주십시오' 요청해도 만나주지도 않고. 이게 현실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고 했다.
그럼에도 아빠는 무너질 수가 없다. 녹사평역 시민분향소에서 2차 가해를 저지르며 악다구니를 쓰는 일부 유튜버들에게 대화도 시도해봤다. 그러나 이내 깨달았다. "우릴 욕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대화를 통해 풀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일부 모진 소리를 쏟아내는 인터넷 뉴스 아래 댓글도 다 읽어본다고 했다. 이를 꽉 깨물고.
"전 원래 제 몸 관리를 잘 안 했어요. 술 담배도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그 이후로, 몸 관리라는 걸 하기 시작했어요. 술도 줄이고 약도 챙겨먹고." 정호씨는 "오래 오래 살아서" 이 모든 참상의 결말을 보고 싶다고 했다.
"혼자 아니다" 느끼는 이유
같은 슬픔을 공유하는 유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면, 어느 때보다 힘을 받는다. 농담을 하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같이 대화가 되고, 이야기가 된다는 게 정말 힘이 많이 된다"고 했다. 분향소를 찾는 시민들의 말 없는 지지와 응원에 가슴이 뭉클해질 때도 많다고 했다. 대전지역 유가족협의회 대표를 맡은 세은이 고모와 싱어송라이터로 집회 현장에서 추모곡을 부르는 조카 예람이까지. 친척들도 함께 힘을 모았다.
"아무 말씀 안 하시고, 인사 한 번 하시더니 손을 이렇게 잡아주시는데... 그 느낌이라는 게 있잖아요. 제 손이 이렇게 있으면 국화꽃을 포개서 손을 잡아 주시는데, 정말 따뜻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정말 혼자가 아니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아빠는 진상규명을 외치는 길 위에 다시 선다.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며 맞닥뜨린 외면에 답답함을 느끼기도 한다.
한 국민의힘 의원에게 유가족 어머니가 이태원참사특별법 제정 동참을 요청하며 한 말도 떠올렸다. '여러분 자식들은 위험한 나라에 살지 않게 하도록, 우리가 열심히 유가족으로서 한 번 해보겠다'는 말.
"대화를 하자는 겁니다. 국회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다가 다치기도 하고, 병원에 가신 분도 있고 한데... 우리는 폭력을 쓰지 않았습니다. 합법 시위만 하고 있어요. 그런데 왜 자꾸 우릴 밀어내려고만 하시는지..."
아빠의 휴대전화 케이스가 더러워지면 세은씨는 잊지 않고 새 케이스를 선물했다. 참사 이후 낡고 닳은 케이스를 아빠는 아직 바꾸지 못하고 있다. 시골집 옆 밭에서 수영장을 만들고 아내와 세은, 셋이 물놀이를 하며 삼겹살을 구워먹던 어느 여름 날. 면허를 갓 딴 딸은 기분 좋게 취한 엄마, 아빠를 태우고 시골길을 달려 에스코트했다. 주말마다 차를 몰고 시골로 갔던 일상. 뒷좌석 세은이의 빈 자리가 헛헛해 이제는 쉽지만은 않다고 했다. 종교가 없었다는 아빠는 이제 "사후세계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아래는 정호씨가 딸 세은에게 남긴 메시지를 정리해 옮긴 것이다.
[아빠가 세은에게]
"사후세계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꼭 다시 만났으면 좋겠어.
아빠가 세은이한테 갈 때까지 언니, 동생들이랑 재밌게 놀고 있어! 아빠는 좀 천천히 가야할 것 같아. 언니랑 엄마랑 조금만 놀다 갈 테니까 조금 기다리고 있어줘.
꼭 다시 만날 때까지... 여기에서처럼 행복하게 살고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