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원고료가 100만 원을 돌파했다. 띄엄띄엄 기사 13건 올리고 100만 원을 벌었다. 야호!
깊은 밤 이불 뒤집어쓰고 연애소설 읽으며 가슴 벅차하던 10대 시절을 관통하여, 열아홉 살에 처음 읽은 <토지>를 스물아홉, 서른아홉에도 다시 읽고 "내 인생 책이야!"를 외치며, 그렇게 나이 마흔이 될 때까지 '평생 독자'라는 정체성에 충실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마흔에 첫 출산을 하고 그즈음부터 쓰기 욕구가 올라왔다. 개인 블로그를 열어 얼마간 욕구를 충족하다 보니 좀 더 잘 쓰고 싶어졌다. 좋아하는 작가님의 글쓰기 수업도 듣다가, 주변의 읽고 쓰는 지인 따라 급기야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에 도전해 본 것이다.
돈 번 것도 좋은데 더 신나는 일들이
운 좋게도 첫 기사가 메인 탑 1에 게시되었다(해당 기사:
아이는 아프고 우리는 행복하다 https://omn.kr/1nezf). 얼마나 신이 나던지! 며칠을 방방 뛰며 가족과 친구들에게 자랑자랑했다. 신난 이유는 '내 글이 신문사의 어떤 기준을 통과하여 공적으로 게시될 만하다는 인정 같아서'라고 멋있게 말하고 싶지만 솔직해지겠다. 글을 써서 돈 벌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첫 기사 한 편으로 번 돈은 자그마치 21만 원! 신문사에서 주는 원고료 6만 원에 기사를 읽은 독자들이 자발적으로 보내주는 '좋은기사 원고료'를 15만 원이나 받았다. 물론 좋은기사 원고료를 보내준 사람들 대부분이 은사님을 비롯한 가족, 친구, 지인이었다. 그렇게 자랑자랑했으니 새로운 첫 시작을 응원하는 의미로 기꺼이 보내주셨으리라. 이후 13건의 기사를 쓰며 신문사에서 주는 원고료 70만 5000원과 좋은기사 원고료 37만 6000원을 합해 백만 원이 조금 넘는 돈을 벌었다.
와우! 돈 번 것도 좋은데, 더 신나는 일들이 자꾸 일어난다.
나는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는데 시민기자 활동을 한 이후부터 학교에서 글쓰기 수업을 할 때마다 학생들에게 내 오마이뉴스 원고료를 공개했다. "얘들아, 너희들도 도전할 수 있단다. 청소년 시민기자 돼서 원고료 받아보렴." 수업에 좀처럼 집중하지 않고 반항적이었던 한 학생은 금액을 보자마자 외쳤다. "지금까지 들은 수업 중에 가장 실용적이에요!"
그렇게 수업에서 쓴 글로 청소년 시민기자가 된 첫 번째 학생은 말을 더듬는 친구였다. 나는 그에게 말이 어려우면 글로 쓰면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고 결과는 대성공! 그 학생의 글 역시 오마이뉴스 메인에 올랐고 옆 반, 옆 옆 반 친구들까지 모두 환호했다. 물론 그가 받은 원고료 때문에 더더욱.
학생의 부모님은 기사가 나가자마자 일가친척들에게 링크를 보냈다고 하시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반 전체에 햄버거와 음료수도 돌리셨다. 학생과 부모님이 느낀 기쁨과 친구들의 환호로 그 학생은 조금 더 어깨 펴고 당당히 더듬더듬 말하는 사람으로 살아가지 않을까? 말 더듬을 콤플렉스라 여기지 않고 당당하게 소통하며 살아가길 바란다.
두 번째 청소년 시민기자는 좀 더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학생이 걸어서 통학하는 학교 앞 도로에 인도가 없는 문제를 기사로 작성하여 여론을 불러일으켰다(해당 기사:
삼척 사는 중학생인데요, 등굣길이 이모양입니다 https://omn.kr/218e0). 기사가 나간 지 하루 만에 국토교통부에서 직접 학교로 찾아와 주변을 확인하고 즉시 인도를 설치하겠다는 약속을 해주셨다. 지금 학교 앞은 한창 공사 중에 있다. 그리고 학생은 공사가 완료되면 후속 기사를 작성하려고 준비 중이다. 학생 기사가 나가고 각종 매체로부터 인터뷰 요청이 들어온 것은 덤.
나는 작년부터 강원도 산골의 작은 학교에 근무하고 있는데 이곳 학생들과의 생활이 꿈만 같아 그 이야기도 기사로 몇 편 내보냈다. 기사가 나갈 때마다 일면식도 없는, 그야말로 '고마우신 독자님'들로부터 좋은기사 원고료를 받고 있으며 그걸로 학생들과 고깃집에서 회식을 하는 전통이 생겼다.
이 기사를 작성하고 있는 바로 오늘 저녁에도 학생들과 삼겹살 주꾸미를 먹으러 가기로 되어있다. 우리 아이들 기사가 나갈 때마다 나에게도 각종 매체로부터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고 있는 것 역시 덤.
내 기사를 봤다는 사람들
지난주엔 고등학교 동창이 이십여 년 만에 연락을 해왔다. 기사를 보고 "내 친구잖아!"라며 무려 업무 쪽지로 말을 걸어온 것이다(강원도 교직원끼리는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내부망이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락이 없었으니 우리는 서로 학교에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살다가 기사를 계기로 가까이 동종업계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뿐이랴. 오마이뉴스의 파급력은 실로 컸다. 출장을 가거나 교사 스터디에 들어가서도 내 기사를 봤다는 분을 만나게 된다. 남편의 직장 동료들도 알아보고 "아내 아니야?"라며 묻는 일이 잦다.
어버이날 즈음해서 시어머니께서 평소 정성 들여 만들어주시는 국수 이야기를 기사로 내보냈더니 며칠 뒤 시이모님께 연락받은 일도 있다(해당 기사:
볶고 무치고 부쳐낸 고명만 7가지, 이건 요리다 https://omn.kr/1nilv). "정희야, 기사 잘 봤다."라며. 어머니께서도 기쁜 마음을 주변 분께 많이 알리셨으리라. 그야말로 평화로운 고부 관계 유지에 오마이뉴스의 공이 혁혁하다.
아! 아무래도 이건 너무 신나는 일이다. 이 기사를 읽고 있는 독자님들도 일단 첫 한 문장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셨으면 좋겠다. 첫 문장만 나오면 아마도 하고 싶은 말이 줄줄이 이어지지 않을까? 우리의 삶은 때론 기쁘고 종종 힘든 채로 그 자체로 특별하고 귀한 이야기일 테니. 나도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의 기사에 원고료로 응원하는 일을 기꺼이 기쁘게 할 것이다.
아 그리고, 오마이뉴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삶이 풍성합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