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무관학교는 졸업생이 늘어나면서 이들을 조직화하는 '신흥학우단'을 결성하였다. 교장 여준, 교감 윤기섭과 제1회 졸업생 김석, 강일수, 이근호 등이 발기하여 조직한 것으로 교직원과 졸업생은 정단원이 되고 재학생은 준단원이 되는 일종의 동창회와 비슷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명칭을 '다물단'(多勿團)이라 했다가 '학우단'으로 고쳤다. 신흥학우단의 목적과 사업은 다음과 같다.
신흥학우단의 목적
혁명대열에 참여하여 대의를 생명으로 삼아 조국광복을 위해 모교의 정신을 그대로 살려 최후의 일각까지 투쟁한다.
중요사업
1. 군사, 학술을 연구하여 실력을 배양한다.
2. 각종 간행물을 통하여 혁명이념의 선전과 독립사상을 고취한다.
3. 민족의 자위체를 조직하여 적구(敵拘) 침입을 방지한다.
4. 노동강습소를 개설하여 농촌청년에게 초보적 군사훈련과 계몽 교육을 실시한다.
5. 농촌에 소학교를 설립하여 아동 교육을 담당한다. (주석 12)
신흥학우단은 졸업생이 증가함에 따라 서간도 우리 독립운동의 핵심체로 성장하였다. 그들은 모교의 교명에 따라 2년간은 의무적으로 복무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그 대부분은 독립군에 편입되었으나, 여기에 편입되지 않은 졸업생들도 각 곳에 흩어져서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만주의 독립운동 중에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이 들어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 영향력은 막대하였다. (주석 13)
신흥무관학교는 학생이 늘고 사기가 높아가고 있었으나 그늘진 부분도 있었다. 경영이 그만큼 어려워진 것이다. 이회영 일가의 돈도 바닥을 드러냈다. 그래서 택한 것이 이관직과 장도순을 국내로 파견하여 자금을 모아오게 하였다. 두 사람은 합니하를 출발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장도순은 박중화의 집에, 이관직은 안확의 집에 묵으면서 알 만한 인사들을 만나 자금을 요청했지만 모금이 쉽지 않았다.
그동안에 민심도 변하고, 무엇보다 총독부의 엄한 통제와 사찰에 후환이 두려워 선뜻 돈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장도순은 1개월 뒤에 만주로 돌아가고, 이관직은 국내에 남아서 장기적으로 자금을 모으기로 하였다. (주석 14)
주석
12> 원병상, 앞의 책, 238~239쪽.
13> 신용하,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118쪽, 을유문화사, 1985.
14> 이관직, 앞의 책, 158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암흑기의 선각 석주 이상룡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