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했던 아부다비 경유를 마치고, 다음 향하는 곳은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입니다. 전날은 공항에서 밤을 새웠습니다. 덕분에 잠깐 잠을 자고 일어나니 금세 새로운 도시에 도착해 있습니다.
버스를 타고 나온 바쿠 시내의 모습은 아주 독특했습니다. 시내에는 오래되어 보이는 베이지색의 고전주의 건축물이 늘어서 있습니다. 그 사이로 간간이 유리 커튼을 친 현대식 고층 빌딩도 있습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잠시 동네를 걸었습니다. 지도를 보지 않고 발이 닿는 대로 걸었는데, 금세 탁 트인 물가가 나타납니다. 바쿠가 접하고 있는 세계 최대의 호수, 카스피해입니다.
물가의 공원 벤치에 잠시 앉아 시간을 보냈습니다. 비슷한 현대사를 겪었으니, 도시의 풍경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 것은 제 착각이었습니다. 며칠 전까지 있었던 중앙아시아의 모습과는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공원을 지나가는 사람 가운데, 저를 제외하고는 아시아인을 찾기 어렵습니다. 아제르바이잔은 이슬람교 신자가 많은 국가이지만, 히잡을 쓴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어떤 경계를 넘어왔음을 실감했습니다. 카스피해를 넘는다는 것이 이런 의미일까,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정말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카스피해는 세계 최대의 내륙해니까요. 카스피해를 접하고 있는 국가만 다섯 개입니다. 아제르바이잔, 러시아,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이란입니다.
지리적으로는 호수이지만, 이곳이 호수인지 바다인지를 두고는 국제적인 분쟁도 있습니다. 호수로 규정하느냐, 바다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각 국가의 영해 면적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특히 러시아와 이란이 이 바다를 접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아제르바이잔, 러시아,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은 모두 소련의 구성국이었습니다. 그러니 소련 해체 이전에는 소련과 이란만이 카스피 해를 접하고 있었죠.
소련과 이란, 혹은 러시아와 이란. 사실 아제르바이잔의 역사는 이 두 강대국 사이의 끝없는 줄다리기였습니다. 둘 사이에서 아제리인이라는 정체성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아제르바이잔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인이 거주하던 땅에 처음 손을 뻗은 것은 이란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메디아 왕조였고, 그 뒤에는 페르시아 제국이 되었죠. 그리고 7세기에는 이슬람 왕조가, 11세기에는 튀르크 민족이 이 땅을 지배했습니다.
아제리인이라는 정체성은 이 다양한 역사적 경험이 모두 융합되어 만들어졌습니다. 문화적으로는 페르시아의 문화를 많이 흡수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이슬람교를 믿게 되었죠. 언어적으로는 튀르크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죠.
지금까지도 그렇습니다. 아제르바이잔어는 튀르키예어와 상당히 유사합니다. 정치적으로도 아주 가까운 형제국이죠. 그러면서도 이제르바이잔은 이란과 같은 시아파 이슬람을 믿습니다. 사실 이란을 시아파 국가로 만든 사파비 왕조가 바로 남아제르바이잔에서 출발한 왕조입니다.
이슬람교 확산 이전 페르시아에서 믿던 조로아스터교의 유적도 아제르바이잔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덕분에 아제르바이잔을 '불의 나라'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조로아스터교는 불을 신성하게 여기니까요.
이후 아제르바이잔은 셀주크 제국과 몽골 제국, 티무르 제국 등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1501년 이란의 이스마일 1세가 남아제르바이잔에서 사파비 왕조를 세우고 이란을 통일했죠. 그 뒤로는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왕조가 아제르바이잔을 두고 경쟁을 펼쳤습니다.
19세기 초부터는 러시아의 남진도 시작됩니다. 1826년 러시아는 아제르바이잔을 두고 이란과 전쟁을 벌였죠. 양국은 아제르바이잔을 남북으로 나누는 데 합의했습니다. 북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가, 남아제르바이잔은 이란이 차지했죠.
이 당시 나눠진 북아제르바이잔은 현재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남아제르바이잔은 아직까지도 이란에 속해 있습니다. 사실 이란에 속한 남아제르바이잔 지역이 아제르바이잔 공화국보다 면적이 넓습니다. 아제르바이잔계 인구 역시 아제르바이잔보다 이란에 더 많이 거주하고 있다고 하죠.
러시아에 속해 있던 북아제르바이잔은 바쿠의 석유 발견과 함께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석유 산업이 발달하면서 여러 공장이 들어섰죠. 카스피해를 이용한 운송업도 크게 발전했습니다. 아제르바이잔을 '불의 나라'라고 부르는 또 다른 이유가 바로 풍부한 지하자원입니다.
물론 이런 상황이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러시아와 유럽에서 석유를 찾아 온 자본가와 아제리인 노동자 사이 갈등의 발생은 필연이었죠. 특히 1905년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무슬림에 대한 학살이 벌어지며 아제리인의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커져갔습니다.
결국 1917년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하던 러시아 제국은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소비에트 세력은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지배를 이어가고자 했죠. 바쿠에서는 소비에트 세력이 '바쿠 코뮌'이라는 정권을 세우기도 했죠.
하지만 아제르바이잔인은 소비에트의 지배에 저항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다시 한 번 무슬림에 대한 학살 사건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제르바이잔의 독립운동 세력은 '아제르바이잔 민주공화국'의 건국을 선언하고 소비에트에 대항합니다.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은 아제르바이잔 민주공화국은 1918년 9월 바쿠를 장악하는 데 성공합니다. 1920년 1차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해 소집된 파리 강화 회의에서, 아제르바이잔 민주공화국은 독립을 인정받았습니다.
이렇게 이슬람 세계 최초의 세속주의 민주공화국이 탄생했습니다. 아제르바이잔 민주공화국은 이슬람 세계 최초의 의회민주주의 국가이기도 했죠. 이슬람 세계에서 여성의 투표권을 최초로 인정한 국가이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아제르바이잔은 이란에 속한 남아제르바이잔까지의 확장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뒤로 아제르바이잔의 역사는 썩 평탄하지 못했습니다. 러시아로서는 아제르바이잔이, 정확히는 아제르바이잔의 석유가 필요했습니다. 결국 아제르바이잔 민주공화국이 국제사회로부터 독립을 인정받고 채 몇 개월이 지나지 않은 1920년 4월, 소비에트 러시아는 아제르바이잔을 침공합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23일 만에 아제르바이잔을 정복했습니다. 아제르바이잔은 신생 국가였고, 아제르바이잔을 지원한 오스만 제국은 1차대전의 패전국이 되어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으니까요. 아제르바이잔 민주공화국은 그렇게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만들어졌죠. 곧 아제르바이잔은 소련에 편입됩니다. 아제르바이잔이라는 독립국가의 꿈은 불과 2년도 되지 않아 무너졌습니다.
그렇게 보면, 아제르바이잔의 석유는 역설적인 역할을 남긴 셈입니다. 부와 발전의 원천이었으면서, 동시에 자유를 침탈받는 원인이기도 했으니까요. 레닌은 아제르바이잔 침공 과정에서 석유 시설을 파괴하지 말라고 특별히 명령할 정도로 바쿠의 석유에 관심이 컸습니다.
무엇 때문이든, 자유로운 무슬림 공화국의 꿈은 그렇게 끝을 맺었습니다. 카스피해 옆 공원에 앉아, 바쿠 시내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천천히 바라봅니다. 역사와 그 속의 꿈을 함께 했을 듯한 오래된 건물들. 그 사이로 솟아오른, 너무도 현대적인 고층 빌딩. 두 건물은 가까이 있지만, 그 사이에는 결코 건널 수 없는 이질감이 서려 있습니다. 무너진 역사와 오늘의 사이처럼 말이지요.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