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으로 쓴다는 오해
얼마 전 길을 잃은 친구에게 글쓰기를 권했다. 작가가 되려는 마음, 글을 잘 쓰려는 마음 같은 건 버리고 그냥 한 번 써보라고. 그러면 너도 몰랐던 너의 마음이 눈앞에 펼쳐질 거라고. 혹은 쌓아두고 해소하지 못한 감정들이 배설되면서 훨씬 가벼워질 거라고. 내 말을 들은 친구는 대뜸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도 너처럼 글을 잘 쓰면 좋겠다."
글을 쓴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한다. 내가 글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런 사람들의 시선과 달리,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글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오래전 언론고시를 준비하면서 언론 스터디를 꾸준히 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매주 사회 현안에 대한 논술을 써야 했는데, 그 자리에서 나는 번번이 혹독한 합평을 들어야 했다. 스스로도 글을 잘 쓴다 생각한 적이 없지만, 타인으로부터도 잘 쓴다고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나도 한때 글은 재능 있는 사람들이 쓰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십 대 때 김훈 작가의 <자전거 여행> 에세이를 참 좋아했다. 그 책에 나온 문장들을 읽고 또 읽으면서, 글은 역시 타고난 작가들이나 쓰는 거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할 수만 있다면 나도 저런 문장들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그런 문장을 쓸 수는 없을 것만 같았다. '좋은 글은 곧 명문(名文)'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낳은 생각이었음을 그때는 몰랐다.
재능보다 더 귀한 꾸준함
천재나 영재를 동경하는 사회에서 살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재능을 높이 산다. 타고난 재능이 무엇인지를 알려하고, 그 재능을 좇아서 살아야 행복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어릴 때는 나도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태어난 이들이 부러웠다. 나의 재능은 무엇일까 골똘히 고민해 본 적도 많았다. 그런 십 대와 이십 대 삼십 대를 지나, 사십 대가 된 지금의 나는 재능을 특별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갖고 태어났다 할지라도, 본인이 그 분야에 관심이 없거나 좋아하지 않으면 꾸준히 할 수 없다. 천재로 태어난다 해도, 노력하지 않으면 천재는 천재로 살지 못한다.
오십이 넘어 요리연구가가 된 지인이 있다. 젊을 때부터 여러 나라 음식 만들기를 즐겨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요리를 직접 해주는 걸 무척 좋아했다. 요리를 못 하는 건 아니지만 하는 과정을 즐기지 못하는 나는, 어느 날 이 지인에게 물었다. 요리하는 게 힘들거나 지겹지 않으냐고. 지인은 내게 말했다.
"하는 과정을 즐겨야 돼. 나는 요리하는 과정이 정말 즐거워."
곰곰 생각해 보니 내가 계속 글을 쓸 수 있었던 것도 글을 쓰는 과정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글에 대한 재능이 있다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대단한 작가가 될 거라 기대해 본 적도 없다.
그런데도 계속 쓸 수 있었던 건 글을 꼭 쓰고 싶었던 소망도 작용했지만, 글 쓰는 과정을 순수하게 좋아했다. 여전히 백지 앞에 설 때마다 긴장감과 설렘이 공존한다. 이번엔 또 어떤 글을 써볼까, 이 이야기는 어떤 단어들로 표현해 볼까, 하는 기대감에 부풀어 오른다.
글에 재능은 있지만, 글 쓰는 과정을 귀찮아했다면 나는 과연 꾸준히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앞에 언급한 지인이 요리에 재능은 있는데 하기를 싫어했다면 오십이 넘어 요리연구가가 될 수 있었을까.
천재 혹은 영재로 알려진 많은 사람들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스포트라이트가 닿지 않은 그늘 속의 삶을 생각한다. 어느 누구도 재능만으로 걸어가지 못한다. 단거리는 가능하겠지만, 장거리라면 재능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과정을 즐기는 게 재능이다. 결과야 어찌 됐든, 돈이 되든 안 되든, 그저 좋아서 그 과정을 즐기기에 해나가는 게 진짜 재능이다. 지치지 않고 매일 조금씩 꾸준히 해나가는 것. 인생은 단거리가 아니라 장거리다. 이 세상에 '꾸준히'를 이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꾸준히 할 수 있는, 혹은 하고 싶은 무언가를 찾았다면 그건 분명 축복이다. 마흔이 넘어서야 나는 이 진리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잘 쓴 글'과 '좋은 글'은 다르다
보통 글을 쓴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쓰고 싶어 한다. 주제가 명확하고, 화려한 표현이 넘치며, 짜임새 있는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맞춤법과 띄어쓰기도 완벽하게 해야 한다고 여긴다. 이런 것들이 글을 잘 쓰는 데 필요한 요소이긴 하다. 하지만 이것만이 전부일까. 이걸 모두 갖추면 '좋은 글'이 될까.
이런 요소를 모두 갖췄는데도 '좋은 글'이라고 볼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진짜 나를, 나의 생각을 보여주지 않고, 남의 것을 가져오거나 깨달은 척하는 글들이 그렇다. '잘 쓴 글'은 훈련을 통해 충분히 써낼 수 있기에 이런 척이 가능하다. 하지만 '좋은 글'은 결코 훈련만으로 쓸 수 없다.
간혹 훈련 없이도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끊임없이 성찰하며, 글 속에 그런 자신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경우가 그렇다. 이런 글의 경우 짜임새가 엉성해도, 화려한 표현이 없어도,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엉망이어도,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이런 사람이 훈련까지 열심히 한다면, 그 글은 '좋은 글'인 동시에 '잘 쓴 글'이 된다.
두 글의 차이를 옳고 그름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쓰임이 다른 글이라고 보는 게 맞다. 경우에 따라 '잘 쓴 글'이 필요할 때도 있고, 그저 '좋은 글'이어도 무방할 때가 있다. 글이 업인 사람이라면 잘 쓰는 게 중요하겠지만, 처음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잘 쓰는 것보다는 '좋은 글'을 쓰려고 노력해 보라 권하고 싶다. '잘 쓴 글'은 훈련으로 쓰지만, '좋은 글'은 거쳐온 삶과 솔직함으로 쓰는 것이기에. 초보라 해도 마음가짐만 정직하게 먹으면 누구나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명문보다 중요한 건 솔직함
예전에는 명문이 많은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했다. 명문을 많이 쓰는 작가가 잘 쓰는 작가라고 믿었다. 하지만 오래 글을 써보니 명문은 깊은 사유의 끝에 자연스레 나오는 것이지, 명문만을 좇아서는 절대 쓸 수 없는 것이었다. 명문은 타고 난 사람이 쓰는 게 아니었다. 사람과 사물과 자연을 오래 들여다보고 깊이 사유하고 성찰하는 사람이 쓰는 것이었다.
명문에 집착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얼마나 솔직하게 지금의 나를 드러내느냐다. 명문 없이도, 화려한 미사여구 없이도 충분히 좋은 글은 많다. 오랜 시간 문맹으로 지내다 고령이 되어서야 글을 깨친 사람들의 글을 종종 찾아본다. 이 분들은 오랜 시간 글이라고는 읽어보지도 써보지도 않았다. 이제야 글을 알아 가슴에서 우러나는 말들을 종이 위에 털어낸다.
그 글들은 살아있다. 이 분들은 꾸미지도 과장하지도 않고 그저 살아온 삶으로, 버텨온 몸으로 글을 쓴다. 글자가 삐뚤고 맞춤법이 어긋난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짧은 글인데도 심지가 있어 읽을 때마다 마음이 일렁인다. 그리곤 다시 겸허한 마음으로 내 글로 돌아온다. 혹여 겉모습에만 치중한 글을 쓰진 않았나, 거짓을 참인 것처럼 말하진 않았나, 삶을 위한 글이 아니라 보여주기 위한 글을 적진 않았나.
'좋은 글'을 쓰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잘 쓴 글'이 아니라 '좋은 글'. 그런 글이 진짜 명문이라고 믿는다. 명문은 결국 좋은 사람에게서 나오므로. 좋은 사람은 좋은 글을 쓸 수밖에 없으므로.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이 많은 사회는 지금보다는 더 살 만한 세상일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