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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장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의 승리, 청산리대첩을 표현한 ‘청산리전투도’
무장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의 승리, 청산리대첩을 표현한 ‘청산리전투도’ ⓒ 국가보훈처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참패한 일제는 잔인무도한 보복전에 나섰다. 인근은 물론 멀리 떨어져 있는 조선인 마을까지 덮쳐 닥치는대로 살상하고 불지르고 약탈했다. 독립군을 도왔다. 그리고 한인이라는 이유였다. 실제로 이들의 도움으로 일본군의 움직임 등 첩보와 보급지원 등 큰 도움을 받은 경우도 있었지만, 전투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의 주민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참변을 당하였다.

1920년 10월 9일부터 11월 5일까지 27일간 간도 일대에서 일본군에 학살된 한인은 3,469명이고, 이후 3, 4개월 동안의 희생자는 5,000여 명에 이르렀다. '경신참변'으로 불리는 일제의 야만성은 이에 멈추지 않았다. 

일제는 중국 마적단을 매수하여 훈춘의 일본총영사관을 습격케 하고 이를 빌미로 조선주둔군 제19, 20사단, 시베리아 출병군 11, 13, 14사단, 만주파견 관동군 등에서 2만 명을 차출하여 만주에 투입했다. 이 출병군을 3개 지대로 편성하여 독립군 학살전을 전개하였다. 

1단계는 작전개시일로부터 1개월 내에 독립군을 섬멸하고 그 근거지를 박멸하는 것이며, 2단계는 1단계 작전 이후 1개월 내에 민간에 잠복한 독립군과 민간인 독립운동가를 철저히 색출함으로써 한국 독립운동의 뿌리를 완전히 제거한다는 전략이었다. 10월 16일 독립군 소탕작전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일본군은 소탕작전에 실패하고 있었다.

일본군의 출병 이전에 이와 같은 사태가 올 것을 미리 예상한 한국독립군은 안전지대로  이미 피신하였거나 피신 중이었다.

독립군 부대들은 소·만 국경을 넘어 연해주로 이동한 것이다. 일본군은 한국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박멸한다는 미명 아래 무고한 재만 한인에 대하여 무차별 학살을 감행하였다.

이상룡은 이 때 삼원포에서 동북방향으로 200여 리 떨어진 화전현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의 목에는 독립군의 수령이라 하여 거액의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 동포 중에는 악질 친일파로 이상룡과 같은 인물에게 현상금이 걸리면 현상금을 타기 위해 일본군의 첩자노릇을 하는 자도 있었으나 그런 자들은 극히 일부였다.

자신의 몸은 이미 늙은 몸이니 일본놈들에게 잡혀 죽은들 독립운동에 얼마나 손해가 나겠는가 하고 이상룡 자신은 태연하였지만, 서로군정서의 독립군들과 주변의 동포들이 그를 산속 깊이 이사를 시켜놓고 보초를 서며 보호하였다. 산속에 앉아 있는 중에도 동포들과 독립군들이 여기저기서 일본군의 총과 칼에 맞아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상룡은 그 원수를 기필코 조국을 되찾아 갚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다. (주석 1)

이상룡은 재기를 서둘렀다. 두 차례 대첩 과정에서 독립군 전우들의 희생과 일제의 보복으로 수많은 동포들의 학살을 들으면서 재기하여 반드시 민족적인 한을 풀어내겠다고 다짐했다. 러시아령 해삼위나 밀산 등으로 이동하지 않은 대원들을 불러 모았다. 

이 시기 그는 63세의 고령이었다. 그동안 힘겨운 삶을 살아오면서 많이 여위고 노쇄했으나 투혼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얼마 후 동지들이 다시 모여서 축소되기는 했지만, 서로군정서 조직을 부활시킬 수 있었다. 청산리전투에 참전했다가 밀산으로 갔던 대원 중에는 소식을 듣고 돌아온 동지들도 적지 않았다.


주석 
1> 채영국, 앞의 책, 174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암흑기의 선각 석주 이상룡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이상룡#석주이상룡평전#이상룡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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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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