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독선적인 정부 운영과 무대책에 실망한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의정원의원들은 국민대회를 준비하면서 지도체제를 대통령중심제에서 국무위원중심제 즉 일종의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개헌작업을 시도하였다. 이승만이 이에 반대하면서 임정은 더욱 분열상이 가중되고, 이를 이유로 이승만은 1921년 5월 29일 마닐라행 기선 컬럼비아호를 타고 상하이를 떠나고 말았다. 이승만의 1년 반 동안 임시정부의 활동은 이로써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직을 사퇴하지 않고 임시정부를 떠났다.
6월 29일 호놀룰루에 도착한 이승만은 민찬호 등과 대한인동지회를 조직하고, 동지회 창립석상에서 임시정부를 맹렬하게 비난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로부터 1921년 9월 29일 태평양회의 (워싱턴 군축회의)에 참석하라는 지침을 받고 하와이에서 워싱턴 D.C.로 돌아왔다. 태평양회의 한국 대표단의 전권대사로 임명된 것이다. 태평양회의는 1921년 7월 11일 미국의 신임 대통령 하딩에 의해 제안되었다. 파리강화회의가 유럽중심의 국제현안을 다룬 것에 비해 동아시아, 태평양지역의 현안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룰 국제회의를 워싱턴에서 갖자고 제의, 일·영·불·이 등이 받아들이면서 개최하게 되었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자신의 위상이 흔들리는 것을 지켜보고 미국으로 돌아온 이승만은 워싱턴 D.C.의 구미위원부를 한국위원회(The Korean Commission)로 명칭을 바꾸고 이를 활동 근거지로 삼았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했던 김규식이 8월 25일 워싱턴에 도착한 것을 계기로 이승만 등이 한국위원회를 발족, 김규식을 위원장으로 위촉하고, 10월 10일 워싱턴회의에 참석하는 미국 대표에게 〈한국독립청원서〉를 제출했다. 12월 1일에는 다시 〈군축회의에 드리는 한국의 호소〉를 발표하는 등 노력했으나 제국주의 열강 국가들에게 한국의 독립문제는 안중에도 없었다. 워싱턴회의 역시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임시정부와 이승만의 갈등은 접점을 찾지 못하고 점점 파국으로 치달았다. 이승만은 의정원의 사태수습 요구를 외면하고 결국 더 이상 답신조차 보내지 않았다. 그에게 중국에 있는 임시정부 청사는 우선 신변의 불안감을 느끼게 하였고, 무엇보다 일제와 싸우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로 인식되었다. 그의 국제감각은 독립운동을 통해 일제의 타도가 비현실적이라는 인식이었다.
임시정부 의정원은 1922년 6월 10일 이승만 대통령 불신임안을 제출하여 일주일 간의 토의 끝에 6월 17일 재적의원 3분의 2의 찬성으로 불신임안을 의결하였다. 정부수립 3년여 만에 임시대통령 불신임안이 채택된 것이다.
① 임시 대통령 피선 6년에 인민의 불신임이 현저하여 각지에서 반대가 날마다 증가되며 그 영향이 임시정부에 미치는데 민중을 융화하지 못하고 감정으로만 민중여론을 배척하는 까닭에 분규와 파쟁이 조장되고 독립운동이 침체상태에 빠져 있다.
② 임시 대통령 이승만이 대미 외교사업을 빙자하며 미주에서 동포들이 상납하는 재정을 수합하여 임의 사용하였고 정부 재정을 돌아보지 않았으며 국제연맹과 열강회의를 대상으로 하던 구미위원부 외교사무가 중단됨에도 불구하고 헛된 선전으로 동포를 유혹하여 외교용 모집을 계속하여 그 재정으로 자기의 동조자를 매수하고 있다.
③ 국무위원이 총사직을 제출하였으나 임시 대통령이 그 사직청원서를 처리하지 못하고 몽매한 처사로 여러번 국무총리를 임명하였는데 당사자가 알지 못하게 단독적 행사를 하여 혼란을 계속할 뿐이고 아직도 정부를 정돈하지 못하고 있다.
④ 국무위원은 총사직을 발표한 다음 아직도 거취를 작정하지 못하고, 다만 임시 대통령의 처사를 기다린다고 하여 곤란한 시국에 대책 없이 앉아서 감정적 행동으로 정부위신을 타락시키고 있다.
⑤ 이상의 사실이 임시 대통령과 국무원 불신임안 제출의 이유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암흑기의 선각 석주 이상룡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