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에서 군사통일회의를 주도한 인사들은 상하이의 임시정부를 불신하고 있었다. 불신의 대상은 이승만이었다. 그의 위임통치론은 절대독립을 위해 투쟁해온 독립운동가들에게는 공존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또 하나는 무장전쟁의 기지를 만주에 두기로 하고서도 그동안 외면해온 처사, 그리고 봉오동·청산리대첩 등 만주의 무장투쟁 세력은 생명을 걸고 싸워왔지만 임시정부는 그동안 무엇을 했느냐는 원성과 비판이 쏟아졌다.
그래서 무장전쟁론의 원로이고 흠결이 없는 이상룡을 조선공화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임하였다. 하지만 이상룡의 생각은 달랐다. 어렵게 만든 임시정부를 부정하고 새로운 정부를 만든다면 결국 독립운동 세력의 분열만 가져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단호히 조선공화정부의 결정을 거부하면서 지체없이 만주로 돌아왔다.
만주의 무장전쟁 세력이 비록 '벽상조각'에 그쳤지만 조선공화정부를 조직하면서 이상룡을 대통령으로 추대할 만큼 그는 이 분야의 확고한 위상을 갖고 있었다. 북경군사통일회의는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되고, 임시정부 측이 개조파와 창조파로 갈리는 등 독립운동 진영이 극심한 분열과 대립을 거치면서 1924년 해체되고 말았다.
이상룡은 이같은 상황을 지켜보면서 자작시 <만주에서 겪은 일>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13
연경(베이징) 회의가 투지 다시 떨쳐
성토문 전달하매 옹호당 미친 듯 고함친다
한번 물어보자 위임통치 청원이
이웃나라 의지해 보호받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
14
분쟁을 진정하려 국회가 열려
동해에 떠오르는 해 기다림 서광이 돌아왔다
까닭없는 개조다 창조다 한가한 싸움
달팽이 두 뿔처럼 솟아 났네. (주석 4)
얼마 후 임시정부는 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했다. 이상룡은 <이승만이 도장을 소매에 넣어 태평양을 건넜다는 말을 듣고서>란 시를 지었다.
잘못이 있으면 모름지기 스스로 꾸미지 말아야 하며
자연스럽게 물러나서 민족에게 사죄해야 하는 것이네
명성은 무너졌고 자취도 탄로 나서 더 이상 여지가 없거늘
갑자기 또 무슨 마음으로 도장을 소매에 넣고 달아났는가. (주석 5)
주석
4> <석주유고(상)>, 219쪽.
5> 앞의 책, 206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암흑기의 선각 석주 이상룡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