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9일 토요일 오후 6시 34분 경찰에 첫 신고가 들어왔다. "압사당할 거 같다." 공권력이 제대로 대응만 했다면 159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이태원 참사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 <오마이뉴스>는 매주 토요일 오후 6시 34분 이태원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태원 참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편집자말] |
아버지는 장남의 장례를 마치고 아내와 함께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으로 향했다. 10.29 이태원 참사 직후 차려진 위패도 영정도 없는 분향소. "썰렁하게 국화꽃 다발만 크게 놓여있던" 그곳에서 아버지는 한참을 서성였다.
장례를 마치고 영정 없는 분향소를 헤맸다
"정말 너무나 궁금하더라고요. 왜 이렇게 유족들을 다 뿔뿔이... (중략) 유족 면담도 한번 없고 시신 처리 과정부터 장례까지 이렇게 하는 게 맞는지 이해가 안 갔어요. 다른 유가족들은 어떤 처지에 있을까, 만날 수는 있을까, 그걸 알고 싶어서 갔는데 아무리 물어봐도 모르더라고요."
부쩍 더워진 날씨 탓에 비닐 천막 안은 텁텁한 공기로 가득했다. 이태원참사 특별법 제정을 위해 국회 앞 농성을 시작한 유가족들의 공간. 이태원참사로 장남 고 임종원씨(1987년생)를 잃은 임익철씨(66)를 지난 16일 만났다. 더위를 피해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은 임씨는 아들을 떠나보낸 직후 이야기부터 꺼냈다.
유가족임을 알아보고 말을 걸어온 정신과 의사부터 자신에게 '유족이십니까?'라고 물어온 외신 기자까지. 임씨는 자기같은 유족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묻고 또 물었다. 기자에게는 개인 연락처를 알려주며 혹시라도 알게 되면 전달을 부탁했다. 하지만 다른 유가족과 닿을 만한 회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임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등 정치권에서 요청한 면담 자리부터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등 시민사회 기자회견까지. 유가족을 만날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질 때마다 빠짐없이 갔다. 처음에는 임씨를 포함해 10여 명 남짓 모였던 가족들은 어느새 1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임씨는 자신을 "보수적인 사람에 속한다"고 했다. 대기업 건설회사에서 동남아시아, 중동지역 등 해외 근무만 여러 해. 은퇴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침이면 일어나 조간신문 6개를 펼쳐봤다. 임씨는 이태원참사 이후 한국의 모습은 그동안 알았던 '우리나라'의 모습과 많이 달라 의아했다. 159명이 사망한 대형 참사임에도 유족들을 대하는 정부의 모습이 "이해가 안 갔다".
입시부터 취업까지 척척... 걱정 없는 아들이었다
|
▲ 이태원 참사 고 임종원씨 유가족 “진상규명 위해 긴 싸움 각오”
|
ⓒ 유성호 |
관련영상보기
|
"항상 아들의 불만은 다른 데서는 다 알아주는데, 집에서만 자기를 안 알아준다고. 하하."
그런 임씨도 아들 이야기를 할 때에는 답답한 기색이 사라졌다. 그는 이 말 끝에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어릴 적부터 재롱을 도맡으며 부모님을 배꼽 잡게 했던 장남. 학창시절에는 반장, 전교회장을 연이어 하고, 비싼 사교육 한 번 없이 입시도 잘 치렀다.
대학에 가서는 학생군사교육단(ROTC)으로 복무하면서도 방송반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취업 후에는 록 페스티벌 참가부터 와인동호회까지 섭렵했다. 늘 하고 싶은 게 많았던 적극적인 성격은 늘 변함 없었다. 음악을 좋아해 직접 디제잉도 하고, 수시로 배낭여행도 떠났다. 누구보다 잘 놀고, 또 열심히 공부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살았던 사람'. 다른 희생자들과 함께 아들의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함께 나오는 소개글은 종원씨의 아내, 익철씨의 며느리가 붙여준 말이었다.
대학 시절 전자공학을 전공했던 종원씨는 10년 이상 한 대기업의 시스템반도체 엔지니어로 일하며 경력을 쌓았고 결혼도 했다.
여러 관심을 두고 살았던 종원씨답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가지각색이었다. "종원이가 그동안 정말 잘 살았구나" 싶었던 순간. 황망한 마음에 코로나19를 이유로 들어 부득이 조문을 사양했지만, 아들을 찾아온 조문객들은 장례식장에 긴 줄을 섰다. 이틀씩 조문을 오기도하고, 장례를 마칠 때까지 자리를 지킨 이도 있었다.
지난해 12월, 종원씨가 졸업한 대학교 인근 호프집에서는 방송반 선후배들이 마련한 추모회가 열리기도 했다. 가족들도 함께 했다. 평소 사진 찍기를 유독 싫어하는 아들의 얼굴이 간간히 담긴 사진들을 모으고 모아 만든 추모 영상도 상영됐다.
"변함없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던 종원이."
영상 위로 종원씨를 기억하는 친구들의 다정한 말들이 지나갔다. 아버지는 사진 속 아들의 얼굴을 짚어가며 "얘가 종원이"라고 알려줬다. 키187cm의 100kg에 가까운 큰 체구. 쑥스러운 듯 웃으며 카메라를 피하는 종원씨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2주 전에도 갔다 온 이태원 축제, 그날은 왜
참사 당일, 종원씨는 아내와 함께 사촌동생을 집으로 초대해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소화도 시키고 산책도 할 겸" 나선 이태원 구경. 핼러윈 축제 바로 2주 전 역시 이태원에서 열린 세계음식문화축제에 방문했던 종원씨는 녹사평역 일대 지리가 낯설지 않았다. 임익철씨는 "(전해 듣기로) 점점 45도 각도로 (몸이) 밀렸다고 했다.
(이태원 일대) 지리를 아니까 '빨리 역 쪽으로 나가자' 해서 가다가 갈수록 (인파가) 심해졌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그는 "종원이 사촌동생과 며느리는 살았습니다. 천만다행이지요. 불행 중 다행이지요"라고 덧붙였다. 초저녁 일찍 잠들어 새벽에 일어나는 습관이 몸에 뱄던 임씨는 참사 다음날 뉴스를 보고 사태를 알게 됐다.
"뉴스를 보니 난리도 아니더라고요. 아이들이 저렇게 많이... 하다가, 혹시... 우리 아들이 호기심도 많고 그러니까. 혹시나 해서 전화를 하니 (아들 전화를) 며느리가 받더라고요. 울면서 '오빠가 연락이 안 돼요' 하더라고요. 그때 알게 된 거죠."
10월 30일 오후 2시, 병원에서 만난 아들은 맨몸으로 누워있었다. 경찰부터 지역 공무원까지 나와 있었지만, "어떻게 되는 겁니까"라는 임씨의 질문에 '유가족들이 알아서 하는 겁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부검 이야기엔 "안 한다"고 잘라 답하니 별다른 말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들의 사망 시각은 '10월 30일 00시 00분'으로만 기재되어 있었다.
"종원이 엄마는 마지막에 아이를 안아주지 못한 걸 되게 안타까워했어요. 당시에는 우리가 엄청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중략) 일부 언론에선 마약이니 하는 말을 떠들고... (정부에서) 장례 문제는 일사불란하게 하면서 (유가족들) 연락처는 안 주고 그러는 게 (왜 그런지) 궁금했지만... 워낙 우리를 안 좋게 질타하니까. 그런데 갈수록 이건 아니더라고요. 애들이 너무나 터무니없이 그렇게 된 거구나 알게 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을 믿는 이유
아들이 떠난 후, 부부는 20년 넘게 살던 서울 마포구의 집을 급히 처분하고 둘째 아들 가족이 있는 경기도로 이사를 갔다. 평소 모임이 많았지만, 정말 친한 친구들이 아니면 잘 나가지 않았다. 부부는 손주들을 함께 돌보며 허전한 마음을 달래면서도 서울광장 시민분향소와 국회 앞 농성장을 틈틈이 오갔다.
"저는 그 사람들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임씨는 일부 2차 가해를 쏟아내는 이들이나 특별법 제정을 두고 '그만하라'고 비난하는 이들을 탓하지 않았다. 다만 "일방적 희생만 있는" 사회적참사마저 정쟁으로 변질되는 모습이 안타깝다고 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참사도 호와 불호로 판단한다는 게 참 답답하다"고도 했다. 특히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는 모습은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참사 부실대응 혐의로 구속기소됐다가 최근 보석으로 권한을 회복한 박희영 용산구청장 이야기도 꺼냈다.
"대통령은 워낙 중차대하다면, 사과하고 (잘못을) 인정이나 좀 하라는 겁니다. 그렇지만, 그 다음 윗선 책임자들은 도의적이든 무엇이든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참사가 일어났으면... (중략) 지금은 윗선 수사도 꼬리 자르고, 말단 몇 명 수사했는데... (박 구청장 보석 사유로) 불면증, 트라우마 이렇게 하는 게... 그럼 유가족들은 다 입원해 있어야죠. 종원이 엄마 같은 경우도 그렇고요. 꿋꿋이 버티고 있는데..."
그러나 임씨는 자신이 살아온 지난 한국 현대사를 되짚어가며,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어구를 꺼냈다. 그는 "대한민국은 국민들이 저력 있는 국가잖아요. 결국 정의와 진실은 역사가 증명해주더라고요. 당장 희망이 안 보여도, 결국 정의대로 간다는 걸 보여준 나라니까. 단지 시간이 걸릴 뿐이고, 우리는 긴 싸움을 할 각오가 돼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이태원참사는 국내뿐 아니라 외국인 희생자 26명이 포함된 국제적 참사인 만큼, 세계 각국에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지켜보는 피해 당사자들이 있음을 정부가 직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씨는 "많은 나라에 피해 당사자가 있기 때문에 외국 언론에서도 주시하고 있을 것"이라면서 "(진상규명을 위한) 법과 절차가 잘못 진행되면,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세계 곳곳의 피해 당사자들도) 납득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권으로부터 독립적인 진상조사기구를 통한 진상규명. 임씨가 유가족들과 함께 특별법 제정에 집중하는 이유다.
"국제적 당사자들이 있는 만큼, 정권의 차이를 넘어 국제적 기준에 맞게 법을 규정하고 객관적 기구를 설립하자는 겁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누구나 납득할 수 있게 해야죠. 전문가들이 그 룰에 맞게 조사하고, 그걸 역사에 기록해야죠. 어떤 결론이든 간에 말입니다.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라 누가 맞니 아니니 이런 문제가 아니고요."
호텔에서 내려와 위로 건네던 동년배 시민... "남일 같지 않다"는 그 말
아버지는 이제 영정 없는 분향소가 아닌 시민들이 추모를 위해 오가는 시청광장 시민분향소에 이따금 야간 지킴이 활동을 하곤 한다. 임씨는 어느 날 밤 12시가 넘은 시각, 분향소 옆에 선 자신에게 다가온 동년배 남성을 지금까지도 잊지 못한다.
"(시청역 인근) 호텔에 묵고 있는데, 거기서 보니까 제가 서 있더래요.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생각이 들어 와봤다고 하더라고요. 24시 편의점에서 산 음료수를 가져오셔서는 이야기하시더군요. 자기도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나오고, 회사를 다녔다면서... 자기 딸도 이태원에 자주 놀러가고 했는데, 남의 일 같지가 않다고."
직업 특성상 해외와 지방에서 자주 근무했던 터라, 아들과는 평소 데면데면했다. 초등학교 때까진 가족여행도 자주 다녔지만, 중학교부터는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부쩍 가까워진 것은 아들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쯤부터였다. 아버지의 유일한 취미인 골프를 아들 종원씨가 배우기 시작했고, 장신에 힘도 좋아 쳤다 하면 공이 쭉쭉 뻗어 아버지를 놀라게 했다.
대화도 자연히 늘어났다. 아들과 나누는 재테크 이야기, 직장 스트레스 토로가 재밌었다. "우리 땐 더 했어"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내심 척척 스스로 잘 살아가는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아들 하나가 뚝 하고 떨어져 나가니... 아, 상당히 많이 의지하고 있었구나. 기둥같은 놈이었구나, 기둥 뿌리 하나가 부러져 나갔구나... 했어요. 종원이 엄마나 나도, 우리가 나이 먹더라도 애들한테는 버팀목이 될 수 있겠다 생각했거든요. 우스갯소리로 자식은 평생 AS해야 한다는 말도 했는데. (떠나고) 보니 우리 아들 정말 든든했구나 싶더라고요."
임씨는 아들에게 남기는 메시지를 차분히 말했다. 하고 싶은 건 꼭 해내던 취미 부자 종원씨. 그곳에서도 "많이 하고 지내길"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평소에는 못해본 말"이라며 뜸들이던 그가 한참 후에 마지막 말을 전했다. "아휴..." 멋쩍게 웃는 그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인터뷰 내내 울지 않았던 아버지였다.
"우리 아들, 그곳에서도 좋아하던 것들 평소 하던 것처럼 똑같이 많이 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가끔은 엄마 꿈속에 좀 나와주면 좋겠다. 엄마가 많이 보고 싶어하는데 이상하게 안 나온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평소에는 못 해본 말인데.
사랑한다.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