퍽퍽한 직장 생활에도 찾아보면 소소한 재미 거리가 분명 있다. 퇴사가 열풍이 되어버린 요즘, 어쩌면 그 재미 거리가 계속 회사를 다닐 큰 힘이 되어줄지 모른다. 여기에 18년 차 직장인의 재미를 전격 공개한다. [기자말] |
직장의 행복은 승진이라 할 수 있겠다. 며칠 전 회사 게시판, 네모난 칸 옆에 내 이름 석 자가 보였다. 살면서 수없이 보았음에도 몹시 낯설었다. 힘들었던 지난 4년간의 세월이 후루룩 지나갔다. 필름 지나듯 흘러간다는 표현이 진짜였구나.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순간이었음에도 막상 현실이 되니 기쁘기보다는 멍했다.
이어지는 연락, 문자, 카톡, 메일, 메신저까지 쉴새 없이 몰아치는 축하 인사에 그제야 현실임을 깨달았다. 일일이 감사의 마음을 담아 전했다. 특히 가장 힘이 된 가족에게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승진하니 좋냐는 어느 선배의 물음에 '실감이 안 난다'고 답을 했더니, 일단 지금을 원 없이 즐기라며 기분을 북돋아 주었다.
'그만해야겠다' 생각했던 나를 잡은 한마디
하긴 직장 생활하며 승진보다 즐겁고 행복한 순간이 또 있을까. 승진이 발표된 이때만큼은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뻤다. 물론 이 또한 찰나요 곧바로 그만큼의 무게로 더욱 업무에 허덕일 것이 불 보듯 뻔하지만, 그때는 그때의 '나'가 잘 해내리라 믿는다.
정확히 4년 전, 본사에서 근무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고 고민했다. 그때까지 나는 교육 업무를 해왔는데, 예산 업무는 해본 적 없고 생소한 업무라 솔직히 두려웠다. 그래도 승진이라는 달콤한 유혹에 덥석 물었다. 근무해보니 업무 강도는 상상 이상이었다. 야근을 밥 먹듯 해야 했고, 낯선 업무로 인한 잦은 실수는 사람을 쪼그라들게 했다. 더구나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외부 기관에 사업 설명을 하고, 또 그 결과를 책임지는 데 대한 부담도 어마어마했다. 점점 삶은 피폐해지고, 시들어 갔다.
1년 차를 넘기고 2년 차에 다다랐을 무렵 '이제 더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와 포기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옆에 있던 친한 선배가 이런 말을 해주었다.
"신 과장. 많이 힘들지. 나도 그 마음 잘 알아. 그런데, 지금 신 과장이 하는 일은 베푸는 일이잖아. 예산을 받아서 직원들이 좀 더 좋은 근무 여건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니 얼마나 보람된 일이야. 조금만 더 버텨봐."
그 선배의 말은 큰 힘이 되었다. 사실 그랬다. 당시에 누가 알아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속한 기관이 조금씩 변화되는 모습에 조금씩 뿌듯함을 느꼈다. 그때부터 마음가짐을 달리 먹었다. 물론 여전히 일은 고되고 힘들었지만, 점심때 친한 동료들과 산책하며 하루치 힘듦을 털어내려 했다.
다행히 회사 주변에 녹지가 많아서, 자주 걸으며 자연이 주는 힘을 받았다. 전에는 혼자서 그 짐을 짊어지려 했다면 이제는 함께 나누며 털어내려 애썼다. 주말이 되면 가족들과 더욱 시간을 보내려 했고, 남는 시간엔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라는 취미 생활에 몰입했다.
신기한 점은, 가장 바빴던 시기에 오히려 글쓰기는 더욱 왕성해졌다는 것이다. 본부에서 있던 4년의 세월 동안 책을 4권이나 출간했으니 1년에 한 권을 낸 꼴이었다. 이런 취미 활동이 일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때마다 글에서 담아내 풀어내고 그 힘으로 일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승진은 녹록지 않았다. 하필 비슷한 연차의 직원이 몰려 그 안에서 인사 적체가 시작되었다. 예상했던 시기보다 늦어지자 점점 초조해졌고, 또다시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전과 같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흔히 승진은 운이 7일요, 능력이 3이란 말이 있는데, 열심히만 한다고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저 마음을 비우고, 지금 내 앞에 닥친 일을 잘 해내는 방법밖에 없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는 표현처럼, 하나둘 중도 포기자가 생기면서 암흑 속에 가려있던 승진의 문턱이 점점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에 마침내 끄트머리에서 승진할 수 있었다. 문 닫고 승진할 때의 짜릿함은 어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승진이라는 것이 참 그랬다. 같은 시기에 입사한 동기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승진의 차이는 반드시 있었다. 심지어 나중에 차이가 제법 나기도 했다. 그로 인한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다고 승진이 빠르다고 마냥 좋기만 한 걸까.
신입 사원 때 모셨던 부서장님이 남들보다 한 발자국만 정도만 앞서나가라는 조언을 해주었는데, 이제야 그 말의 의미를 알겠다. 초고속으로 승진한 사람은 주변의 시기 질투를 받게 되고, 나중에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차라리 비슷하거나 혹은 티 안 나게 조금 빨리 하는 정도가 딱 좋았다. 물론 그마저도 내 뜻대로 안 되기 일쑤지만 말이다.
MZ세대에게 승진이란
한편, 이런 나와는 달리 요즘 젊은 직원들은 전보다 승진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모습이 보인다. 내가 속한 직장 같은 경우도 승진에 조금이라도 이득이 있는 본사 근무 지원은 날이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이다. 직장이 전부인 듯 삶을 쏟아내기보다 적당히 할 만큼하고 남은 시간을 좀 더 여유롭게 보내며 나를 위해 투자하겠다는 생각인 듯하다. 저녁 있는 삶, '워라밸' 등을 꿈꾸면서 말이다.
올해 3월 15일부터 31일까지 잡코리아에서 MZ세대 직장인 1,114명을 대상으로 '회사 생활 목표'에 관한 설문조사를 했다. 그 결과 '회사 생활하며 임원까지 승진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45.2%만 '그렇다'라고 답했으며, 나머지 54.8%는 '임원까지 승진할 생각이 없다'라고 응답했다.
그 이유는 첫째,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가 부담스러워서가 43.6%로 1위를 차지했고, 다음으로는 '임원 승진이 어려울 것 같아서, 임원은 워라밸이 불가능할 것 같아서'가 차지했다. 승진에 관한 생각을 살펴보아도, 빨리 할 것 없이 남들과 비슷하게 승진하면 된다는 의견이 50.8%로 절반 이상이었다. 심지어 승진에 크게 관심이 없거나 승진하고 싶지 않다는 응답도 22.8%나 되었다.
이런 변화 자체가 나에게는 아직 생소하게 다가오지만, 일견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직장 생활하면서 총량의 법칙을 늘 깨닫는다. 일에 몰두하면 가정에 그만큼 소홀할 수밖에 없다는 것 말이다. 일과 가정 모두를 성취하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함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어차피 종국에 갈 수 있는 곳이 정해져 있다면, 아등바등하기보다 차라리 현재 삶을 좀 더 여유롭게 보내는 것도 현명한 듯 보인다. 일에 가치를 둘지 나머지에 둘지는 결국 본인 선택의 문제가 아닐까.
이제 나는 승진했기에 새로운 근무지에서 그만큼의 무게를 짊어지고 일을 해나가야 할 것이다. 그래도 하나 좋은 점은 당분간은 승진 결과에 마음 졸일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저 남의 일이려니 하며 편한 마음으로 지내보련다.
승진은 혼자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힘들 때도 계속 지지하고 믿어준 가족과, 든든한 힘이 되어준 동료들 덕분이라고 보고 그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블로그와 브런치에도 발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