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주 선생은 참으로 다양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큰 테두리로 나누어, 문인인가 하면 무인이다. <석주유고>에 담긴 수 백편의 시와 각종 산문은 웬만한 문인의 수준을 뛰어넘는다.
1913년 저술한 <대동역사>는 한국사의 계통을 단군의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를 중심으로 체계화시키고 한민족의 원류를 만주 중심으로 삼으면서, 조상의 옛 터에 자리잡고 독립운동을 하게된 배경을 살핀다. 민족사학자였다.
그런가하면 젊은 시절 <무감>이라는 병서를 저술할 정도로 병법에 조예가 깊었다. 망명지에서 주민자치단체인 친목단체 대신 군정부, 서로군정서, 신흥무관학교 등 주로 무장전쟁단체에 투신한 것이다.
선생의 유고 중에서 자작시 한 수, 3.1혁명을 주도하다 옥중에 있는 의암 손병희 회갑연에 보낸 시, 그리고 산문 한 편을 소개한다. 여기에 손부가 지켜본 임종기록을 덧붙힌다.
병자년(1916) 정월 대보름 밤에 우연히 읊다
풍상을 실컷 맛본 동해의 나그네
맑은 눈과 달의 정월 대보름 밤
골목에는 별인 양 등불들이 환하고
허공에서는 폭죽 소리 천둥인 양 요란하네
지사는 시절을 슬퍼하여 늘 피눈물 흘리고
아이는 말을 알면서부터 벌써 군가를 부르네
만사는 하늘로부터 정해진다는 것을 잘 알기에
잠시 숲으로 가서 자는 새들을 짝해보네. (주석 1)
최근 '자유'라는 말이 범람하고 있다. 선생은 1923년 <자유도설(自由圖說)>의 주제 아래 '참된 자유', '온전한 자유', '문명한 자유' 등을 지었다.
참된 자유
정욕(情慾)의 노예가 되지 말라.
남보다 뛰어난 재주를 지닌 자는 반드시 남보다 많은 욕심을 지니고 있다. 만약 남보다 많은 도덕심이 주인이 되지 못한다면 그 재주는 그 욕심의 노예가 된다. 그러므로 극기의 공부는 잠시라도 그쳐서는 안 된다
환경(環境)의 노예가 되지 말라.
인심이 생존경쟁의 경계에 서게 되면 우리의 곁을 둘러싼 환경이 밤낮으로 서로 싸우게 된다. 환경과 싸워서 이긴 자는 존립하게 되고, 싸우지 않고 환경에 압도되는 자는 망한다.
세속(世俗)의 노예가 되지 말라.
세속은 변화하여 무상하다. 장부는 마땅히 자립하여야 하니, 어찌 일거일동을 남을 따라할 수 있겠는가?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갈 수 있는 자가 최상이다. 그것을 할 수 없다면 구시대에 매몰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그 차선이다.
고인(古人)의 노예가 되지 말라.
고인도 또한 법을 말하여 당시의 폐단을 바로잡으려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결코 사서와 육경의 모든 것을 오늘날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이목이 있으니 나의 사물은 내가 격치(格致)하고, 내게 생각이 있으니 나의 이치는 내가 궁구(窮究)하는 것이다. 고인에 대해서는 스승으로 삼기도 하고, 벗으로 삼기도 하고 적으로 삼기도 해야 한다. (주석 2)
의암 손병희의 회갑연서
삼십 이년 간을 순식간에 덧없이 보내고서
태양의 상스러운 꿈이 그대의 몸에 내려왔네
인내천의 요지를 세 번째로 전해 받았으며
독립을 앞장서서 외쳐 조국을 새롭게 하였네
기꺼이 동포를 위해 몸을 지옥에 던졌나니
회갑을 당하여 회갑연 자리에서 송축을 하네
광란의 물결 속에서도 동방은 새벽을 향하나니
멀리 자애로운 배에 우두커니 섰다가 일찍 길을 묻네. (주석 3)
본문에서 가끔 인용한 '손부 허은'은 1907년 구미에서 태어나 9세 때인 1915년 아버지 허발을 따라 만주 양만현으로 망명하였다. 허은 여사의 고모가 시인 이육사의 어머니다. 16세가 되던 1922년 석주 선생의 손자 이병화와 결혼하고 시할아버지인 석주 선생을 곁에서 수발하였다.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는 석주 일가는 물론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생생한 모습이 적혀 있다.
석주 선생의 운명을 지켜보고 남긴 기록이다.
석주어른께서는 이어 환후가 망조(罔措)하실 뿐 미음도 못가져 오게 하시고 며칠을 냉수만 떠 넣어 드리면 "물이 천하제일이라" 하셨다. 동생과 단독수하(單獨手下) 부자분 앞에서 임종에 임박하여 밥물을 아주 묽게 해서 설탕을 타서 넣으라 해서 두 번을 떠 넣으니 손을 저어 못하게 하시고 이어 어음(語音)이 흐려졌다.
오월 열 이튿날이었다. 1932년. 그 전 해 가을 추석 지난 얼마 후 여시당과 이장녕 씨께서 총살당했다는 잘못된 소문을 듣고는 상심 끝에 발병하시어 7,8개월을 끌다가 낙명하신 것이다.
"내 간 후라도 한국땅이 되기 전에는 유해를 고향으로 가져가지 말라. 어느 때라도 광복 성공이 되거든 유지에나마 싸다 조상 발치에 묻어라." (주석 4)
태양은 떠 있어도 빛이 없던 어두운 시대를 깨어있는 영혼으로 당당하게 살았던 석주 이상룡 선생.
주석
1> <석주유고(상)>, 160쪽.
2> 앞의 책, 639쪽.
3> 앞의 책, 187쪽.
4> 허은, 앞의 책, 159~160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암흑기의 선각 석주 이상룡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