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글은 오랜 시간 말이었다. 어쩌다 보니 초중고 내내 교내 방송부 활동을 했는데, 점심시간 방송을 위해 매주 멘트를 적어야 했다. 글이라는 걸 쓸 줄도 모르고, 방송 언어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매주 글을 적었다. 결국 입으로 읽히기 위한 글이었기에, 방송 멘트는 내게 말도 글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의 언어였다. 라디오에서 들은 명언이나 책에서 읽은 좋은 글귀를 활용하거나, 날씨와 일상에 대한 흔한 이야기들을 주로 썼다.
말을 위한 글이었으므로 내용은 없어도 최소한 자연스러워야 했다. 읽어 내려가다 턱턱 걸리면 낭패였다. 쓰고 읽고 또 쓰고 읽어보는 게 일이었다. 그때는 내가 쓴 게 글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혼자 글이라고 끼적이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몇 년 뒤였다. 그때도 글이 크게 어렵다 생각하지 않았던 건, 내게 오랜 시간 글은 곧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읽히기 위해 쓰는 게 글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작가가 될 마음도 없고 잘 써야겠다는 욕심도 없으니, 그저 나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로 글을 이용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진입 장벽이 없었으니까. 글을 꼭 배워야 쓸 수 있다는 생각조차 내게는 없었다. 문예창작과를 지원하는 친구를 보고서야, 글도 배우는 학과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정도로 나는 글에 무지했다. 오랜 시간 방송부 활동을 한 건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였는데, 지나고 보니 남은 건 말이 아니라 글이었다.
글은 흘러가는 물이어야 한다
글을 처음 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백지 앞에서 얼어붙는다. 말을 해보라고 하면 술술 뱉지만, 그걸 쓰라고 하면 대체 어떻게 시작해야 하냐며 난감해한다. 그때 가장 먼저 건네는 말은 말하듯 쓰라는 것이다. 떠오르는 말들을 입으로 내뱉는 대신 활자화하면 글이 된다. 하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잘 쓴 글은 읽는 사람도 편하다. 난해한 용어가 없고 중언부언하지 않으며, 입에 착착 감기는 맛이 있다. 글은 흐름이다. 내용의 기승전결도 흐름을 만들어내지만, 언어의 리듬감이 유수 같은 흐름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중요한 건 말해보는 것이다. 글을 직접 읽어보는 것. 읽어보면 안다. 무엇이 걸리는지. 어디가 이상한지.
그러니 말하듯 쓰라는 조언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런데도 처음 쓰는 사람들은 자꾸 망설인다. 그럴듯한 첫 문장을 써야 한다는 생각에, 글은 무게가 있어야 한다는 이상한 믿음에, 시작은 하지 않고 쩔쩔 매기만 한다. 글을 거대한 벽으로 상정해 두고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한다.
글쟁이들의 선생님이라 불리는 이오덕은 '글=문학'이라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이 글쓰기를 힘들어 한다고 지적했다. 어려운 말을 많이 쓰는 세태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될 수 있는 대로 민중이 잘 안 쓰는 말을 써서 유식함을 자랑하고 싶어 하거나, 적어도 너무 쉬운 말을 써서는 자기가 무식하게 보일 것을 염려하는 것이 글쟁이들에게 두루 퍼져 있는 버릇이다." - <우리 글 바로 쓰기, 이오덕>
자신의 글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자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이 있을까. 아무리 글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첫 글부터 잘 썼을 리 없다. 인정 받는 작가라 해서 사랑받는 글들을 갑자기 뚝딱 적어냈을까. 좀 서툴더라도, 좀 부끄럽더라도, 그냥 써보는 것 만큼 중요한 건 없다. 글은 대단한 게 아니지만, 쉽게 정복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다. 글이 매력적인 건, 누구나 쉽게 시작할 수 있지만, 누구라도 완전한 글을 쓰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글을 잘 쓴다는 작가들도 자신이 쓴 초고는 쓰레기라고 말한다. 쓰고 고치고 다듬고 피드백을 받아 또 바꾸는 게 글이다. 작가들도 이런데 처음 쓰는 사람이 완벽한 글을 쓸 리 없다. 중요한 건 자신이 써낸 어떤 글이라도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듯 자신이 쓴 글도 오롯이 사랑해야 한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괜찮으면 괜찮은 대로. 사랑만이 글을 온전하게 한다. 사랑만이 삶을 그나마 살만하게 하듯 글도 마찬가지.
글쓰기 모임을 열면서 가장 먼저 멤버들에게 강조한 건, 내 글과 타인의 글을 비교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공개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면 자신도 모르게 남의 글을 흘끔거리게 된다. 남의 글이 더 나아보이면 쓰기를 주저한다. 비교하고 순위를 가르기 위해 글을 쓰는 게 아니다. 글을 쓸 때 목표로 해야 할 건 어제의 내 글보다 나은 글이지, 타인의 글이 아니다.
삶도 그렇지만 글도 결국 자신의 글에 얼만큼 애정을 갖느냐가 중요하다. 내 글을 사랑하는 건 나를 사랑하는 일과 맞닿아 있다. 나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거침 없이 글도 쓴다. 그걸 모른다 해도 기죽을 필요는 없다. 쓰는 삶은 나를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기도 하기에. 결국 쓰고 또 쓰면 더 나를 사랑하게 된다.
자존감을 높이는 지름길, 글쓰기
자존감이 턱없이 낮은 나는 한때 대인기피증에 시달렸다. 살이 많이 쪘을 때도 그랬고, 제주로 이주한 뒤 상처를 받았을 때도 그랬다. 새로운 곳에서 잘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상처는 더 크고 깊었다. 아이를 키우며 나는 집으로 숨어들었다.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사람을 만나지 않고 사는 게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숨어 살아도 괜찮다 생각했고, 영원히 이렇게 살 수 있다고 여겼다.
아이를 어느 정도 키우고 나니 내가 원하지 않아도 나는 사회로 다시 나가야 했다. 아이가 자꾸 내 손을 잡아 끌었다. 세상 밖으로 나가자고, 바깥 세상이 궁금하다고. 첫째가 기관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알았다. 아이뿐만 아니라 나 역시 다시 사회로 나왔다는 걸. 쓰나미처럼 세상이 내게로 다시 밀려오는 것만 같았다.
내가 사람 만나기를 무서워한 건 사람이 싫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을 너무 좋아하지만, 관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불협화음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사람들이 무심코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쉽게 상처를 받다 보니, 관계를 넓히는 게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침 그 무렵부터 글을 매일 쓰기 시작했다. 사람을 대면할 용기는 없지만, 글로라도 만나고 싶은 마음은 컸던 것 같다. 처음에는 그저 매일 쓰는 것에 집중하다가, 습관이 잡힌 뒤에는 글 하나하나에 정성을 다했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내 글은 하나의 작품이라는 생각으로 쓰고 다듬었다. 정성을 다할수록 내 글을 사랑하는 마음이 커졌다. 내 글을 사랑하자 나를 사랑하는 마음 또한 자라났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커지자 세상 밖으로 나갈 용기도 조금씩 생겼다. 글쓰기 모임을 꾸리고 아이 학교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이전 같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늘 의기소침했던 내가 얼마 전에는 자존감이 원래 높은 사람인 줄 알았다는 말을 들었다. 쓰기의 힘이고 생각의 힘이다. 내 글을 사랑하는 마음이 결국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어졌다.
영원히 방 안에만 처박혀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결국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관계를 끝내 피할 방법은 없다.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멘탈을 장착하면 아무리 싫은 소리가 들려도 내가 가고자 하는 길로 곧게 나아갈 수 있다. 이제는 귀 기울여야 할 소리와 적당히 걸러야 할 소리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글쓰기보다 더 빨리 자존감을 회복하는 방법을 나는 아직 모른다. 그러니 글을 안 쓸 도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