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어린이집 앞까지 근조화환이 쌓여가고 있다."
3일 오전 8시 40분 서울 여의도 KBS 본관과 신관을 둘러싸고 근조화환 250여 개가 400m 가량 늘어서 있었다. 화환에는 '편파 방송 중지' '시청료 폐지' '민노총(민주노총) 대변인 김의철 사퇴하라' 같은 말들이 검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을 찬양하거나 KBS가 '종북 방송' '간첩 방송'이라는 극단적 주장도 심심찮게 보였다.
보수·우파단체 'KBS정상화범국민투쟁본부(투쟁본부)'는 매일 이곳에서 텐트를 치고 집회를 벌이고 있다. KBS 경비 관계자에 따르면, 이들은 지난 6월 6일 KBS 입구에 근조화환을 설치했고, 신관 내부로 들어와 고함을 지르는 등 난동을 부렸다고 한다. KBS는 6월 21일부터 임직원 보호를 이유로 신관 로비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신관 내 취재 역시 통제됐다. 이날 본관 안내 데스크의 한 직원은 "개인이 출입하려면 아는 직원에게 부탁하거나, 담당자에게 말씀드려서 예약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오전 9시 무렵 KBS 입구 양쪽에 즐비한 화환을 지나가는 직원 10여 명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대부분 꺼리며 응하지 않았다. 한 KBS 기자는 "회사 전체를 삥 두를 정도로 근조화환이 많은데, 무언가 압도하는 느낌도 있고 사내 분위기에도 영향을 주는 것 같다"며 "개개인의 의사 표현을 함부로 재단하긴 어렵지만, 회사 어린이집 앞까지 쌓여가는 화환들을 보면서 이걸 단속할 방법은 없는지 궁금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오전 11시 30분께 본사 입구에서는 'KBS 살리기 조화투쟁 선언 기자회견'이 열렸다. 유튜브 채널로 방송을 생중계하는 보수 유튜버 다섯 명이 현장에 모였다. 15분쯤 지나고 다섯 채널의 시청자 수를 합하니 700명이 훌쩍 넘었다. 생중계를 하던 한 남성은 "유튜브 채널 '이영풍TV'를 운영하는 이영풍 KBS 기자가 매일 시작 시각을 카톡(카카오톡)으로 보내준다. 카톡이 오면 입구에 있는 농성 텐트 앞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한다"고 했다.
이들의 요구사항은 화환에 적힌 대로 크게 두 가지다. 수신료 분리 징수 추진, 그리고 KBS 사장 퇴진을 통한 공영방송 정상화다. 박준식 투쟁본부 사무총장은 "내일(5일)이면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에서 KBS 정상화를 위한 수신료 분리 징수를 의결한다"며 "범국민행동을 통해 수신료가 올바르게 쓰여서 KBS가 국민의 공영방송 역할을 잘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기자회견 도중 한 유튜버는 욕설을 하면서 타사 사진 기자와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이들은 지난 6월 12일부터 3주 넘게 매일 이곳에서 기자회견을 열어왔다.
"공영방송 장악의 도구 아닌가"
이들은 표면적으로 수신료 분리 징수와 사장 퇴진을 외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행보가 정부·여당의 공영방송 장악 시도와 닿아 있다는 지적이 KBS 안팎에서 나온다.
권순택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처장은 "방송법에 따르면 수신료를 분리 징수한다고 해서 수신료 납부 의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면서 "수신료 통합 고지를 하지 않을 경우 징수율은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 이에 대한 후속방안 없이 분리 징수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설명했다.
정부·여당은 아직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았지만, 방통위는 지난 6월 14일 KBS 수신료 분리 징수를 위한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을 내놓았다. 대통령실 권고가 있은 지 10일 만의 일이다. 오는 5일 방통위는 전체회의에서 시행령 개정안을 의결할 예정이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후 KBS를 둘러싼 정부·여당의 압박은 계속돼왔다. 지난해 8월 감사원은 KBS 감사 개시를 결정했고, 올해 3월 대통령실은 한 달간 국민제안 홈페이지를 통해 KBS 수신료 분리 징수 안건을 국민참여토론에 부쳤다. 그 사이 감사원은 세 차례(2022년 12월, 2023년 2월, 2023년 4월) 감사를 연장한 끝에 5월 1일 '한국방송공사(KBS)의 위법·부당 행위 관련 보고서'를 발표했고 약 9개월만에 받아든 결과는 '청구항목 위법 없음'이었다.
하지만 여권의 공영방송 압박은 갈수록 거세졌다. 지난 2월 정연주 방송통신심의위원장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정치 심의' 비판에 대해 국민의힘은 2022년 기준 1369건 민원을 제기한 것으로 나타났다. 2020년(202건), 2021년(504건)에 비해 크게 늘어난 수치다.
여권은 편향보도와 방만 경영 문제를 지적하지만, 내부에서는 '공영방송 장악 시도'라는 반발이 나온다. 익명을 요청한 한 KBS 관계자는 "수신료 분리 징수가 아닌 언론 장악이 문제의 핵심"이라며 "여권은 '불공정' 프레임을 만들고, 국민참여토론 찬반 투표를 통해 여론을 조성하고, 방송·통신 관련 민원을 집중적으로 제기해 방심위의 법정 제재를 이끌어내고자 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본인들이 추천한 인사가 다수를 차지하도록 해 공영방송을 장악하는 도구로 삼으려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고 덧붙였다.
한편 지형철 KBS 기자협회장은 "집회가 계속되다 보니 일하는 데 지장을 받거나 피로감을 호소하는 기자들이 많다"며 "영등포구청에서 화환 철거 등과 관련해 규정대로 처리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의사전달 넘어선 폭력... KBS 구성원 위축 우려"
이처럼 보수단체·유튜버가 정부·여당과 마치 한배를 탄 것처럼 움직이는 것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KBS 바깥에서도 나오고 있다. 권순택 사무처장은 "단순한 개인의 의사전달을 넘어서는 폭력적인 행위"라며 "KBS 구성원들이 내부적으로 고립되고 위축되는 효과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신미희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은 "KBS 앞에서 위협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집회·시위를 벌이는 분들은 지금의 집권 여당을 지지하고 있다. 실제로 두 곳에서 나오는 주장이 거의 동일하다"며 "이것이 지지자와 여당의 상호 교감인지 사전 교감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지금처럼 위법적이고 반인권적인 행태로 여당을 지지하게 되면 정부 정책의 정당성 역시 공감받기 어려울 것"이라고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