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에 몹시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에 대한 생생한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와인을 더욱 맛있게 마시려는 집요한 탐구와 모색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편집자말] |
미식가를 자처하는 초등학교 4학년 둘째는 종종 특정 음식이 머릿속에서 맴돈다며 어서 먹으러 가자고 조르곤 한다. 그 행동의 뜬금없음과 맥락없음은 마치 어떤 초월적 존재로부터 신탁을 받은 게 아닌가 싶은 정도다. 벌이가 시원찮은 작가이지만 자식이 먹고 싶다는데 어떻게든 사줘야 하지 않겠나. 신라호텔 중식당 팔선에 가서 1인분에 20만 원 하는 불도장 요리를 내놓으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번 신탁은 힌두교 신 파르바티로부터 받았나 보다. 인도 커리를 격하게 먹고 싶다니 말이다. 다행히 그 정도면 아빠의 경제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구나. 그나저나 네가 아직 불도장 맛을 모르는 게 참으로 다행이다. 그렇게 둘째의 신탁을 받들어 온 가족이 영등포 타임스퀘어에 있는 인도 음식점을 방문했다.
커리 맛보고 생각난 시음 와인
성인 둘에 중학교 1학년, 초등학교 4학년 가족이 먹기에 적당한 세트 메뉴를 주문했다. 이내 서빙 직원이 음료부터 시작해서 치킨 티카(순살 탄두리), 커리, 난을 차례차례 테이블로 가져다주었다. 졸깃한 식감을 즐기는 중학생 첫째가 기다렸다는 듯 팔을 쑥 뻗어 난 하나를 집어 든다.
이날 주문한 커리 둘 중에서 유독 맛있었던 건 매콤한 칠리와 양파, 토마토 소스에 크림을 넣고 파니르(치즈)를 더했다고 메뉴판에 친절하게 소개된 '파니르 버터 마살라'였다. 육류를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 아내가 선택한 커리인데, 특유의 진한 향신료 향에 버터와 치즈의 눅진한 감칠맛이 어우러져 밥도둑 아니 난도둑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결국 난을 추가로 더 주문했다.
아내도 자신이 선택한 커리가 맛있어서 흡족해하는 모습이었다. 딱 하나 아쉬운 것은 음료였다. 세트 메뉴로 선택한 음료는 망고 라씨, 탄산수,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커피를 좋아하는 아내가 시켰고, 탄산수는 깔끔한 물을 선호하는 첫째 몫이고, 망고 라씨는 인도 음식이니 깔맞춤으로 주문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카페인을 섭취한 아내는 다음 차례로 망고 라씨를 먹어보더니 한 마디 툭 던진다.
"커리의 느끼한 버터 향과 망고 라씨가 그다지 어울리지 않네."
"맞아. 나도 동의해."
"갑자기 스파클링 와인이 마시고 싶어졌어. 커리하고 잘 어울릴 것 같아."
"근사한 아이디어야. 커리나 치킨 티카는 풍미가 진하고 향신료 향이 강하니까 스파클링 와인 중에서도 화이트보다는 로제가 좋을 것 같아."
얼마 전 스페인 토레스 와인 시음회에서 만난 로제 스파클링 와인 '에스텔라도 브뤼 로제'가 불현듯 떠올랐다. 파이스(Pais)라는 생소한 칠레산 포도로 만든 와인이다. 그날 제공됐던 토레스 사의 와인 10종 중에는 블라인드 테이스트에서 무려 샤토 라투르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한 마스 라 플라나, 수령 100년 이상의 포도나무에서 생산된 포도로 만든 만소 데 벨라스코 같은 고급 와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가장 저렴한 축에 드는 이 로제 스파클링이 유독 인상 깊었다. 평소 저가 와인에 절어진 내 싸구려 입맛 탓도 있겠으나 스모키한 뉘앙스에 신선하고 상큼한 풍미가 진심으로 매력적이었다. 누군가 흙 묻은 딸기 같다고 하던데, 이 와인의 캐릭터를 촌철살인으로 표현한 말이 아닐 수 없다. 할인하면 2만 원대에 판매하는 와인에서 이런 맛이 느껴지다니. 언빌리버블!
저렴한 와인을 적절한 음식과 매칭시켜 십만 원대 와인을 마시는 수준의 만족도를 끌어내는 것이 내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와인 라이프다. 하여 인도산 커리와 칠레산 흙 묻은 딸기, 이 둘의 만남을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시뮬레이션해 보았다.
은은한 마늘 향에 갓 구워져 구수한 빵 냄새를 풍기는 갈릭 난을 집어 든다. 먹기 좋은 크기로 찢는 행위에서부터 그 꺾이지 않는 졸깃함이 느껴진다. 팔근육을 잔뜩 긴장시켜 간신히 찢어낸 난 조각을 진득한 커리에 반신욕 하듯 푹 담근 후 입에 넣는다.
향신료 특유의 맵싸함이 구강 내 이곳저곳을 들쑤시는 가운데 감칠맛 나는 버터 향기가 은은하게 감돈다. 난 특유의 질겅질겅 질감을 탐닉하다 보면 무언가를 씹는다는 행위가 이렇게나 즐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제 흙 묻은 딸기 등장! 시음회 때의 기억을 떠올려 VR 게임의 주인공이 된 듯 생생하게 한 모금 마셨다. 향신료의 화한 여운이 남은 자리에 놀이터 아이들 같은 탄산 기포가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닌다. 참으로 발랄하고 경쾌하구나. 그 뒤로 하나도 달지 않은 은은한 딸기향이 숲속 흙내음과 뒤섞여 차분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오! 확신했다. 이건 도무지 실패할 수 없는 조합이야!
곧바로 와인 수입사에 연락해 '에스텔라도 브뤼 로제'를 할인가 2만 원대로 구입할 수 있는 판매처를 수소문했다. 마침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 이벤트프라자에서 행사가격 2만5천 원에 판매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서는 냉큼 방문해 두 병을 구매했다.
인도 음식과 궁합이 좋은 술은?
적당한 날을 잡아 온 가족이 다시 출동했다. 방문 전에 와인을 가져갈 수 있는지 문의했는데 콜키지 비용 1만5천 원을 지불하면 가능하다고 답변받았다. 기포를 감상하기 좋은 기다란 플루트잔이 식당에 없다고 하길래 두 개를 가방에 챙겼다.
지난번과 동일한 세트 메뉴를 주문하는데 추가 비용을 내면 선택이 가능한 스텔라 아르투아 맥주가 눈에 띈다. 아내와 내가 즐겨 마시던 맥주라 반가웠다. 인도 음식과의 궁합을 놓고 와인과 한판 대결을 붙이면 재밌을 것 같아 주문했다. 커리를 함께 먹으며 스텔라 아르투아 맥주와 로제 스파클링 와인을 비교 시음했는데, 아내와 나 모두 와인의 압도적 승리라고 판정했다.
맥주는 청량하지만 싱겁고 단조롭다. 와인은 입맛을 돋우는 산미가 골간을 형성하는 가운데 과실향과 청량함이 탄탄하게 살집을 채워 상대적으로 꽉 찬 느낌을 준다. 만 원에 네 개 살 수 있는 500mL 캔 맥주, 750mL 한 병에 2만5천 원 하는 와인, 이 둘을 견주는 게 애초에 미스 매치이기는 하다. 100mL당 가격을 계산하면 스텔라 아르투아는 500원, 에스텔라도 브뤼 로제는 3,333원이니 거의 7배 차이다. 헤비급과 경량급의 싸움이나 다름없다.
이번에는 치킨 티카와의 궁합을 테스트해 보았다. 세트 메뉴에는 두 종류의 치킨 티카가 제공되는데 매콤한 맛, 그리고 순한 맛이다. 둘 다 먹어본 결과 매콤한 녀석과 에스텔라도 브뤼 로제의 조합이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놀라웠다. 이게 과연 실화인가 싶어서 고개를 가로젓고 정신을 가다듬은 후 재차 검증할 정도였다. 닭고기를 먹지 않아 이 극상의 조합을 영접하지 못하는 아내 처지가 안타까워 한 마디 건넸다.
"이거 진짜 역대급 궁합인데 딱 한 번만 먹어볼래?"
"알잖아, 나 닭고기 안 먹는 거."
"참 아쉽네. 그나저나 이 정도로 맛있으면 굳이 비싼 샴페인 안 마셔도 되겠다 싶어."
"맞아. 와인도 참 만족스럽고 커리와 정말 잘 어울려."
역시 가성비 하면 칠레 와인이다. 지금까지 마셔본 2만 원대 와인 중 손가락에 꼽을 만한 기량이다. 저가 로제 스파클링 와인에서 간혹 감지되는 쓴맛 또는 딸기주스 느낌이 없어서 마음에 쏙 든다.
처음 시도해 보는 인도 커리와의 조합으로 역대급 만족도를 느끼기까지 했다. 생각해 보니 이게 다 둘째가 받은 신탁의 영험함 덕분이구나. 다음번 신탁은 또 어떤 신으로부터 받으려나. 새로운 음식과 와인의 궁합을 시도할 생각에 벌써 입에 침이 고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