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두드리며 차이나타운으로 접어들었다. 입구에서부터 다양한 품목을 파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잘 익은 과일들을 먹기 좋게 잘라 놓은 집부터 어디선가 얼핏 본 디자인의 가방을 파는 집까지 다양하다. 지붕이 있어 강렬한 오후에도 걸을 만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중심가를 벗어나니 오전의 비로 인한 습한 바람과 햇살이 버티고 있지만 못 본 척 걸음을 재촉했다. 짧은 여정의 여행자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도로 한편에 '관디 템플(Guan di Temple)'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그 관운장을 모시는 사당으로 관우를 전쟁의 신이자 재물의 신으로 섬기는 도교 사원이다. 안에는 향을 피우고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왜 중국 사람들은 관우를 좋아하는 거지? 중국인이 좋아하는 역사적 인물, 뭐 이런 거 하면 늘 열 손가락 안에 들던데?"
청룡언월도를 손에 들고 근엄하게 앉아 있는 관우를 바라보며 일행이 소곤거렸다.
"삼국지 인물 중 가장 비현실적이잖아. 적벽 대전에서 패하고 도망가는 조조를 살려주는 것 봐. 제갈공명이 조조를 놓치면 목을 친다고 이미 선포했잖아. 그러니까 관우가 조조를 살려줄 때는 자기 목숨을 건 거야. 이렇게 의리를 소중하게 여기는 인물이 현실에 있겠냐고. 우리는 살면서 누굴 만날 때마다 뒤통수 맞기 바쁜데 목숨 걸고 은혜를 갚는 사람이라니, 너무 대단하지 않아? 그게 사람들의 심금을 딱 때려버리는 것이지."
"정말 만나는 사람들에게 뒤통수만 맞고 살았어? 나한테도 맞았어?"
일행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아니, 뭐 말이 그렇단 거지."
관디 템플을 나와 몇 걸음 걷자 화려한 색감의 사원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쿠알라룸푸르에서 제일 오래된 힌두교 사원인 '스리 마하 마리암만' 사원이다. 사원 입구까지 늘어선 사람들은 웃통을 벗은 채 기도에 열중하고 있었다. 피워 놓은 향 때문에 뿌옇게 보이는 문 안 쪽으로 고개를 숙이는 사람, 나무줄기 같은 것으로 자신의 몸을 치는 사람, 손을 모으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다들 집중하고 있는 모습에 안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인도인들은 1877년부터 말레이시아 내 고무 농장의 노동자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중국인과는 달리 고무 농장의 계약직 노동자로서 농장에 소속되어 있었다.
중국인 커뮤니티처럼 파벌을 지어 세력을 늘리기에는 인도인 특유의 카스트 제도와 다양한 종교와 언어가 벽이 되었다. 인도인들은 고무 농장을 시작으로 벽돌 생산과 철도 노동자, 철도 관리자 등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데 그 시작점이 된 곳이 바로 '스리 마하 마리암만' 사원이다.
사원들을 둘러보는 것은 이쯤에서 만족하고 센트럴 마켓으로 향했다. 쿠알라룸푸르의 길에는 횡단보도와 신호등이 존재한다. 다만 그것을 따르는 현지인들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대충 차가 없으면 건너고, 차가 오면 멈춘다.
횡단보도에 초록색 불이 켜졌다고 차가 설 것이라고 안심해도 곤란하다(많은 비율로 차가 멈추긴 하지만 운전자 입장에서도 보행자가 없다고 판단되면 슬금슬금 지나간다). 센트럴 마켓으로 가는 도로 역시 차가 꽤 많았는데 눈치껏 건너는 현지인을 따라 우리도 빨간 불에 길을 건넜다.
1888년 영국 총독부의 주도로 현재 센트럴 마켓 주변이 시장으로 개발된다. 많은 상점이 모였던 공간은 1985년 해체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1986년 새 단장을 마치고 지금의 '센트럴 마켓'으로 변신했다. 마켓 안에는 에어컨 바람이 시원하다. 자연스럽게 뭐라도 사주겠다는 마음이 든다. 1층에는 공예품과 기념품을 파는 상점들이 2층에는 말레이시아 전통 직물과 의류를 파는 상점들이 자리 잡고 있다.
"언니, 이뻐요."
히잡을 쓴 50대 여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우리는 걸음을 멈췄다. 상업적 멘트라는 것은 알지만 한 번쯤 넘어간다고 문제 될 것이 뭐람. 정가표가 붙어 있는 것도 아니니 바가지를 쓸 확률도 있지만 그래도 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것저것 옷을 뒤적였다. 마침내 집어 든 원피스 한 벌이 우리 돈 만 원. 나쁘지 않다.
"더 이상 돌아다니는 것은 무리야."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이쯤 해서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기로 합의했다. 너무 덥다.
호텔로 돌아가는 그랩(공유차량 업체)을 호출한 우리는 센트럴 파크 조형물 앞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더위 때문에 특별히 뭘 하고 싶다는 투지도,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심지어 식욕도 사라졌다. 이 땅에서 계속 살아온 말레이인들 역시 그렇지 않았을까?
에어컨 같은 문명이 없이 이렇게 더운 곳에 살기 위해서는 지금 같은 날씨에는 몸을 움츠리고 최대한 게으르게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말레이인들의 심정을 백 번 이해했다. 하지만 영국인들의 생각은 나와 달랐다.
팡코르 조약 이후 말레이시아의 인구 중 말레이인의 비율은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진다. 중국인과 인도인의 유입이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영국인이 보기에 '게으른 말레이인'은 경제적 활용 가치가 적었다. 대신 더 근면한 인종으로 생각되는 중국인과 인도인의 이민을 적극 장려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말레이인 우대 정책'이라는 이름의 제도를 만들었다. 술탄의 형식적, 의례적 지위를 보장하고 말레이 귀족들의 자제는 식민지 하급 관료로 채용했다. 말레이인의 전통 사회와 문화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말레이인 대부분은 농촌에 머물게 했다. 당연히 말레이인 사회는 근대화의 흐름에서 멀어졌다. 대신 이민족 집단들이 식민지 자본주의의 하부 담당자가 되어 근대화되고 교육받으며 일정 정도의 부도 손에 넣게 되었다.
1930년대 세계 대공황은 말레이시아의 경제에도 타격을 준다. 더 많은 중국인들이 말레이시아로 모여든다. 1891년부터 1931년 사이 말레이시아를 구성하는 인구 중 말레이인은 35프로, 중국인인 42프로, 인도인은 22프로였다. 페낭, 말라카, 싱가포르 및 쿠알라룸푸르의 비말레이화는 이보다 훨씬 심했다. 지금 말레이시아 사회에 퍼져 있는 인종 갈등은 자연 발생한 것이 아니다 영국 식민 시대를 거쳐 생겨난 유산이다.
이렇게 영국인들의 필요에 따라 소수의 말레이인들이 사회 상층부를 점령했다. 사회의 부는 중국계의 손에 들어 있었다. 대다수 말레이인들은 교육 수준이 떨어지고 가난했다. 이제 영국인이 빠져나갔을 때 이 사회는 어떻게 움직였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지안의 브런치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