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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연극으로 데뷔해 영화와 연극, 드라마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배우 김지성의 사는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드라마 '전체리딩' 날이었다. 넓은 리딩룸에 첫 발을 들일 때의 어색함이 마치 새학기 첫 날 교실 앞에서 쭈뼛대고 서성거리는 느낌과 매우 흡사하다. 전 배우, 스태프들의 상견례 자리이기도 한 만큼,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임에도 지병처럼 찾아오는 낯설음을 도무지 떨쳐낼 수 없다.

혹여 예전 작품에서 함께 했던 동료가 살짝 인사라도 건네올 땐, 같은 반이었던 친구를 재회한 것처럼 안도의 한숨도 내쉬어진다. 그 기쁨도 잠시, 거대한 회의용 테이블 위에 각자의 이름이 표기된 팻말, 책 대본이 놓인 자리를 찾아 조신하게 앉고 보면 풀렸던 긴장감도 다시금 조여온다. 작품이 끝난 후 쉬었던 길이만큼 떨림의 크기도 비례하는 법이다.

배우들 사이에 놓인 꽃다발의 정체
 
 전체리딩 날 받은 꽃.
전체리딩 날 받은 꽃. ⓒ 김지성

배우는 다른 직업군에 비해 '처음'이란 문턱을 자주 넘게 된다. 작품이 들어감과 동시에 입사이고 끝나면 퇴사인 곳이다. 일년에만 '처음'을 수차례 맞이하는 경우도 생기며 배우, 스탭 등 수많은 동료분들과 초면의 낯선 공기를 단숨에 들이키고 각자 맡은 역할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작품 수가 늘어갈수록 여유 또한 생기지 않을까 싶지만, 막상 출발선상 앞에 섰을 때 초기화 되어 있는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 온 몸에서 땀샘 활동이 분주해진다.

화기애애하게 담소 나누는 풍경을 복학생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나 혼자 처음을 마주할 배짱이 없구나...!' 싶어 고개가 절로 숙여질 무렵, 갑자기 배우들 사이사이로 살포시 놓여진 꽃다발. 휘둥그레해진 눈으로 출처를 궁금해하니 감독님께서 직접 준비해온 선물이라고 제작진이 귀띔해 주었다. 잠시 후, 다소곳이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에게 머리숙여 읍절하고는 말문을 여신 감독님.

"오늘의 '첫만남'을 앞두고 설레여 사실 어제 한숨도 못잤습니다...!"

오랜 시간 입봉작을 위해 걸어온 노고의 시간, 선장으로서 짊어진 부담감을 오히려 감사의 꽃으로 표현한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내 긴장은 감히 비할 바가 못되었다.

이어 작가님도 두 손 모으고 일어나 "드라마 집필이 '처음'이었는데, 캐스팅된 배우 한 분 한 분 전달받고 스스로 복받았다 생각했습니다. 모두가 저의 '첫사랑'이 될 거 같습니다"라며 떨리는 목소리로 수줍은 소녀의 고백처럼 소감을 전했다. 어젯밤까지 수정 대본이 전달될 만큼 무탈한 첫 출항을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음이 역력해 보였다.

노장의 선생님들께서도 모든 출연작을 항상 첫 작품이라 생각한다며 '처음'의 떨림을 굳이 숨기지 않으셨다. 그 말씀은 매번 마지막 작품으로 여긴다는 것과 같다. 또한 오랜만에 주연을 맡게 되어 기쁘다면서도 막중한 임무에 대한 책임감을 피력하셨다.

혼자만 끙끙 앓고 있는 줄 알았던 '처음'에 대한 중압감을 고해성사하듯 다함께 공유하고 나니, 무거웠던 마음의 짐은 어느덧 설렘으로 일렁거렸다. 유일하게 이 모든 것에서 초연했던 배우는 극중 역할로 참석한 강아지 '까르'뿐이었다. 내년에 연기 은퇴를 앞두고서 흔들림없는 편안함으로 바닥에 배를 붙이고 나른하게 강냉이 간식을 즐겼다.

여느 때보다 일이 귀한 시기여서 그런지, 단막극임에도 모두가 '처음'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들어와 하나의 우주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 초심이 깨지지 않도록 촬영 내내 진중히 다루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곳이 우리들의 '일터'입니다 
 
 드라마 '산책' 장면
드라마 '산책' 장면 ⓒ tvN

첫 촬영에 나서기 전까지 배우는 역할에 대해 끊임없이 사전점검을 거듭한다. 대본 습득부터 의상, 소품체크까지 허투루 대할 것이 없다. 신기하게도 ​리딩 때 떨림을 고백하던 모두가 현장에서 티끌만한 실수도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처음'의 긴장감을 극복하기 위해 그 이상의 준비를 갖췄기 때문 아닐까.

이따금 촬영 중간에 나누는 정담들은 서로에게 단비같은 위로와 버팀목이 되어주기도 한다. 때때로 찾아오는 삶의 문턱을 선생님들께서는 어떻게 넘으셨는지 여쭙고 싶었다. 그러나 고된 현장을 묵묵히 순응하며 임하는 모습에서 고목처럼 단단하게 버텨온 인고의 세월이 느껴져, 품고 있던 질문은 보잘 것 없는 먼지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촬영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흐르는 강물처럼. 감독님은 티타임도 마련하는 등 배우들 간의 어색함을 연신 배려했고, 현장의 예민함이 번지지 않도록 촬영내내 차분히 이끌어 나갔다.
 
 드라마 마지막 촬영날 받은 꽃다발.
드라마 마지막 촬영날 받은 꽃다발. ⓒ 김지성
 
마지막 촬영날엔 유종의 미를 뜻하는 꽃다발까지 한번 더 안겨주었다. 당신의 '처음'이 무엇 하나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임을, 매 순간 정성을 들일 때마다 체감되었다. 감독님께는 그 이후로도 틈틈히 감사의 메시지가 온다.

배우들 역시 끝없이 읊조리고 떠올렸던 대사와 장면들 모두 카메라 안에 차곡차곡 담아넣고, 또 한 편의 작품을 기억의 저편으로 떠나보냈다. 한 몸처럼 느끼고 숨쉬었던 역할과도 작별할 시간이다. 함께한 동료들과 더 깊은 대화도 나눠보지 못한 채 언제일지 모르는 다음을 기약한다.

만남과 동시에 이별이 매번 순환되고 있는 곳, 잠시 멈췄어도, 다른 생업에 종사하다가도, 귀향을 했다가도 심장이 뛰어 달려오는 이곳은 사랑하는 우리들의 '일터'이다.

'처음'은 또 찾아온다. 오랜 기다림이든, 짧은 간격을 두고서든, 항상 다를 바 없는 떨림으로 다가와 송두리째 온 마음을 흔들어놓고 이별의 공기 속으로 홀연히 사라진다. 야속하리만치 미련없이. 그럼에도 여전히 짝사랑처럼 '처음'을 기다린다. 다시 설레이고 싶어서. 처음. 그 두근거림. 진정 살아있기에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진동이다.
 
  tvN 드라마 '산책'의 한 장면.
tvN 드라마 '산책'의 한 장면. ⓒ 스튜디오드래곤

#처음#설렘#두근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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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은 배우이며, 끄적끄적 글쓰는 취미를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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