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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스포일러가 일부 담겨 있습니다.

영화를 자주 보는 편이다. 어쩌다 가족들과 떨어져서 혼자 지내는 '기러기'가 된 최근 몇 개월 동안 더 그랬다. 집에서 혼자 밥 먹을 때나 별 생각 없이 쉬고 싶을 때, 종종 영화나 드라마를 봤다.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두루두루 추천하는 영화, 어딘가에서 우연히 접하고 흥미를 끈 영화 등등을 따로 메모해 두기도 한다. 하지만 막상 볼 영화를 고를 땐 가볍고 재미있을 영화 쪽으로 손이 간다. 가끔 혼자 영화관에 가서도 그런다.

최근에 제일 재밌게 본 영화는 속칭 '가오갤'이라는 약칭으로 잘 알려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 Volume 3>이었다. 모처럼 쉬겠다 맘먹고 영화를 보는 것인데, 되려 심각하거나 우울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작동하는 것 같다. 그래서 <토리와 로키타>도 연구소 상임활동가 동지들의 추천과 기고 요청이 없었다면, 오랜 시간 보지는 않았을 영화였을 수 있겠다.
 
 아프리카 베냉에서 벨기에로 이주한 두 청소년 토리와 로키타는 불안정한 환경 속에서 노동 착취에 시달린다.
아프리카 베냉에서 벨기에로 이주한 두 청소년 토리와 로키타는 불안정한 환경 속에서 노동 착취에 시달린다. ⓒ 영화 <토리와 로키타>(2023)
 
불안한 미등록 이주 청소년의 삶

'토리'와 '로키타'는 아프리카 서부에 위치한 국가 베냉에서 태어난 10대 청소년들이다. 토리는 몸집부터 왜소하고 로키타는 몸집은 좀 크지만, 둘 다 참 어려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행동도 어딘가 미숙하고 판단도 즉흥적이다. 이들의 나이를 생각하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들이다. 그래서 평범한 국가와 사회에서라면 이들은 적극적인 보호와 후견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처한 상황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이들은 체류자격부터 불안한 이민자들이었다. 생계와 안전을 책임져 줄 시스템도 부재했다. 심지어 이들의 처지를 이용하여 착취를 일삼는 성인들도 존재했다. 그러한 일상들을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다정함, 끈끈함, 그리고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버텨내고 있었다.

영화는 벨기에에서 이주민 체류자격 심사를 받는 로키타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토리는 본국에서 학대당한 정황을 인정받아 체류자격을 얻었으나 로키타는 그러지 못했다. 거짓말에 능하지 못한 로키타가 심사관들의 날카로운 질문에 잘 대응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로키타는 토리와 함께 심사 예행연습도 하고 토리에게 거짓말에 대한 코칭도 받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심사 통과에 실패하고 만다.

그렇게 둘의 체류자격은 다르지만, 일상의 불안은 다르지 않았다. 어느 식당 주방장 '벨팀'의 마약 판매를 도우며 생계를 유지했다. 끼니도 벨팀이 던져주는 빵조각 따위로 때웠다. 로키타는 벨팀의 성폭력에도 노출되어 있었다. 토리는 제 키보다 큰 자전거를 타고 자동차들이 빠르게 지나는 도로를 자주 달렸다. 영화가 끝나기 전에 한번은 사고가 날 것처럼 불안했는데, 두 사람의 처지가 딱 그랬다.

결국 체류증을 얻지 못하여 더욱 처지가 불안해진 로키타를 벨팀은 어느 은폐된 숙소로 데려간다. 외딴 곳에 버려진 듯한 커다란 공장 안에 엉성하기 짝이 없게 1인 숙소가 만들어져 있었다. 사람이 살기 위한 숙소가 아니라 그 공장 안에서 매일 가동되어야 할 어떤 노동을 지속시키기 위한 숙소처럼 보인다.

공장 안에서는 대마초가 자라고 있었다. 로키타는 대마초에 물을 주고 공장 안 온도를 관리해야 했다. 영화 감독인 다르덴 형제는 유럽에서 이주 아동·청소년들이 마약 재배 산업에 투입된다는 뉴스를 접하고 이 영화를 구상했다고 한다.

로키타는 그 안에 갇혀 벨팀 일당이 가져다주는 냉동 음식만 먹으며 일을 해야 했다. 외부와의 연락도 허용되지 않았다. 로키타가 간절하게 원했던 건 고향에 있는 가족, 그리고 토리와의 연락뿐이었다. 하지만 벨팀 일당은 토리와 통화하고 싶다고 말한 로키타의 뺨을 때렸다.

현실을 담담하게 드러내는 연출

약 90분의 상영시간 동안 영화를 가득 채운 것은 두 주인공의 불안한 삶과 그 불안을 이용한 마약상, 이민 브로커 등에 의한 착취, 그리고 삶이 위태로워질수록 더 끈끈해지는 두 사람의 서로를 향한 다정함과 연대의 모습이었다.

극적인 연출이나 효과는 없었다. 위에 언급한 세 가지의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주기만 했다. 하지만 단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았다. 심지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 Volume 3>를 보면서도 지루한 순간이 있었고, 최근 극장에서 본 <플래시>는 보는 내내 지루했는데, 이 영화는 한 순간도 그렇지 않았다. 영화가 끝난 후 여운도 길었다. 고백하자면 그 유명한 다르덴 형제의 영화를 이번에 처음 보았다. 내게는 켄 로치의 영화에서 감정은 더 줄이고, 메시지는 더 불어넣는 영화로 느껴졌다.

특히 나에게는 영화 후반부 로키타가 갇혔던 대마초 공장이라는 공간이 참 인상적이었다. 모든 산업은 결국 다 인간을 위한 것일 텐데, 정작 산업이 운영되는 공장 안에서는 산업을 존속시키기 위해 사람을 존재시킨다. 물론 영화 속 대마초 공장은 국가의 관리와 통제에서 벗어난 극단적인 공간이었지만, 오늘날 합법적으로 운영되는 많은 공장 안에서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장면들이 펼쳐지고 있음을 안다.

마지막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어떤 사건으로 인해 세상에 홀로 남겨진 토리는 로키타를 추모하는 자리에서 짧은 추도사를 읽고 짧은 노래를 부른 후, 담담한 표정을 짓는다. 소리 내어 울지도 않았고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다르덴 형제는 관객에게 어떤 감정을 일으키기 보다는 그저 어떤 현실을 알리고 싶었던 것 같다.

영화를 보는 내내 참 담백하고 담담하다 느꼈는데, 마지막까지 이러니 참 고집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런 고집 덕분에 나 역시 이 영화가 전하는 현실이 그에 좌절하는 토리의 눈물이 아니라, 그 현실을 살아내는 토리의 표정으로 기억될 듯하다. 타국에서 착취당하는 이주 아동·청소년들의 삶은 그렇게 기억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에서 토리와 로키타가 함께 자주 불렀던 노래가 있다. "장터에서 동전 두 개에 아버지는 생쥐 한 마리를 샀네/그런데 고양이가 와서 생쥐를 먹어버렸네/그런데 개가 와서 고양이를 물었네/그런데 나무 지팡이가 나타나서 개를 때렸네".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자식들에게 이탈리어를 가르치기 위해 부르게 했던 노래라고 한다.

다르덴 형제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 노래가 토리와 로키타의 우정을 나타낸다고 했다. 이 영화를 "두 친구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어두운 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 애쓰는 예술가에 의해서는 청소년들의 우정도 이런 식으로 표현되는구나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이자 변호사인 임자운 님이 썼습니다. 이 글은 한노보연 월간지 일터 23년 7월호에도 실립니다.


#영화_토리와_로키타#유럽_청소년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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