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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 성장호르몬 주사 같은 말들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다.
키, 성장호르몬 주사 같은 말들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다. ⓒ pixabay
 
"요새 애들한테 성장판 검사는 건강 검진 같은 거야."

아이 친구 엄마의 말이다. 아이는 유치가 일찍 빠지기 시작했다. 치과 의사는 아이의 유치가 빠진 것에 놀라며, 성조숙증과 관련 있을 수 있으니 잘 살펴보라고 당부했다. '성조숙증이 오면 키가 안 큰다는데…' 키, 성장호르몬 주사 같은 말들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다.

초등학교 입학 후 대다수의 아이들이 통과의례처럼 성장판 검사(엑스레이를 통해 골연령을 확인하는 검사)를 받는다는 것도, 주위의 OO와 △△도 성장호르몬치료를 받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던 동네 소아과 복도의 홍보 문구도 눈에 들어왔다.

"'나중에 크겠지', '우리 아이는 또래보다 키가 커' 안심하다가 성장판이 닫혀버려 치료 시기를 놓칠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원장님과 상담하세요!"

대한성장의학회가 소개하는 '유전에 의한 예상 키 공식'은 이렇다. 남자의 키는 (아버지의 키+어머니의 키+13cm)/2, 여자의 키는 (아버지의 키+어머니의 키–13cm)/2. 그렇다면 키는 유전이 전부인가? 대한성장의학회는 물려받은 키가 작더라도 영양, 운동, 환경, 수면 등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비유전적 요인에 따라 최종 키는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비유전적 요인'의 정점에는 성장호르몬치료가 있다. 과거에는 성장호르몬이 결핍된 경우에 투여했지만, 현재는 그와 관계없이 '키 크는 주사'로 대중화되어 있다. 성장호르몬주사와 성장호르몬억제주사를 동시에 맞춰서, 성장을 촉진하면서도 2차 성징이 빨리 오지 않게 대비하기도 한다.

비용이나 부작용이 염려되는 이들에게는 다양한 대체제가 있다. 한의학 치료, 키 성장 건강기능식품, 마사지… 이중에서도 키 성장 건강기능식품은 4년 만에 10배가량 매출이 급증(2021년 식약처 자료)할 정도로 시장이 팽창하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식품들이 믿을 만하고 지속적인 효과가 있는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키가 투자와 노력에 따라 바뀔 수 있는 대상이 되면서, 키는 가족적 프로젝트가 되었다. 성장클리닉, 한의원, 의약품 시장은 자녀의 키를 더 크게 만들 수 있는 주체로 어머니를 호명한다. 이제 한국의 어머니는 아이의 성적을 관리하고 학원 스케줄을 짜는 와중에, 자녀의 키를 관리해야 한다는 과제까지 떠맡았다.

"평균 5cm 더 키우자..." 기이한 키 공화국 
 
대전시의회 김영삼 의원의 홈페이지 대전광역시교육청 학생 키성장 지원 조례안이 첨부되어 있다.
대전시의회 김영삼 의원의 홈페이지대전광역시교육청 학생 키성장 지원 조례안이 첨부되어 있다. ⓒ 이슬기
 
어머니가 이 과제에 적극적으로 공모하는 사이,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키 많이 컸네", "그렇게 하면 키 안 자란다!'와 같은 말을 일상적으로 듣고, 자신의 몸을 타인과 비교해 검열하고 관리하며, 서열을 나누는 것에 익숙해졌다.

계급(모든 부모가 자녀의 성장치료에 돈과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건 아니다)과 젠더(남성은 180cm가 넘어도 선망의 대상이지만, 여성은 168cm를 넘으면 선망의 대상이 아니라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기도 한다)와 한국적 모성(키 관리는 '조기교육'의 영역이 됐다)이 뒤엉킨 키의 전장에서, 누군가는 필연적으로 '루저'가 된다.

키 관련 의학‧과학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키가 계급 상승(혹은 재생산)에서 상대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스펙으로 기능하는 한. 오늘날의 "극심한 키 경쟁은 극소수의 승자만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신자유주의 체제와 닮아있다."(박소연(2011). 신자유주의 한국 사회의 키 담론 연구 – 키 소수자들에 대한 심층 인터뷰를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석사논문)

7월 20일, 전국 최초로 학생 키 성장을 지원하는 내용이 담긴 대전시의회 조례안이 상임위를 통과했다. 조례안에는 키 성장 맞춤형 급식 식단이나 운동 프로그램뿐 아니라, 성장판 검사를 지원하는 내용까지 담겨있다. 극심한 키 경쟁을 멈추자고 말하는 대신, 정치권에서 먼저 "평균 키 5cm 더 키우기 프로젝트"(김영삼 대전시의원, 국민의힘)를 제안하는 이상한 키 공화국. 나는 그만 머리가 어질해졌다.

#대전시의외키성장조례#키성장조례#키성장조례비판#성장판검사#성장호르몬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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