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이야기 담당 편집기자로 일하며 더 좋은 제목이 없을까 매일 고민합니다. '우리들의 삶'을 더 돋보이게 하고, 글 쓰는 사람들이 편집기자의 도움 없이도 '죽이는 제목'을 뽑을 수 있도록 사심 담아 쓰는 본격 제목 에세이. [편집자말] |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도는 영상이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제작발표회에서 배우 박보영이 함께 출연한 배우 이병헌의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
"선배님이 정말 상상하지도 못한 연기를 하시는 거예요. 갑자기 막 분노에 차오르는 그런 연기를 하실 때가 있었어요. 앉아서 같이 농담하다가 (제작진이) '선배님 이제 오실게요' 해서 '응, 그래' 하는데, 저 막 눈을 갈아낀 줄 알았어요. ('이병헌 안구교체설'이란 사회자 말에 좌중 웃음) 10초 전에 봤던 눈이 저 눈이 아닌데, 잠깐 사이에 어떻게 눈빛이 저렇게 바뀔 수 있지? 아, 배우란 저런 것인가, 제 스스로 작아지고 작아지는 날들을 많이 경험했어요."
이 말을 듣고 생각했다. 배우가 아니지만 할 수만 있다면 나도 안구를 교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배우가 아니니 당연히 좋은 연기에 대한 욕심 때문은 아니다. 그보다는 '이병헌의 눈빛' 같은 제목을 뽑고 싶은 마음이랄까.
설명하자면 이런 거다. 글을 열심히 읽다가 제목을 지을 타이밍이 오는 순간, 안구를 갈아 끼우는 거다. '유머러스한 제목 안구', '그림 그리듯이 보여주는 제목 안구', '리듬감 있는 제목 안구', 통찰을 부르는 제목 안구', '시적인 제목 안구', '호기심을 부르는 제목 안구', '내 이야기다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안구' 등등.
이런 안구를 종류별로 갖고 있으면서 필요할 때마다 갈아 끼우고 10초 만에 죽이는 제목을 척척 뽑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누가 봐도 '아' 하고 탄성이 나올 만한 그런 제목으로.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늘 아래 10초 만에 바뀌는 '이병한 눈빛'은 존재할지언정 갈아 끼우는 '제목 안구'는 어디 세상에도 없다. 그리하여 나도 매일 작아지고 작아지는 경험을 한다. 심지어 누리꾼들 앞에서도.
누리꾼의 감각
언론사에서 편집기자로 일하면서 내 월급 떼어줘도(정말?) 아깝지 않을 정도로 '극찬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조어에 재능 있는 누리꾼들이다. 이슈와 뉴스 앞에서 그 존재를 당당히 드러내는 사람들. 그들이 빚어내는 기막힌 단어나 문장 앞에서 저절로 무릎이 '푹'하고 꺾인다(제발 한 수 가르쳐 주십쇼잉).
뜨거웠던 여름의 일을 복기하자면, '순살자이' 창시자가 그렇다(당신은 누구십니까?). '순살'이란 뼈가 없는 살코기를 부르는 것으로 주로 치킨 업계에서 사용하는 용어이다. 자이는 GS건설이 짓고 있는 아파트 이름이고. 헌데 이 둘이 어떤 이유에서 딱 붙게 된 걸까.
많이들 기억하고 있겠지만 그건 바로 사회 뉴스에서 비롯되었다. 공사 중인 인천 검단의 한 아파트 지하 주차장이 붕괴된 사고가 있었는데, 원인을 조사하다 보니 건설사의 부실시공이 드러난 것.
이를 두고 한 누리꾼이 '뼈 없는 순살치킨처럼 철근이 없는 아파트'라며 '순살자이'라 불렀고, 이것이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순살자이'가 뉴스 제목으로도 실리게 되었다. 이즈음 다른 건설사들의 부실 공사도 함께 언급되면서 '흐르지오(폭우로 아파트 단지가 침수되면서)', '통뼈캐슬(아파트 철근이 콘크리트 밖으로 돌출되면서)'이란 말도 생겨났다.
단언컨대 이들이 만들어 낸 말로 소위 '제목 장사'에 도움을 받은 곳이 많았을 거다. 그런데 만약 누리꾼들이 정색하고 비꼬기만 했다면 이 말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었을까? 아닐지도 모르겠다.
비꼬고 비틀기만 한 게 아니라 촌철살인, 즉 날카로운 말로 상대를 아프게 찌르면서도 유머가 있었기에 독자가 반응했다고 본다. 순살로 뼈를 때리는데도 아프다. 그런데 재밌고. 이러니 내가 월급을 조금 떼어주고 싶을 만큼 '리스펙'한다고 말할 수밖에.
이뿐만이 아니다. 누리꾼들의 조어 감각은 곳곳에서 돌발적으로, 눈부시게 두각을 나타낸다. 기억하시는지, 드라마 <마당이 있는 집>에서 남편이 죽은 날, 경찰서 조사를 마친 아내 임지연(추상은 역)이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는 장면.
그걸 보고, 누리꾼들은 곧이곧대로 '게걸스럽게 먹는다'고 하지 않았다. '먹는 행위'가 아니라 '먹는 것'에 주목했다. 그 결과가 '남편사망정식'이다. 외식 업계부터 발 빠르게 대응했다. 신속하게 남편사망정식 세트가 만들어졌다. 연달아 수많은 기사가 쏟아졌고, "역시 임지연"(<더 글로리>에서도 연진이 역으로 이미 화제가 된 바 있다)이라며 믿고 보는 배우에 등극했다. 덩달아 드라마도 화제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기억나는 게 또 있다. 포털 사이트에서 본 "여보, 우리도 새 아파트 가자"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기사다. 기사의 요지는 집값 빠질 때 신축 '나홀로 상승' 한다는 내용이었는데 구축에 사는 내 입장에서 "여보, 우리도 새 아파트 가자"에 혹해서 클릭했다. 그러나 이 기사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신축 아파트 값 상승이 아닌 댓글이었다. 역시 촌철살인식 유머가 돋보였기 때문이다.
'구축 가격 빠질 때, 신축은 철근 빠집니다.'
웃음이 삐질삐질 새어 나왔다. 제대로 비틀었다. 건설사 가슴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사례는 또 있다. 경북 영주시에서 사바나왕도마뱀이 발견, 포획되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여기서도 눈에 띄는 댓글이 있었다.
'다이내믹 영주'
제목으로 써먹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문장이었다. 지방 소도시 영주에 '다이내믹'이란 수식어가 붙으니, 단번에 주목하게 되는 효과를 불러일으키면서 궁금증을 자아낸다. 이러니 댓글을 보지 않고 어떻게 견디겠나. 당장은 어렵더라도 후속 기사가 이어질 때 이런 한마디를 요긴하게 써먹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독자의 존재감
사실 늘 독자를 염두에 두고, 독자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편집을 하고 제목을 뽑는 일을 하고 있지만, 종종 독자의 실체를 의심할 때도 많았다. '아니 이 좋은 기사를 왜 안 봐?', '아니 이런 기사를 왜 봐?' 싶은 그런 마음이 들 때. 그 생각이 와장창 깨질 때는 '팩폭' 하는 댓글을 확인할 때였다.
'내가 모를 줄 알았지?(사실과 다른 내용이니 다시 확인해 봐라)' 혹은 '이건 몰랐지?(다른 면도 있으니 확인해 봐라)' 혹은 '그게 전부가 아닐 텐데(다른 점도 있으니 찾아봐라)' 같은 지적을 해주는 독자가 댓글에서 존재감을 뿜뿜 하고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니 글을 쓰는 사람도, 글을 검토하는 사람도 (악플이 전부라 할지라도) 혹시나 진심 어린 독자의 반응이 하나라도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댓글을 살펴보는 거겠지. 그 기대를 어김없이 깨버리는 악플로 '마상'(마음의 상처)을 입는 날도 많지만.
공적인 글을 처음 쓰고 며칠 후 '댓글을 마주한' 소감을 전해온 이가 있었다. 글쓴이는 말했다. 어떤 댓글은 '읽으면서 새로운 에너지를 얻고 글쓰기를 하는 데도 활력소'가 되지만 '낯 뜨거운 원색적인 용어로 대놓고 공격하는' 댓글은 '나의 인생 전체가 부정당하는 참담함을 떨칠 수가 없다'라고.
글을 읽고 생각했다. '촌철살인'과 같은 댓글이 있는가 하면 '살인'만 하는 댓글도 있겠구나. '내가 먹는 음식이 나다'라는 말이 있다. 내 입장에서 쓰자면 '내가 쓰는 글도 나다'. 댓글로 쓰는 글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단어 하나 문장 하나도 허투루 할 수 없다. '악플이 나' 자신이라면 그건 너무 잔인한 일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