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이야기 담당 편집기자로 일하며 더 좋은 제목이 없을까 매일 고민합니다. '우리들의 삶'을 더 돋보이게 하고, 글 쓰는 사람들이 편집기자의 도움 없이도 '죽이는 제목'을 뽑을 수 있도록 사심 담아 쓰는 본격 제목 에세이. [편집자말] |
[기사 수정 : 10월 6일 오전 9시 56분]
마음에 드는 가죽 가방을 몇 년째 들지도 않으면서 버리기는 아까워 장롱 속에 보관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동네 가죽공방에서 헌 가방을 수선해 준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사진 속 가방이 꽤 그럴듯해 보였다. 그래, 먼지만 쌓인 채 보관만 하느니 내가 원하는 디자인으로 고쳐 쓰자. 미니백으로 수선해서 쓰면 좋잖아.
쉬는 날 가방을 들고 가게로 향했다. 가방을 내밀고 미니백으로 수선이 가능한지 물었다. 요즘 많이 하는 스타일이라며 할 수 있다고 했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수선하는 비용이, 거의 새 가죽 가방을 하나 사는 것과 맞먹었다.
이걸 수선해서 쓰는 게 의미가 있을까? 10초 정도 고민했던 것 같다. 기껏 가져왔는데 다시 들고 가기도 그렇고... 고쳐 쓰는 것은 환경도 살리는 것이니, 나름 괜찮은 선택이라고 돈 쓰는 일을 합리화한다.
해주세요. 공방 주인은 지금 주문이 밀려 있으니 잊고 있다가 연락하면 찾으러 와 달라고 했다. 당장 급하게 쓸 가방은 아니기에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고 진짜 잊고 지냈다. 한 2주 정도가 지났을까. 문자가 왔다.
'해체 작업 중이다. 과정을 공유 드리겠다.'
드디어 가방 해체 작업을 한다고 했다. 실 색, 장식 선택, 고리 장식 위치, 끈을 넣는 아일릿 선택 등이 순차적으로 이뤄졌고, 가방도 어느 정도 제 모습을 갖춰 가는 듯했다. 이 과정에서 내 의견을 따라 주는 것도 있었고 전문가의 생각이 반영되기도 했다. 얼추 마무리가 되어간다 싶었을 때 공방 주인은 말했다.
'다음 과정은 알아서 하고 완성되면 알려드리겠다.'
알아서 하겠다는 것은 결과물에 자신 있다는 거겠지? 두근두근했다. 과연 내 마음에 들까? 과정을 공유받기는 했지만 결과물이 마음에 안 들면 어쩌지? 이거 못 쓰겠다고 해도 되나? 너무나 궁금한 게 많았다. 마음에 안 들면 원래의 가방이 생각날 것 같고, 추가로 들어간 비용도 만만치 않은데 속이 엄청 상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환불해달라고 할 수도 없으니 더욱.
결과물을 받고 다행히 그런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 후로 잘 들고 다녔다. 장롱 속에만 있던 그 가방이 맞나 싶을 만큼. 가볍고 편리하고 이쁘고. 시간이 꽤 지나 잊고 있던 일인데 불현듯 생각났다. '원래의 제목을 최대한 살려주십사' 하는 요청을 받고서.
제목의 공정
은퇴 후 금전적으로 부족한 생활이어도 '조금 덜 가지고 그 처지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마음과 태도만 있으면 생각보다 괜찮게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글이었다. 중년의 지혜가 담긴 내용으로 솔직한 이야기에 마음이 가는 그런 이야기.
나도 그렇지만 돈 이야기는 참 남세스럽다. 그래도 필요한 이야기다. 돈을 이야기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기에 그렇다. 제목에 돈이 있으면 너무 속물처럼 보이려나?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대로 드러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은퇴하면 돈이 부족한 건 사실이니까.
그래서 내가 바꾼 제목은 '은퇴하면 돈이 부족합니다'였다. 제목을 바꾸고 '검토중' 상태로 두었다. 얼마 후 수정된 제목을 보고 '제목을 고쳐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은퇴하면 수입이 줄어 돈이 부족해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제 기사의 핵심 취지는 부족하더라도 마음과 태도만 바꾸면 괜찮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능하시다면 원래 제목을 최대한 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에 '고민해 보겠다'고 답했다.
어쩐다. 원래의 문장 '조금 덜 가지는 만큼 생기는 삶의 여유와 기쁨들'은 제목스러운 문장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부제에 어울리는 문장이었다. '은퇴 후 부족한 돈, 그래서 이게 필요합니다'로 수정한 후 이건 어떨지 의견을 구했다. 다시 들은 이야기는 이랬다.
기사 제목에 '돈 부족'을 직접 표현하는 것이 조금 불편하네요... 그래서 아래와 같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떠신지요.
은퇴로 마주한 경제적 변화, 이렇게 넘기고 있습니다
조금 덜 가지는 만큼 생기는 삶의 여유와 기쁨들
불편한 마음이 드는 이유를 모르지 않는다. 글 본문 안에 있는 내용이지만, 제목으로 사용하고 싶지 않은 내용일 수도 있으니까. 대안으로 주신 안에서,
'이렇게 넘기고 있습니다'는 문장은 내 생각에도 제목으로 살리면 좋을 것 같았다. 나와 글쓴이의 의견을 절충해 보기로 했다.
은퇴 후 부족한 돈, 그래서 이게 필요합니다(내 안)
+ 은퇴로 마주한 경제적 변화, 이렇게 넘기고 있습니다(글쓴이의 안)
→ 은퇴 후 줄어든 수입, 이렇게 넘기고 있습니다
돈을 '수입'으로 바꾸고 뒤 문장은 글쓴이가 보낸 대로 쓰고 보니 괜찮았다. 그래, 이렇게 가보자. 글쓴이의 반응도 긍정적이었다.
방금 보니 기사 제목이 '은퇴 후 줄어든 수입, 이렇게 넘기고 있습니다'로 바뀌었네요. 저의 글 작성 취지를 잘 반영해 주신 것 같네요.
오케이. 드디어 제목이 완료되었다. 제목 하나를 완성하기까지의 공정을 읊자니 가죽공방 사장과 내가 나눈 대화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이렇게 제목을 완료하기까지의 과정을 공유하고 의견을 구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결과물에 대한 만족감을 높이고 싶어서다.
노력했으니 받아들인다
이 일을 하면서 늘 최선의 제목을 고민하고, 독자들을 좀 더 유입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지만 그 최종 결과물을 글쓴이가 얼마나 만족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조회수가 많이 나온다고 좋은 제목도 아니고 조회수가 안 나온다고 안 좋은 제목도 아니다. 그건 그냥 운명일 뿐이다. 요즘은 알고리즘의 운명쯤 되려나.
그리고 생각보다 제목에 대한 의견이 그다지 많지는 않다. 그렇다고 제목을 고민할 때마다 매번 글쓴이의 의견을 구하거나 확인받는 일도 쉽지 않다(물론 예민한 내용의 기사인 경우는 시간을 내어 상의하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시간적 어려움. 의견을 전부 받아들이기도 현실적으로 어렵거니와 이러저러한 이유로 조심하는 것이겠지만.
제목에 대한 의견이 많지 않은 이유에 대해 글쓴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면, 편집권이라고 하는, 편집기자의 일을 존중하려는 마음이 크기 때문인 듯하다. '제목 수정을 요청합니다', '제목 수정을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제목을 바꾸면 어떨까요'라고, 조심스럽고 완곡하게, 때론 정중하게 요청하는 글을 볼 때 그런 마음이 느껴지기도 하니까.
이런 이유로 제목이 사실과 다르거나 취지와 맞지 않거나 오자가 났을 때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제목은 편집기자가 알아서 해주리라 생각한다. 제목의 공정 과정에 글쓴이가 참여한다고 해서 항상 결과가 좋은 것도 아니다. 결과물이 마뜩잖은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건 알 거다. 서로 노력했다는 것. 최선을 다했다는 것. 그랬기에 결과물도 받아들일 수 있는 거겠지. 내가 가방을 수선하는 공정에서 경험한 것처럼 말이다.
수선한 가방이 마음에 들었던 것처럼 다듬어진 제목으로 나간 기사는 평소 그분이 쓰신 글보다 꽤 반응이 좋았다. 조회수를 보고 약간 놀랄 정도였다. 은퇴 후 경제적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독자가 그만큼 많다는 방증이기도 하겠고. 어쩌면 '돈'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수준이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