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되기 싫은 지가 아니라, 무엇이 되고 싶은지로 나를 정의하고 싶어."
마이아 코베이브(Maia Kobabe)의 <젠더퀴어>(2023)를 읽는 행위는 사회적 통념과 싸우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사회적 통념은 일반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견고한 믿음이다. 그러니 이것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 새로운 과학의 발견이나 논리적인 근거로 증명해 내지 않는 한 굳게 믿고 있는 대중의 마음을 돌리기는 정말로 어렵다.
하지만 이런 '믿음'의 형태가 늘 항상 옳았던 것도 아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통념을 믿으며 살아간 것이 인류의 역사이기도 하니 그렇다. 멀게는 태양이 지구 중심을 돈다는 주장부터 특정한 피부색의 사람들을 노예로 생각했던 역사가 그렇다.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의 마음과 시선은 어떠한가. 가깝게는 이데올로기가 다르다는 이유로 무차별 학살을 감행했던 이곳 한반도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잘못된 신념은 선한 인간의 두 눈을 잔인하게 가린다.
사회적 통념은 늘 옳은가
그래서 사회적 통념이 잘못되었다면 용기 있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적 통념으로 인해 손해 입거나 소외된 적이 있다면 그 누구라도 어떤 방식이든지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하지만 이 싸움은 생각처럼 만만치 않다. 자신을 경멸하는 존재로부터 나를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통념은 대부분 사람들이 옳다고 믿는 신념이기 때문에, 그것을 흔들기 위해서는 각오가 필요하다.
모두가 그게 옳다고 믿는 세상에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때론 희생이 필요할 때도 있다. 희생 없이 소수자의 목소리가 닿는다면 참 좋겠지만, 이 지면에서 다루는 성소수자의 경우도 안타까운 희생이 없지는 않았다. 2023년 부천 신인만화상을 받은 정해나 작가의 〈요나단의 목소리〉도 이와 같다. 가장 소중한 목소리를 내놓아야만 성소수자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 책의 <젠더퀴어>(2023) 저자도 마찬가지다. 힘은 세지 않지만, 만화를 그릴 수 있는 재능을 지닌 마이아 코베이브는 성별 이분법이라는 사회적 시선 속에서 느꼈던 불편한 감정을 <젠더퀴어>에 담아 놓았다.
사회가 정해준 '남녀'라는 기준에 구속되기보다는 "무엇이 되고 싶은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이 텍스트는 작지만 소중하고 강력한 무기다. 당연하다는 사회적 통념에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하는 텍스트는 틈에 진실을 끌어올린다. 그래서 이 텍스트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런 강력함을 필자만 느꼈던 것이 아니다. 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와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에서 일하고 있는 루인도 해설에서 이 지점을 강조했다.
해설을 맡은 루인은 이 책이 출간된 나라인 미국 도서관 일부에서 해당 도서가 퇴출되었다는 내용을 적었다. 그러면서 루인은 이러한 행위 자체가 마이아 코베이브와 같은 처지에 놓인 성소자들을 원천적으로 막는 행위라고 설명한다. 어린 시절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하는 성소수자들의 경우, 금기시되는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정체성을 확인할 기회가 도서관 이외에는 없기 때문에 그것을 봉쇄한 것은 의도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미국 일부 도서관에서 이를 '금기서'로 분류해 입고를 거부하는 행위는 씁쓸한 현실이다. 루인도 이러한 사실을 안타까워한다. 필자 또한 이 책이 어떤 지점에서 잘못되었는지, 왜 이 책을 금기서로 정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주로 중성성에 늘 매료되었다"(72쪽)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오랜 시간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 그래픽 노블이었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떠나 마이아의 고백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오스카 와일드가 이야기한 것처럼 '고백의 힘이 만만치 않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코베이브의 이런 용기는 오히려 박수받아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금기서라는 라벨이 붙은 것이다.
<젠더퀴어>의 화자는 '대명사'로 인해 곤혹스러워한다. 대명사는 무엇인가.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을 대신 나타내는 말이다. 이런 대명사 중에 '여자'와 '남자'도 해당한다. 하지만 이 두 대명사 사이에 소속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할 수밖에 없다. 사회 구성원들과 교과서는 학생들에게 여자와 남자가 있다고 가르치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성교육 내용도 마찬가지다. 여성도 남성도 아닌 '논바이너리'들에게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가족들은 어떠한가. 생물학적인 성을 기준으로 호명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니 더욱더 불편하다. 양성애자인 화자가 살아낼 방법은 없어 보인다. 조금은 용기를 내야 할 것 같은데 이 용기가 사회적 통념과 위반되니 조심스럽다.
최근 기독교 인터넷 신문 '뉴스앤조이(www.newsnjoy.or.kr)'에서 12화까지 기획된 '퀴어문화축제 방해 잔혹사'에서는 용기 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퀴어 축제는 눌러왔던 자신의 목소리를 1년에 한 번 솔직하게 드러내는 의미 있는 날이다. 하지만 이 행사에 보수기독교 단체들이 출입해 축제 행사장에서 욕을 하고 침을 뱉고 소리를 지르니, 이들에게 마냥 용기 내라고 응원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마이아 코베이브의 <젠더퀴어>는 좋은 만화다. 내가 이 텍스트를 좋은 만화라고 언급한 이유는 고백하기 힘든 내용을 고백하고 있어서다. 여기서 더 나아가 고백하는 방식에서도 만화의 형식을 잘 동원해 이야기되었다. 만화의 톤과 선은 대체로 부드럽고 온유해 읽는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양성애자인 '논바이너리'라는 존재에 대해 거부감 없이 귀기울이게 만든다.
앞서 통념이라고 이야기했듯이 남과 여라는 두 가지 성으로 나누어진 이곳 사회의 시선에서는 '논바이너리'적 성향을 지닌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이 만화는 친절하고 차분하게 밝은 톤으로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준다. 소수자인 한 개인의 삶을 시간 순서대로 나열함으로써 독자들을 설득시킨다. 한 페이지에 5칸 정도의 칸을 운영해 독자에게 피로를 주지 않으니 매우 친절한 텍스트로 간주할 수 있다. 자신의 '의도'를 충분히 전달했으니 좋은 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도 있었다
나 또한 '논바이너리'인 친구가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똑똑하고 재능 있었으며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성적지향점이 달랐을 뿐이지, 다를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다르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회는 왜 항상 '구별 짓기'하고 '차이'를 생성해 차별하고 손가락질하는 것일까. 예술에서 '차이'는 즐거움이지만 인간을 구분하고 분류하는 것은 안타깝게도 생존을 위한 발버둥이지 않을까. 마이아 코베이브의 <젠더퀴어>는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이 텍스트는 오랜 시간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사회적 통념과 맞서 싸운 여러 유령을 동시에 소환시킨다. 그래서 이 책을 독자들에게 꼭 추천하는 바이다.
덧붙이는 글 | 평론가이며 지은 책으로 문학평론집 〈싸움〉(2022)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