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처음에는 먹고살기 위해서였다(오래 전 일 때문에 쓴 글들은 내 이야기가 담기지 않아 제외한다). 제주라는 낯선 곳으로 이주해 와 작은 카페를 열었는데, 홍보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결국 택한 건 블로그였다. 누가 볼지도 모르는데 글을 하나씩 올리기 시작했다. 카페를 완성해 가는 모습도 올리고, 섬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느낀 소소한 이야기들을 적기도 했다.
블로그에 적을 수 없는 글이 생겼을 무렵 브런치를 시작했다. 블로그는 아무래도 장사를 위해 연 공간이다 보니 말을 걸러야 할 때가 많았다. 브런치에 쓴 첫 글이 소위 대박이 났다. 발칙한 제목 때문이었다. '내게 딸은 필요 없다'는 제목의 글이었는데, 운 좋게 포털에 걸리면서 수만 명의 사람이 내 글을 읽고 수십 명의 사람이 댓글을 다는 일이 벌어졌다.
아들만 둘이다 보니 '딸이 있어야 한다', '아들은 필요 없다'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그런 참견이 못마땅해 적어 내려 간 글이었다. 세상에 나와 비슷한 불만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그 후로 몇 달 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관심은 감사했지만, 얼떨결에 받은 주목은 무서웠다. 온 세상 사람들이 나를 주시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당시 나는 글 쓰는 삶을 살고는 싶었지만, 마음의 준비가 덜 된 상태였다. 내게 글쓰기는 기술의 문제가 아닌 내 삶을 광화문 네거리에 걸어놓는 일이었다. 그래도 글을 쓰겠냐는 물음과 그럼에도 왜 써야 하느냐는 질문을 붙들고 긴긴밤을 보냈다. 결국 글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다시 용기를 내어 브런치에 두 번째 글을 올렸다.
이번에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읽는 사람 수는 많아야 열 명쯤. 세 번째 네 번째 글을 썼지만 읽는 사람의 숫자는 늘지 않았다. 허공에 혼자 말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제야 이전에 받았던 관심이 분에 넘치는 일이었다는 걸, 자주 오지 않는 행운 같은 일이었다는 걸 알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누구나 공개적인 공간에 글을 쓰다 보면 잭팟이 터지듯 한두 번씩은 그런 대박 조회수를 기록하는 일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다 악성 댓글에 시달리기도 하고, 밀도 높은 공감을 얻기도 한다는 것도.
모든 계급장을 떼고 소통하는 세상
쓰는 삶으로 나아가는 데는 글 쓰는 기술만 필요한 게 아니었다. 세상의 관심을 의연하게 받아들일 넉넉한 마음이 필요했다. 긍정의 관심만 있을 리 없다. 부정의 관여도 거슬리지만, 무관심 역시 유쾌한 일은 아니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자신의 글을 쓴다는 건, 때로 지독히 외롭고 때로 무척 공허하며 때로 참 힘겨운 일이다. 그러다 보면 예상치 못한 경이로운 순간을 맞이할 때도 있다. 내 글로 생각이 바뀌었다는 반응을 만나거나, 많은 위로가 됐다는 댓글을 만나는 일과 같은.
언제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어떤 반응을 얻게 될지는 모른다. 그 어떤 종류의 관심이라도 차분히 받아넘길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마치 고군분투하며 사회생활을 하는 우리 모습과도 꼭 닮았다. 타인이 내게 보여준 말이나 표정, 행동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상처를 받는 사람들. 그 상처들에 매몰되면 삶은 길을 잃기 십상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니 타인과의 관계를 아예 끊을 수는 없다. 적당히 듣고 흘려버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의연하게 웃어넘기고, 자신이 믿고 깨달은 신념들로 채워가는 삶을 살아야 길을 잃지 않는다. 글도 마찬가지다.
매일 쓰는 삶으로 건너가겠다 마음을 먹은 뒤에도 불특정 다수를 향한 공개적인 글을 썼다. 새로 오픈한 플랫폼이었는데, 처음에는 분위기를 잘 몰라 조심스럽게 짧은 글들을 주로 썼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마음을 다잡았다. 글을 하나하나 작품으로 대하자. 이름난 작가는 아니지만, 내 글은 내게 하나하나 소중한 자식과 같으니 매번 작품을 쓴다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자.
책을 낸 적도 없고, 번드르르한 이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다 보니, 초창기 나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내가 내 글을 작품으로 대하기 시작하자 조금씩 변화가 일어났다. 사람들이 점점 내 글을 눈여겨보면서 팔로워도 하나둘 늘어났다. 플랫폼도 그런 내 정성을 알아보았는지 메인에 글을 하나씩 실어주었다. 꿈같은 날들이었다.
생김도 이력도 직업도 지역도 나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글만으로 눈에 띄는 경험은 황홀했다. 그곳은 내가 바라던 세상의 모습과도 닮아 있었다. 어떤 과거를 가졌든, 어떤 스펙의 사람이든, 동일선상에서 소통하는 곳.
나는 사회부적응자였다. 처음 들어간 직장은 부당한 대우를 참지 못하고 7개월 만에 박차고 나왔다. 그나마 오래 한 일은 지방 언론사 기자였는데, 그마저도 3년을 넘기지 못했다. 고지식하고 동기부여가 안 되면 굴러가지 못하는 성정을 가진 내가 이 사회에서 설 곳은 많지 않았다.
나는 여행을 도피처로 삼았다. 모아둔 돈을 가지고 발길이 닿는 대로 걸어 다녔다.결혼 후 제주로 이주를 한 것도 일종의 도망이었다. 한 직장을 꾸준하게 다니고, 번듯하게 집을 넓히고 가정을 꾸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늘 미운 오리새끼 같은 존재였다. 그랬던 나도 글을 쓸 수 있고, 내가 쓴 글도 어디선가 빛을 볼 수 있다는 건, 벅찬 희망이었다.
모두가 자신의 글을 쓰는 세상
글을 끝까지 놓지 않은 건, 글만은 글자를 배운 누구나 쓸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실수를 허용하지 않는 사회, 딴 길로의 외도나 긴 휴식을 쓸데없는 시간이라 여기는 나라에서 나처럼 명함이 자주 바뀐 사람은 설 곳이 없다. 그런 나도 설 수 있는 단 한 곳이 나는 글이라고 믿었다.
한국에서는 오랜 시간 등단이라는 절차가 작가의 등용문으로 놓여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책 한 권을 내면 작가가 되는데 우리나라는 달랐다. 일제의 잔재이고 권위적인 절차이니 언젠가는 무너지리라. 등단은 내게 한 번쯤 넘어보고 싶은 절차이기도 했지만, 무너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관습이기도 했다.
마침내 그런 사회가 찾아왔다. 인터넷의 발달로, 독립 출판의 확장으로,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나는 글이 영원히 모두에게 기회이기를 바란다. 누구든 언제든 도전할 수 있는, 문턱이라고는 없는 세상.
작가를 꿈꾸면서 모두가 글을 쓰는 세상은 두렵기도 했다. 타인을 경쟁자로만 바라본다면, 그 세상은 경쟁자가 득시글한 곳이다. 하지만 타인을 경쟁자가 아닌 상생하는 대상으로 바라본다면, 모두가 글을 쓰는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성숙한 사회가 된다. 글을 쓴다는 건, 끊임없이 성찰한다는 의미이기에.
이왕 꾸는 꿈, 조금 더 크게 꾸기로 했다. 나 혼자 작가가 되는 세상 말고, 모두가 자신의 글을 쓰는 세상을 내 꿈으로 삼자. 글 쓰는 청소년, 글 쓰는 주부, 글 쓰는 일용직 근로자, 글 쓰는 배달원, 글 쓰는 할아버지 등. 각자의 삶을 살듯, 각자의 글을 쓰는 세상. 자신의 글을 쓰는 게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세상. 백지 위에 자신의 솔직한 삶을 털어놓고, 타인의 삶도 더 깊이 들여다보는 게 당연한 세상.
글은 일종의 권력이다. 발언권이 주어지는 일이니. 인터넷 세상에 살게 되면서 이제는 누구나 원하면 이 권한을 누릴 수 있다. 각자의 글을 쓴다는 건, 서로의 세상을 더 잘 이해하는 길이기도 하다.
누구의 입이나 손을 빌리는 게 아니라, 겪은 사람이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강력한 힘이 있다. '실화'라는 말에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과 무게가 실려 있다.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 앞에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수식어를 붙이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 세상을 만드는데 미약하지만 내가 힘을 보태고 싶다는 생각이 찾아온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나는 쓰는 사람이자 쓰려는 사람들을 돕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유명한 작가가 아니라 선생님이 될 수는 없겠지만, 글 세상을 먼저 만나본 사람이니 선배쯤은 될 수 있을 터였다.
그런 뻔뻔한 마음으로 용기 내어 글쓰기 모임도 만들고, 이런 연재도 시작하게 되었다. 글이 때로 나를 뻔뻔한 사람으로 서게 한다. 어디에서 내가 이렇게 고개를 들 수 있을까. 글이니 가능하다. 글은 그런 세상이다. 영원히 그런 세상이 글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