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든버러에서 벨파스트로 향하는 비행은 짧았습니다. 그래도 해협을 건너 가는 비행인데, 안정 고도에 접어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착륙 준비에 들어가더군요. 제가 가는 이 섬이, 브리튼 섬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는 순간이었습니다.
벨파스트는 북아일랜드의 수도입니다. 북아일랜드는 영국을 구성하는 네 지역 중 하나죠. 영국은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가 모여 만든 '연합 왕국'이니까요. 다른 세 지역과 다르게, 북아일랜드만은 브리튼 섬이 아니라 아일랜드 섬에 위치해 있습니다.
잉글랜드 왕국은 오래 전부터 아일랜드에 영향력을 미쳐 왔습니다. 이미 12세기부터 잉글랜드의 아일랜드 지배가 시작되었죠. 아일랜드가 공식적으로 연합 왕국에 합병된 것은 1801년의 일입니다.
하지만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아일랜드인의 저항도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성공회를 믿게 된 영국과, 가톨릭 신자가 다수인 아일랜드인 사이에는 갈등의 골이 점차 깊어졌죠.
19세기부터는 아일랜드인의 반영 감정이 더욱 거세집니다. 유럽을 휩쓸던 민족주의의 열풍과 함께, '아일랜드 대기근' 과정에서 영국이 보여준 무능과 악의가 아일랜드인을 자극한 것이죠.
아일랜드의 독립운동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1916년에는 '부활절 봉기'를 통해 영국에 무력으로 맞서기도 했죠. 물론 부활절 봉기는 영국의 강력한 진압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민간인을 포함해 무차별로 아일랜드인 수백 명을 학살한 영국군은 아일랜드인에게 끔찍한 기억을 남겼죠.
결국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이루어진 선거에서, 아일랜드의 시민들은 아일랜드 독립파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냅니다. 아일랜드인의 지지를 확인한 독립 세력은 영국 의회에 출석을 거부하고, 아일랜드의 독립을 선언합니다. 영국은 다시 한 번 무력으로 맞섰죠. 그렇게 '아일랜드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2년 간 이어진 전쟁 끝에 영국은 아일랜드를 자치령으로 인정하는 조약을 맺기에 이릅니다. '아일랜드 자유국'이라는 국가를 만들고, 폭넓은 자치권을 허용하겠다는 것입니다. 사실상의 독립 인정으로 볼 수도 있었겠지만, 이 조약은 아일랜드에 더 큰 갈등을 불러왔습니다.
아일랜드 자유국은 영국 국왕을 국가 원수로 인정해야 했습니다. 외교권과 군사권은 명목상이나마 영국에게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가 된 것은, 아일랜드 섬에서도 북쪽 6개 주는 독립하지 않고 영국에 남게 된다는 사실이었죠. 이것이 북아일랜드의 탄생입니다.
사실 북아일랜드는 원래 주로 농촌 지역으로, 아일랜드인 지방 세력이 강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잉글랜드는 17세기부터 이곳에 잉글랜드인을 집단 이주시켰습니다. 원래 인구가 적은 곳이었으니, 이 지역에서는 잉글랜드인이 점차 다수가 되어갔죠.
결국 아일랜드가 독립운동을 벌이던 시점에서, 북아일랜드 지역은 다른 특성을 가진 땅이 되어 있었습니다. 친영파 개신교도가, 반영파 가톨릭 교도보다 더 많은 지역이 된 것이죠. 영국은 이것을 빌미로 북아일랜드 6개 주는 독립을 원하지 않고, 따라서 영국에 남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아일랜드는 이 조약을 찬성하고 자치권을 얻어낼 것인지, 조약에 반대해 끝까지 완전한 독립을 위해 싸울 것인지를 두고 분열했습니다. 내전이 벌어졌고, 한때 독립을 위해 함께 싸웠던 동지들이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눴습니다. 승리는 조약 찬성파의 몫이었죠. 북아일랜드는 그렇게 영국의 영토로 남았습니다.
물론 아일랜드 자유국이 끝까지 영국의 자치령으로 남은 것은 아닙니다. 내전이 끝난 뒤부터 조약 반대파도 아일랜드 자유국의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죠. 이들은 영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습니다. 결국 1937년 국호를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고치고, 영국의 지배에서 완전히 독립했습니다.
그러나 북아일랜드는 여전히 영국의 영토였습니다. 북아일랜드에 친영파 개신교도가 많았다고 했지만, 그 수가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았습니다. 인구의 60% 정도를 차지하는 정도였으니까요. 나머지 40%는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원하는 아일랜드인 가톨릭 신도였습니다.
내전이 끝나고 순조롭게 국가 체제를 정비하던 아일랜드 공화국과 달리, 북아일랜드에는 갈등의 씨앗이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아일랜드 독립을 원하는 민족주의자(Nationalist)와, 영국이라는 연합 왕국에 남기를 원하는 연합주의자(Unionist)의 분쟁이 계속해서 이어졌죠.
시간이 갈수록 분쟁은 격화되었습니다. 1960년대부터는 양 진영 사이 직접적인 무력 충돌까지 벌어졌죠. 영국은 아일랜드인에 대한 박해를 이어갔습니다. 아일랜드 독립파는 독립 전쟁 시기에 있었던 IRA의 이름을 딴 무장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영국의 주요 인사에 대한 공격도 이어졌죠.
1972년에는 영국군이 비무장 민간인 시위대를 향해 사격을 가해 13명이 사망하는 '피의 일요일 사건'도 발생했습니다. 영국의 박해가 심해질수록 아일랜드인의 반영 감정도 거세졌죠. 그럴수록 아일랜드계 무장 집단의 활동도 격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같은 도시에 살고 있던 가톨릭 신도와 성공회 신도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갈등의 벽이 생겼습니다. 도시는 분열하기 시작했습니다. 테러와 진압이 이어지는 도시는 주민들에게 상처만을 남길 뿐이었죠.
물론 제가 방문한 벨파스트는 이제 더이상 갈등과 분열의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90년대까지 이어지던 분쟁은 1998년 '성 금요일 협정'으로 사실상 종식을 맞았습니다. 영국과 북아일랜드 정치세력, 아일랜드까지 3자가 모여 만든 협상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영국은 북아일랜드에 자치의회를 설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북아일랜드 자치의회의 의원들은 민족주의자와 연합주의자로 나누고, 중대 사안은 각 진영 모두의 동의를 얻어야만 통과되도록 했습니다. 다수파에서 총리를, 소수파에서 부총리를 선출하되 두 사람의 권한이 사실상 동등한 공동 정부를 만들었습니다.
협상의 결과 무장 단체였던 IRA는 스스로 무장 투쟁을 포기했습니다. 물론 여기에 반대하는 과격파도 있었지만, 현재로선 사실상 소멸한 상황입니다. 아일랜드 독립파는 총 대신 선거를 통해 투쟁을 이어나가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성 금요일 협정 이후 25년이 흘렀습니다. 여전히 북아일랜드 자치정부는 연합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연합을 통해 구성됩니다. IRA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던 신 페인(Sinn Fein)은 이제 원내 1당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양 정치세력 모두의 동의를 얻어야만 하는 정치 제도의 특성상, 북아일랜드 자치의회에서 여러 갈등이 벌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현재도 북아일랜드 의회는 총리를 선출하지 못하는 공백 상태에 빠져 있죠. 하지만 갈등은 이제 자치의회라는 제도 안으로 편입되었습니다.
한때 영국과 아일랜드 간 갈등의 상징이었던 벨파스트는 이제 평화로운 도시가 되었습니다. 북아일랜드 분쟁을 다룬 케네스 브래너 감독의 영화 <벨파스트>에는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아일랜드인은 원래 떠나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라고요. "그 가운데 절반은 떠나고, 절반은 남아 그리운 고향을 지키는 것"이라고요.
누군가는 이 도시에서 희망을 포기하고 떠났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은 조금도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 도시에 남은 절반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만든 진보를 생각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돌아올 수 있는 고향' 벨파스트의 평화로운 골목을, 오늘도 저는 걷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