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에 몹시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에 대한 생생한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와인을 더욱 맛있게 마시려는 집요한 탐구와 모색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편집자말] |
와인 에세이집까지 낼 정도로 와인에 제법 진심인 애호가이지만 여느 술꾼들처럼 그렇게 자주 마시는 편은 아니다. 알코올 함량이 제법 되는 술이다 보니 건강을 생각해 일주일에 한두 번 집에서 아내와 즐기는 정도다. 그 정도로 과연 진심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견우와 직녀가 일 년에 한 번 만난다고 해서 그 사랑이 가짜는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애틋한 마음만 커질 뿐이다.
그래서일까? 일주일에 한두 번 돌아오는 그 시간만큼은 특별한 순간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다. 공들여 준비한 와인과 음식의 조합이 성공적이면 그렇게나 기분이 좋건만 반대로 기대에 못 미치면 아쉬움과 실망감도 제법 크다. 매일 마신다면야 과감하고 모험적인 시도를 할 수도 있겠으나, 일주일에 한두 번인 만큼 실패 확률을 줄이기 위해 보수적으로 판단하게 된다.
하여, 다른 이들의 와인과 음식 체험담을 주의 깊게 살핀다. 특정 음식과 와인의 조합이 훌륭했다는 후기를 접하면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따라 해보기도 한다. 그렇게 와인 관련 커뮤니티 게시판 이곳저곳을 드나들며 체험기를 살펴보았는데 소비뇽 블랑과 스시의 조합이 괜찮았다는 후기가 가끔 눈에 들어왔다.
소비뇽 블랑! 가격도 저렴하고 마트에서 구하기 쉬운 품종 아닌가. 호기심이 발동했다. 하지만 예전부터 샤르도네 품종으로 만든 스파클링 와인과 스시의 조합에 상당히 만족하기도 했고, 소비뇽 블랑의 쨍한 신맛을 다소 부담스러워하는 편이기도 해서 굳이 시도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게시판을 서성이다가 부지불식간 가랑비에 옷 젖어버렸다. 심심할 만하면 소비뇽 블랑과 스시 조합 글을 마주치다 보니, 속는 셈 치고 한번 시도해볼까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자라났기 때문이다. 어느 날 저녁 내 앞에는 뉴질랜드산 소비뇽 블랑과 배달 스시가 놓여 있었다. 이러니 광고회사들이 바이럴 마케팅에 사활을 거는 것 아니겠나.
소비뇽 블랑과 스시, 먹어봤더니
마침 출출했던 터라 찐빵모자처럼 해산물을 눌러 쓴 밥 덩이를 허겁지겁 털어 넣고 꾹꾹 씹었다. 와인을 마실 테니 굳이 고추냉이 간장에 찍지는 않았다. 적당히 끈기 있는 밥알과 탱글탱글한 해산물이 입 안으로 들어가 모자가 훌러덩 벗겨질 정도로 디스코팡팡을 하다가 식도로 내려갔다. 드디어 소비뇽 블랑 차례다. 긍정적인 후기를 여럿 접한 터라 기대감을 품고 한 모금 들이켠 후 차분하게 음미했다.
음, 궁합이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찰떡처럼 잘 맞는다고 하기에는 다소 애매했다. 소비뇽 블랑 특유의 녹색 풀 뉘앙스와 쌉쌀한 자몽 풍미가, 담백하고 감칠맛 풍부한 스시의 여운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한참 잔잔한 클래식 음악을 듣고 있는데 맥락 없이 락 밴드가 난입한 느낌이랄까? 물론 이런 평가는 지극히 나의 개인적 취향에 의존한 것이지만, 어쨌든 실제로 그렇게 느꼈으니 거짓으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역시 스시에는 샤르도네로 만든 스파클링 와인이 그만이구나.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잔에 담긴 소비뇽 블랑의 향기를 맡고 있는데 번뜩 떠오르는 음식이 있었다. 바로 하와이 전통 음식인 포케다. 맞아! 이거야! 푸릇푸릇 개성이 강한 소비뇽 블랑에는 사군자 그림 같이 차분하고 담백한 스시보다는 조선 민화처럼 날것의 생명력과 신선함이 넘쳐흐르는 포케가 잘 어울리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힙스터와는 거리가 먼 내가 포케를 알게 된 것은 신문물에 관심 많은 아내 덕분이다. 포케는 하와이어로 '자르다', '십자형으로 조각내다'라는 뜻이다. 깍둑깍둑 썬 참치나 연어에 각종 야채와 견과류 및 곡류를 곁들여서 소스로 쓱쓱 비벼 먹는 음식이다.
야채를 충분히 먹을 수 있고 다양한 식재료가 들어가는 데다가 느끼하지 않고 신선하다며, 아내는 포케를 무척이나 즐긴다. 나 역시 아내의 의견에 상당히 공감하는 편이다. 이래저래 미심쩍은 가공식품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수렵 채집 시대의 원초적 건강함을 여전히 견지하고 있는 음식이랄까.
일단 꽂히면 순도 100퍼센트의 조급함이 발동하는 기질이다 보니, 포케에 곁들일 소비뇽 블랑 와인 두 병을 바로 구매했다. 각각 뉴질랜드산 스톤베이 소비뇽 블랑, 프랑스산 무통 카데 소비뇽 블랑이다. 소비뇽 블랑의 대표적 산지인 뉴질랜드와 프랑스를 비교 체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은 대체로 산도가 쨍하고 향이 강렬한 데 반해, 프랑스산은 상대적으로 점잖고 절제된 느낌이다. 이러한 캐릭터의 차이가 음식과 어울림에 있어서 어떻게 작용할지 궁금했다. 두 와인 모두 가성비가 뛰어나기로 유명한 데다가 가격도 2만 원 언저리로 비슷해서 기량을 견주기에 적절했다.
포케와 어울리는 와인들
드디어 결전의 날이 왔다. 배달앱에서 포케로 검색했더니 무려 29곳의 매장이 나온다. 확실히 요즘 핫한 음식이구나. 한 매장에서 메뉴를 살펴보다가 '아보카도 연어 샐러드 포케', '갈릭 쉬림프 샐러드 포케', '훈제 오리 샐러드 포케' 이렇게 세 가지를 주문했다. 조리 시간이 짧은 음식이다 보니 금세 도착했다.
가공식품 섭취로 오염된 체세포를 원시 인류의 체세포 수준으로 정화하겠다는 일념으로 성실하게 섭취하기 시작했다. 용기 안 풀때기를 한 수저 가득 떠서 꼭꼭 씹다 보면 어느덧 민트 치약으로 양치한 듯한 신선함과 개운함이 입 안에서 감돈다. 그 여운이 사라지기 전에 얼른 푸릇푸릇한 소비뇽 블랑을 주입했다.
일단 프랑스산 무통 카데부터 시작해서 그다음에 뉴질랜드산 스톤베이의 순서로 마셨다. 아무래도 맛과 향이 강렬한 뉴질랜드산을 나중에 마시는 쪽이 정확하게 판단하기에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포케, 그리고 두 와인을 어느 정도 체험한 후 아내에게 의견을 물었다.
"역시 포케와 소비뇽 블랑이 잘 어울리네."
"맞아. 정말 그래."
"프랑스산과 뉴질랜드산 중에 어떤 게 느낌이 더 좋아?"
"나는 프랑스가 낫네. 맛과 향이 절제되어 있어서 음식하고 더 잘 어울려. 뉴질랜드도 좋긴 한데 너무 존재감 뿜뿜이라서 상대적으로 음식과 살짝 겉도는 느낌이야."
"그래도 와인만 마신다면 뉴질랜드산이 프랑스산보다 더 인상적이지 않을까?"
"글쎄, 단독으로 마시더라도 프랑스산이 더 나을 것 같아.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은 계속 마시다 보면 좀 질릴 것 같거든."
물론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아내는 이런 의견이 그저 자신의 취향일 뿐이라며 혹시나 있을 논란 혹은 논쟁을 미연에 차단한다. 반박 시 네 말이 맞는다는 얘기겠지. 그렇다면 내 의견은 어떨까? 나는 둘 다 좋았다. 풍미는 뉴질랜드가 확실히 강렬하다. 와인 그 자체에 집중하는 사람이라면 직관적이고 노골적인 뉴질랜드산 스톤베이에 조금 더 끌릴 것 같다.
프랑스가 더 좋았다는 아내 의견 또한 공감한다. 확실히 무통 카데의 절제미는 음식과의 공존에 있어서는 다소 유리하다고 본다. 하지만 그렇게 우열을 가린다 한들 한 녀석이 95점이라면 다른 녀석은 93~4점 정도의 차이랄까? 어차피 둘 다 멋진 녀석인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안 그래도 이래저래 골치 아픈 세상, 고민하지 말고 마음 가는 대로 선택해서 편하게 즐기면 되지 않을까 싶다. 고민에도 에너지와 시간이 소요되니 말이다.